62화
Chapter 17. 새로운 팀 (2)
“민호야, 너 혹시 일인전승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니?”
그녀의 질문에 민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곧잘 읽었던 무협소설에서 본 적이 있었으니까.
“네, 한 명한테 모든 걸 전수해준다는 소리 아닌가요?”
“맞아. 토벌자는 기본적으로 일인전승이야. 제자가 아무리 많아도, 토벌자가 될 수 있는 건 한 명밖에 없지. 그래서 기본적으로 경쟁률이 치열해.”
경쟁률이 치열하다?
그 말에 민호는 의문을 품었다.
“왜 그렇게까지 경쟁률이 치열하죠? 특별한 보상이라도 있나요?”
“오, 예리한데?”
미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씨익 웃었다.
“토벌자가 되면 소원을 하나 빌 수 있어.”
“소원이요?!”
민호의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간절히 바라는 소원을 이룰 수 있다면 경쟁률이 치열한 것도 납득할 만한 일이었다.
“응, 대상이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소원. 대신 거창한 건 못 빌어. 예를 들면 죽은 사람을 살려달라거나, 이런 것들은 천계에서 거부해.”
다만 나름대로의 제한이 있었다.
민호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미래는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무튼 소원을 빌면 거창한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한 건 천계에서 다 들어줘. 그 대신, 토벌자는 계약기간 동안 착실하게 임무를 수행해야만 해.”
확실히 전달자에 비해 까다로운 조건이 붙었다.
그러자 혜진이 그렇게 말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아마 그녀는 편찮은 어머니가 다시 건강하게 해달라는 소원을 빈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어머니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임무에 충실해야한다고 대답했으리라.
“어라? 잠깐만요.”
그때 문득 민호의 뇌리를 스치고 가는 기억.
방금 전, 혜진은 분명 ‘어머니가 다시 편찮아지신다.’고 말했다.
이를 떠올린 민호는 설마 하는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럼 혹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소원을 뺏어가나요?”
“엉, 맞아.”
“······.”
민호는 말문이 막혔다.
“정확히 말하면 임무를 거절하거나 계약을 해지하면 뺏겨. 그리고 임무 실패도 5번인가? 그 이상하면 소원이 회수되고 토벌자의 자격이 일시적으로 정지됐던 거 같아.”
즉, 토벌자에게 있어 소원이란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임무를 실패하면 받는 최악의 페널티.
민호의 표정이 심상찮게 변하자, 미래가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지금까지 소원을 빼앗긴 토벌자는 없었어. 어쩔 수 없이 실패한 경우는 천계에서 정상참작을 해주니까. 그냥 형식적인 제약이라고만 생각하면 돼.”
이어진 대답에 민호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때 굳게 닫혔던 혜진의 입이 열렸다.
“저희 어머니는 췌장암 말기 환자셨습니다.”
췌장암 말기는 살아날 확률이 한 자리 수보다 낮다.
기적이 아닌 이상에야, 살아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될 정도로 최악의 병이다.
“병원에서도 3달을 넘기기 힘들다고 했지만, 다행히 사부가 절 토벌자로 선택해줘서 어머니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민호가 예상했던 대로 혜진이 빈 소원은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하는 것.
“그래서 저는 임무에 충실히 임할 겁니다. 그래봐야 1년이니까요.”
혜진은 허리를 곧게 편 채 당당히 대답했다.
그 모습이 기특하게 느껴진 탓일까? 민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구나. 전달자랑 다르게 빡세네.”
“대신 전달자는 소원을 안 들어주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민호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때, 혜진이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렸다.
“네? 전달자는 소원을 안 들어줍니까?”
“응. 아, 내가 말하지 않았었나?”
미래의 중얼거림에 고개를 끄덕인 혜진.
그녀는 다시 민호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럼 선배는 왜 전달자를 하게 되신 겁니까?”
혜진의 얼굴은 진지했다.
민호는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 솔직하게 대답했다.
“돈 때문에.”
“······예?”
혜진이 한 박자 늦게 멍하니 되물었다.
“보상을 돈으로 환전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달자가 된 거야.”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한 민호.
이어 그는 어깨에 앉아있는 율을 흘겨봤다.
“······물론 그 정도로 적은 금액일 줄은 몰랐지만.”
“아하하. 그, 그래도 이제는 꽤 올랐잖아요!”
율이 황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민호의 환전액은 약 15만원까지 올랐다.
7급이 되면서 환전율이 오른 덕분이었다.
“그리고 신세를 많이 진 삼촌이 있거든.”
민호가 전달자의 길을 선택한 계기는 마냥 돈 뿐만이 아니었다.
“그 삼촌한테 은혜를 갚고 싶은데, 그 방법이 전달자가 되는 것밖에 없었어.”
민호에게 있어 아버지와 같은 존재.
동석 삼촌이 처한 곤경을 해결해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자 혜진은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돈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선배도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전달자가 된 거군요.”
“음, 뭐 그런 셈이지.”
민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둘이 신의 대리인이 되었던 계기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때.
홀로 닭다리를 잡아 뜯고 있던 미래가 돌연 무릎을 탁 쳤다.
“아, 맞아. 까먹을 뻔했네.”
미래의 시선이 혜진과 민호에게 향했다.
그녀는 둘을 빤히 쳐다보며 무심한 듯 시크하게 말을 이었다.
“너희 둘, 이제 한 팀이야.”
“······네?”
“내일 진하가 새로운 관찰자도 소개해 줄 테니까 셋이서 친하게 지내.”
뜬금없는 말에 민호의 얼굴은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그럼 누나랑 진하 형은요?”
“2급 토벌자랑 4급 관찰자는 너희랑 놀 짬이 아니란다.”
“······.”
“아하하, 농담이야. 사실 조만간 대규모 토벌이 있거든.”
미래의 얼굴이 조금 진지하게 변했다.
하지만 닭다리를 내려놓지는 않았다.
“대규모 토벌이요?”
“응. 한국은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는 없어. 저기 중국에서 할 거야.”
미래의 말에 따르면 최근 중국에서 마인과 관련된 사건이 유독 많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중국 쪽 신의 대리인들이 타국에 지원을 요청한 상태고, 미래와 진하가 이에 응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래서 모레부터 나랑 진하는 잠깐 자리를 비우게 될 거야.”
미래와 진하의 부재.
이에 민호와 혜진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민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누나는 백수니까 그렇다 쳐도, 진하 형은 휴가를 그때까지 쓸 수 있대요?”
“백수 아니거든?!”
미래가 빽 소리를 질렀다.
목소리가 너무 컸던 탓일까? 몇몇 사람이 눈살을 찌푸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그 광경에 미래는 괜히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말을 이었다.
“큼큼! 그리고 진하는 걱정 안 해도 돼. 여름휴가를 대신 당겨서 쓰는 거니까. 아무튼 그렇게 됐으니까 셋이서 잘 지내. 알겠지?”
“알겠습니다.”
혜진이 착실하게 대답했다.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 기분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민호는 조심스럽게 심안을 사용했다.
그러자 그녀의 속마음이 말풍선으로 변해 사방으로 뻗어졌다.
[사부 말대로 선배는 협조적인 사람인 거 같아.]
[지내는데 불편한 점은 없겠어.]
[문제는 새로운 관찰자가 어떤 사람이냐에 대해서인데······.]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무표정한 얼굴만큼이나 딱히 아무런 감정 변화가 없는 듯했다.
그나마 민호를 좋게 봐줘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관찰자는 어떤 사람인가요?”
그때 혜진이 속마음을 그대로 입 밖에 내뱉었다.
미래는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선배님이야.”
“선배님이요?”
“응. 저번에 말했지? 은퇴할 예정인 아줌마가 하나 있다고.”
한국에 남아있는 신의 대리인에 대해 설명할 때.
미래는 이렇게 말했었다.
‘대신 관찰자는 좀 있어.’
‘은퇴 예정인 아줌마 하나랑 이제 막 관찰자가 된 애기 하나.’
민호는 떠올랐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미래가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실력은 오히려 진하보다 더 좋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설명은 여기서 끝! 나머진 진하가 소개해 줄 거야.”
미래는 더 이상 설명하기는 귀찮다는 듯 화제를 정리했다.
그러고는 콜라를 병째로 들며 외쳤다.
“자, 그럼 한 잔 하자. 건배!”
페트병 세 개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이어 미래는 1.5L 페트병에 든 콜라를 원샷하는 기행을 보여줬다. 민호는 그 모습을 질린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나마 술이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네.’
미성년자인 혜진을 생각해서인지, 미래는 치킨 집에서는 콜라만 마실 생각인 듯했다.
민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미래가 별안간 민호의 옆자리로 다가와 앉았다.
“민호야.”
“네?”
“방금 콜라로는 취하지 않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했지?”
“······독심술이라도 가지고 계십니까?”
민호는 질렸다는 듯 물었다.
이에 껄껄 웃음을 터뜨린 미래는 민호의 어깨에 팔을 걸쳤다.
그러고는 은근한 어조로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민호. 혹시 콜라 마시고 취한다는 얘기 들어본 적 있니?”
“그거 그냥 루머 아니에요?”
“후후, 오늘 누나가 루머가 아니라는 걸 보여줄게.”
미래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호는 등 뒤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
저녁 8시 무렵.
민호가 막 치킨 집에 도착했을 시각.
선릉역 먹자골목에 있는 막걸리 집에 한 남자가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등산복차림을 하고 있는 남자.
“에잉, 뭐야. 벌써 다 떨어졌어?”
남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5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그는 어느덧 술 한 병을 모조리 비워냈다.
“여기 막걸리 하나 추가!”
“예, 갑니다!”
잠시 후, 막걸리를 가득 담은 주전자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남자가 미소를 지으며 주전자를 집어들던 그때.
별안간 그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저벅 저벅-
묵직한 발자국 소리에 남자는 고개를 홱 돌렸다.
이어 남자는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상대를 맞이했다.
“이야, 이게 누구야. 전직 관찰자 양반이잖아?”
남자의 인사를 받은 이는 40대 후반의 남성.
칼처럼 올려 세운 머리에 안경을 쓰고 있는 날카로운 인상의 남성이었다. 남자와는 반대로 양복을 정갈하게 차려입은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여전히 소란스러운 곳을 좋아하는군.”
“하하,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을 좋아하는 거지.”
남자가 넉살좋게 웃었다.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아무튼 오랜만이다, 신창우.”
남자에게 창우라고 불린 그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범]. 우리에겐 코드네임이······.”
“에휴, 알겠다. 알겠어. [곰]이라고 부르면 되냐?”
창우의 말을 끊은 남자가 손을 휙휙 내저었다.
그러고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하여간 멀쩡한 이름 놔두고 왜 짐승새끼들 행세를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들키지 않기 위해서다. 알고 있을 텐데?”
“괜찮아. 신의 대리인들은 여기에 없거든. 저기 사당 쪽에 몰려있어.”
남자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우의 두 눈에 이채가 맺혔다.
“······능력으로 알아본 건가?”
“그래, 자자 일단 한 잔 받아.”
남자는 창우의 잔에 막걸리를 듬뿍 채웠다.
“새로운 권속을 만드는데 실패한 기념으로 한 잔 하자고.”
자신의 잔에도 술을 따른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한편 남자의 말을 들은 창우는 놀란 얼굴로 소리쳤다.
“실패? 네가?”
“엉. 생각지도 못한 방해꾼이 끼어들어서.”
그 말을 끝으로 남자는 막걸리를 그대로 들이마셨다.
“크으! 아직 이 땅에 영물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지.”
“영물이라고?”
창우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잘못 본 게 아닌가? 영물은 백 년 전에······.”
“섬나라 쪽바리 놈들이 싹 잡아다 죽여 놨지. 그래도 몇몇은 살아남았나보더라고.”
어깨를 으쓱인 남자는 두부 위에 볶은 김치를 얹어 입 안에 넣었다.
담백하면서도 매콤하고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지자, 남자는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하하, 아무튼 그래서 실패했다.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싶긴 하지만······.”
“불허한다. 꼬리를 밟힐 가능성이 있으니.”
“흐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이후로 남자와 창우는 두어 번 정도 술잔을 부딪쳤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술이 얼큰하게 오를 무렵.
굳게 닫혀있던 남자의 입이 다시금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