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4. 뒤풀이 (3) >
“선배님.”
익숙한 목소리에 민호는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소주병을 든 채, 씨익 웃고 있는 찬혁이 있었다.
“제가 한 잔 따라드려도 될까요?”
“어, 고맙지.”
엉거주춤하게 서있던 민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어 찬혁과 잔을 부딪친 뒤, 그대로 소주를 털어 넣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익숙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
능력 발동: [주신(酒神)의 은총]
-술을 감지하였습니다.
-면역 효과가 발동합니다.
-섭취량: 42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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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런 능력이 있었지.’
뽑기로 얻었던 능력.
최대 450ml까지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힘을 가진 능력이었다.
‘게다가 술 맛이 전혀 안 나잖아?’
분명 소주를 마셨을 텐데 맛은 그냥 물맛이었다.
민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능력인지 아닌지 감이 오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던 중 곁에 앉아있던 용석이 별안간 말을 걸었다.
“형, 근데 민지랑은 예전부터 아는 사이셨어요?”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몇몇 남학생들의 시선이 민호에게로 향했다. 민호는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용석의 질문에 답했다.
“아니? 이번에 처음 알았는데.”
“진짜요? 와, 근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친해지셨어요?”
“음, 그냥 뭐 이런저런 일이 있었지.”
민호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좋을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술이나 한 잔 하자.”
민호가 소주병을 들었다.
뒤이어 민호는 소주를 연달아 들이마셨다.
술이 더 들어가자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어갔다. 용석과 찬혁은 아예 어깨동무를 한 채, 이야기를 나눴다. 마치 형제처럼 보이는 모습이었다.
반면 민호는 여전히 쌩쌩했다.
“좀 번거로운 능력이긴 하네.”
소주를 맥주잔에 따라 마셨음에도 여전히 물맛만 났다.
당연히 취기도 오르지 않았다.
민호가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던 그때.
우우웅-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진하에게서 온 전화였다.
이에 민호는 마치 먹이를 낚아채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
“네, 다녀오세요.”
용석이 얼큰하게 취한 얼굴로 손을 흔들었다.
술집 밖으로 나온 민호는 곧장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민호냐? MT는 재밌었어?
“그냥 평범했어요. 임무만 빼면요.”
사실은 평범하지 않았지만.
설명하기가 귀찮았던 탓에 민호는 대충 대답을 마무리 지었다. 한편 임무라는 단어가 나오자 진하는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그렇구나. 미래랑 같이 임무해본 소감은 어때?
“좀 정신없긴 했지만 의외로 괜찮았어요.”
-하긴, 걔가 평소엔 나사 빠진 것처럼 보여도 임무할 땐 나름 진지하니까.
“그나저나 수박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듣기론 살이 잔뜩 올랐다던데.”
-영물이라 그런지 엄청 먹어대더라. 강아지가 아니라 돼지인 줄 알았어.
질색하듯 답하는 진하의 목소리에 민호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후로도 둘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았다.
주로 수박이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박이가 뭘 먹었는지, 그리고 무슨 행동을 했는지에 대해 설명하던 중, 진하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미안한데 수박이는 내일 데려다줘도 될까? 지금 사건이 하나 생겨서 잠깐 밖에 나와 있거든.
“그럼요. 제가 내일 찾으러 갈게요.”
-아니야, 내가 데려다줄게.
“네? 하지만 많이 피곤하실 텐데······.”
-너한테 줄 것도 있어서 그래.
그 말에 민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하에게서 마땅히 받을 게 없던 탓이었다.
그러던 그때, 진하가 본론을 꺼냈다.
-그리고 새로운 임무가 하달됐다.
민호는 이미 받은 임무였다.
신은미에게서 회수한 기적을 전달하는 것.
-대상의 이름은 유지은. 나이는 올해로 만 17세. 고3 수험생이고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가정형편은 썩 좋지 못해. 그리고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특이한 점이요?”
-응. 가정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유명 연예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다는 거야. 소속사와 계약한 건 고등학교 1학년 가을 무렵. 데뷔는 아직 못한 것 같다.
진하는 연이어 대상의 정보를 전달했다.
그러던 중 수화기 너머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어? 저 새끼! 야, 저 새끼 잡아!
뭔가 사건이 터진 것 같았다.
뒤이어 진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호야, 미안한데 남은 정보는 문자로 보내줄게!
“네, 알겠습니······.”
민호의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아무래도 급한 사건인 모양이었다.
이에 민호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다시 술집으로 향했다.
그러던 그때, 그의 시선을 끄는 이가 나타났다.
“어?”
포니테일에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학생.
길을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 정도로 예쁜 외모를 가진 그녀.
바로 민하영이었다.
하영은 누군가와의 통화를 마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민호는 그녀에게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하영아!”
“미, 민호 오빠!?”
뒤늦게 민호를 발견한 하영이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그녀는 두 눈에 놀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후배들이랑 잠깐 술자리가 있어서. 너는?”
“레슨 끝나고 어머니 기다리는 중이에요.”
하영이 나직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레슨을 시작했다고 들었던 것 같았다. 민호가 고개를 끄덕이던 무렵, 하영은 손에 든 휴대폰을 꼬옥 쥐었다.
그러고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사, 삼십분 정도 늦을 거 같다고 하시긴 했지만요.”
“엥? 진짜?”
민호가 기억하는 하영의 어머니는 어지간해선 약속시간에 늦는 적이 없었다. 하영도 가끔 예정된 시간보다 늦게 집에 들어가면 혼이 난다고 말하곤 했었다. 그렇게나 약속시간에 철저하던 사람이 늦는다고 하니, 새삼스럽게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여기 계속 서있기도 뭐하니까 커피나 한 잔 하자.”
민호가 근처에 있는 카페를 가리켰다.
하영은 순순히 민호의 뒤를 쫓아 카페로 향했다. 둘은 창밖이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커피가 나오자 하영은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다.
그러던 중 하영의 얼굴에 변화가 생겼다.
미간이 찌푸렸다가 펴졌다가를 반복하는 것. 이를 본 민호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저건 고민이 있을 때 나오는 버릇인데······.’
어렸을 때부터 고민이 있으면 하영은 무의식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것이 심한 고민일수록 미간을 찌푸리는 행동이 반복됐다. 벌써 세 번을 넘어가는 반복행동에 민호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하영아.”
“네?”
“혹시 무슨 고민 있어?”
“아, 아니요. 고민은요. 그냥 레슨 때문에 조금 피곤해서 그래요.”
하영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면서 코를 한 차례 찡그렸다.
‘거짓말이구나.’
이것도 그녀의 버릇 중 하나였다. 거짓말을 하면 순간적으로 코를 찡그리는 것. 이에 민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나이가 들어도 변함없는 버릇이 꽤나 귀여워보였던 탓이다.
‘어디 한 번 알아볼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숨기고 있는 고민.
그것을 알아내기 위해 민호는 심안을 사용했다.
[어쩌지, 오빠한테 한 번 물어볼까?]
[으응, 아니야. 실례일지도 몰라.]
[후우. 어떻게 하지······.]
하지만 심안을 사용해도 하영의 고민은 알아내지 못했다.
결국 민호는 돌직구를 날리기로 결심했다.
“고민이 있으면 말해봐.”
“아, 아니에요. 아무 고민도······.”
하영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던 그때.
민호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하영의 미간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예전부터 안 풀리는 일이 있었으면 여기가 좁아졌다가 펴졌다가 그랬잖아.”
“······!”
“그리고 거짓말을 하면 코를 찡그렸지.”
민호가 씨익 웃었다.
그 말에 하영은 황급히 코를 가렸다. 하지만 붉어진 얼굴까지 가리진 못했다.
“다 들켰으니까 말해.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민호는 자세를 바로 한 채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잠시 후, 하영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단한 고민은 아닌데요.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요······.”
길게 늘어지는 말투와 함께 그녀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고등학교 2학년생이었던 하영은 교외 봉사활동을 하던 중, 여학생 하나를 알게 됐다. 그녀보다 한 살 아래였던 여학생은 붙임성도 좋고 싹싹한 성격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영은 여학생과 빠르게 친해졌다. 친한 동생이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학생은 기타 연주와 노래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상 가수의 꿈을 꾸진 못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하영은 평소 그녀를 예뻐하던 외삼촌에게 부탁을 했다.
“아, 외삼촌은 이런 분이세요.”
그때 하영이 지갑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대표이사 한성철>
가수와 배우들을 키우는 연예기획사.
엄청 유명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중간 이상은 가는 회사였다. 민호도 얼핏 들어본 적이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었다.
“간단한 오디션을 보고 외삼촌은 바로 계약을 했어요.”
악기적주와 노래에 대한 상당한 재능.
이를 알아본 외삼촌은 여학생과 계약을 맺고 그녀를 데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데뷔는 차일피일 미뤄질 뿐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악기적주와 노래에는 꽤 재능이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던 탓이었다.
“외삼촌 말씀을 빌리면 확 끌리는 뭔가가 없다고 해요.”
여학생은 평범했다.
얼굴도, 몸매도, 춤도 썩 잘 추는 편이 아니었다. 끼가 많은 것도 아니고 애교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건 오직 하나, 재능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시장에서 노래와 악기적주만으로는 살아남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성형수술을 시키면서까지 데뷔를 해보려고 했지만, 그건 여학생의 반대로 무산됐다.
수술에 대한 강한 공포가 있던 탓이었다.
데뷔 가능성이 낮은 연습생은 기획사 입장에선 애물단지와도 같았다. 점점 끊기기 시작하는 지원. 그러던 차에 설상가상으로 최근엔 다리까지 다쳤다고 했다. 버스와 지하철로는 통근하기가 너무 힘들어서 차를 지원해주려고 했는데, 문제는 사람이었다.
운전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지금 따로 뺄 수 있는 인력이 없다고 해요.”
하영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좋은 의도로 여학생을 추천해줬다. 그런데 좋은 대접을 받기는커녕, 애물단지 취급만 받는 것 같아서 하영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다시 외삼촌에게 잘 좀 봐달라고 했는데,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저보고 사람을 하나 추천해달라고 하셨어요. 입이 무겁고 믿을만한 사람이요.”
하는 일은 기획사와 여학생의 집을 차로 왕복하는 것.
기간은 여학생의 다리가 다 낫는 2주 동안이었다. 일종의 단기 아르바이트였다.
“근데 제 주변에 그런 사람은 몇 없거든요. 특히 믿을만한 사람은······.”
하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면서 곁눈질로 민호를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한편 민호는 미묘한 표정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이거 완전 진하 형이 해준 얘기랑······.’
하영이 얘기해준 친한 동생의 이야기.
이는 진하가 전화로 말해준 다음 임무의 대상, 유지은의 정보와 거의 흡사했다. 잠시 후, 상념에서 벗어난 민호는 설마 하는 얼굴로 물었다.
“혹시 그 아는 동생 이름이 어떻게 돼?”
“아, 지은이에요. 유지은.”
하영의 대답에 민호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동시에 율이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이 정도면 주인님 전생이 우연의 신이라고 해도 믿겠는데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민호는 율의 말을 무시한 채, 하영의 말을 정리했다.
“음, 그러니까 2주 정도만 알바를 쓴다는 거지? 주로 하는 일은 그 지은이라는 친한 동생을 차로 픽업하는 게 전부고.”
“네, 맞아요.”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민호는 고민하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럼 내가 할게.”
“정말요?”
하영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하지만 오빠도 많이 바쁘실 텐데······.”
“괜찮아.”
민호가 씨익 웃었다.
이어 그는 하영의 머리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네가 곤란해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지.”
“······!”
민호의 말에 하영의 눈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잠시 후, 하영은 붉게 물든 귀를 애써 감추며 고개를 살며시 끄덕였다.
“······고마워요, 오빠.”
그러고는 이내 배시시 웃었다.
이를 마주보며 민호도 짙은 미소를 지었다.
하영은 민호에게 있어 여동생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민호는 하영이 곤란해 하는 일이 있으면 최대한 도와주고자 했다.
그러던 중 창밖 너머로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나타났다.
“어라? 어머님 오신 거 같은데?”
바로 하영의 양모인 한유선이었다.
그러자 하영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어 허겁지겁 가방을 챙겨 카페 밖으로 나가려던 찰나! 하영이 돌연 민호를 돌아봤다.
“오, 오빠! 제가 바로 연락드릴게요!”
그 말을 끝으로 하영은 카페를 벗어나 유선에게 향했다. 헐레벌떡 뛰어온 하영의 모습에 유선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기만 할뿐, 별다른 질책은 없었다. 잠시 후, 하영을 태운 차가 모습을 감추자 민호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일이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몰랐네.”
“진짜 제가 본 전달자 중에서 주인님만큼 운이 좋은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
율의 말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이번 건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으니까.
우웅-!
그때 마침 진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필시 유지은에 대한 정보이리라.
민호는 반쯤 남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 Chapter 14. 뒤풀이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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