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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42화 (42/182)

< Chapter 11. MT (4) >

찌르르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깊은 산 속.

커다란 소나무 아래, 누군가가 쪼그려 앉아있었다.

얼굴을 무릎 사이에 파묻은 여성.

그녀는 산에서 한바탕 굴렀는지, 낙엽과 흙먼지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한참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성은 이내 주먹을 꼬옥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테가 조금 휘어진 안경을 쓴 여성.

바로 서민지였다.

고등학교 시절.

민지는 반 친구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학교에 가면 의자나 책상이 사라져버리는 일은 예사였고, 화장실에선 때 아닌 물 폭탄으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기도 했다.

괴롭힘을 당한 이유는 아직도 모른다.

그저 언제부턴가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애들’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 상황에 저항했다. 주변에 도움을 청하고, 선생님께도 알려봤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녀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건 아주 잠시뿐이었다. 이후 괴롭힘은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민지는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이후 검정고시를 통해 졸업장을 받고,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까지 입학했다. 남들보다 1년 늦은 시작이긴 했지만 그래도 민지는 만족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으니까.

대학생활도 순조로웠다. 이미지 변신도 성공적이었다.

개강총회에서 적지 않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 중에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예쁜 아이도 있었다.

‘안녕, 난 신은미라고 해.’

‘와, 머리 진짜 부드럽다. 샴푸 뭐 쓰는지 물어봐도 될까?’

바로 은미였다.

은미는 학창시절, 민지를 괴롭혔던 애들처럼 ‘잘 나가는 애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은미는 그녀를 괴롭히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그녀와 친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은미의 태도는 며칠 만에 180도로 뒤바뀌었다.

‘근데 있잖아.’

‘너 저번부터 왜 이렇게 나대?’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

차갑게 굳어진 얼굴.

은미는 민지에게 고등학교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드는 존재로 변했다.

물론 태도가 변한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개강총회 이후, 민지는 18학번 과대인 채강현에게서 밥을 얻어먹은 적이 한 번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밥만 먹었을 뿐이었다.

그 이후 채강현과 따로 만난 적이나 연락을 주고받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은미는 채강현과 단둘이 식사를 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갑자기 민지를 적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괴롭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졌다.

‘내가 알아봤는데 너 수란여고에서 왕따 당했다며?’

‘왕따 당하는 애들은 다 이유가 있다던데.’

‘왕따였던 거 애들한테 말하면 재밌을 거 같지 않아?’

심지어 민지의 뒷조사까지 했다.

이에 민지는 마음대로 해보라고 쏘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말하려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가슴 속에만 담아둘 뿐, 내뱉지 못했다. 순조로운 대학생활이 또 다시 악몽으로 변하는 게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은미가 두려웠다.

그녀를 보면 학창시절, 민지를 괴롭혔던 가해자들이 떠올랐던 탓이다.

‘왕따였던 거 알려지기 싫으면 내 말 잘 들어.’

‘넌 앞으로 꾸미고 다니지 마.’

‘그리고 내가 부르면 바로 달려와. 알겠어?’

불합리한 괴롭힘은 계속됐다.

그럼에도 민지는 이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몸부림치고 반항해도 해결되는 일은 없다는 걸. 저항할수록 더 큰 고통만이 기다리고 있단 걸.

그래서 민지는 점점 은미에게 말려들었다.

대학생활은 다시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늘 MT에서도 변한 건 없었다.

‘야, 너 내 말이 우습게 들려?’

‘그 선배는 또 뭐야? 네가 꼬드긴 거지?’

‘하! 그럼 내가 너 못 건들 줄 알았어?’

신입생 레크레이션이 끝나고.

민지는 은미 패거리에게 붙들려 인근 산 속으로 끌려갔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오자, 은미는 그동안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던졌다.

표독스러운 얼굴과 매서운 목소리.

‘그리고 이 신발은 또 뭐야?’

‘내가 이런 거 신으라고 했던가?’

‘또 남자들한테 끼 부리려고 그러는 거지? 어?!’

은미는 심지어 신발까지 꼬투리 잡았다.

그러고는 억지로 신발을 벗겼다. 어머니에게서 생일선물로 받은 신발이었지만, 민지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겁에 질린 눈으로, 은미를 바라볼 뿐이었다.

‘우리 민지, 오늘 좀 혼나야겠네.’

그 말을 끝으로 악몽이 시작됐다.

이어지는 발길질과 각종 폭언. 은미는 티가 잘 나지 않는 부위만 골라서 때렸다. 행여 나중에 문제가 생기는 걸 막기 위한 것처럼 교묘한 행동이었다.

생일선물로 받았던 신발은 흙먼지로 범벅이 됐다.

길고 긴 악몽이 끝난 뒤.

은미는 민지의 신발과 휴대폰을 뺏은 뒤, 그녀를 홀로 이곳에 둔 채 산을 내려갔다.

민지는 방금 전까지 겪었던 악몽을 떠올리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입술을 깨물며 바지를 꽉 움켜잡았지만 떨림은 멎지 않았다.

“······흐윽.”

꽉 다문 입술 사이로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제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악몽은 끝나지 않을까? 정말 내가 잘못했기 때문일까? 내가 강현 선배랑 밥을 먹어서? 왕따를 당했던 것도 내게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래서 발버둥쳐도 변하는 게 없었던 걸까?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가슴이 답답해지고 숨을 쉬기가 점점 힘들어졌다.

눈물을 뚝뚝 흘리던 민지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이대로 쭉 눈을 감고,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럼 더 이상 악몽을 겪지 않아도 되겠지. 더 이상 괴롭힘 당하지 않아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민지는 어느 순간, 눈을 살짝 떴다.

오로지 공허뿐인 눈동자.

옆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절벽이 있다. 계곡으로 이어지는 깊고 험한 절벽.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던 민지는 하나둘씩 끈을 놓기 시작했다.

삶의 미련이란 이름의 끈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으, 으으······.”

민지의 귀가 움찔 떨렸다.

풀벌레 소리만 가득하던 산 속에서 들려온 이질적인 소리.

처음엔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인적 없는 곳에서 신음소리 같은 게 들려온다면 누구라도 덜컥 겁이 들 테니까.

“으으······. 쿨럭, 쿨럭!”

곧이어 기침소리가 들렸다.

이는 흡사 생명이 꺼져가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도움을 바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이에 민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삶의 미련을 놓았었는데 이상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민지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쫓아 어두운 산에 발을 내딛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민지는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

가파른 언덕에 한 노인이 쓰러져 있었다.

파란색 바람막이와 츄리닝 바지를 입은 70대 초반의 노인.

민지는 황급히 노인에게로 다가갔다. 낯선 사람을 만났다는 두려움보다 도와야한다는 마음이 좀 더 강한 탓이었다.

“하,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쿨럭, 쿨럭! 추, 추워. 흐으으······.”

하지만 노인은 대답 대신, 연신 몸을 웅크린 채 덜덜 떨었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과 손. 이를 본 민지는 입고 있던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그녀는 티셔츠와 바지만 입은 채, 나머지 옷가지로 노인의 몸을 감쌌다.

바람을 막고 체온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곧장 119에 신고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아, 휴대폰이······.”

하지만 민지의 휴대폰은 아까 은미가 가져가버렸다.

이를 떠올린 민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던 그때, 민지의 눈에 노인의 휴대폰이 보였다. 통화내역에는 이미 119 번호가 두 번이나 찍혀 있었다. 아마 노인이 누른 것처럼 보였다.

이에 민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 조금만 참으세요, 할아버지. 곧 119가 올 거예요.”

민지는 두 손으로 노인의 손을 감쌌다.

그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민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찌릿-

그때 노인의 손을 타고 정전기가 튀듯 찌릿한 감각이 들었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인 만큼, 민지는 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노인이 정신을 놓지 않게 하려는 듯,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때까지 제가 곁에 있을게요.”

민지는 굳건한 각오가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한편 끙끙 앓는 노인의 속내는 당혹스러움 그 자체였다.

‘아니, 그냥 빨리 가줬으면 좋겠는데······.’

왜냐면 노인은 바로 민호였던 탓이었다.

율을 따라 민지를 찾은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민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녀가 잘못된 선택을 하기 전에, 시험을 치르고 기적을 전달해야만 했다.

그래서 민호는 재빨리 머리를 굴려 계획을 짰다.

그리고 시험을 멋지게 통과했다. 기적도 확실히 전해줬다.

‘······근데 이제 어떻게 하지?’

하지만 급하게 계획을 짜느라 마무리까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민호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떠서 민지를 바라봤다.

그녀는 얇은 티셔츠 한 장만 걸친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럼에도 민지는 요지부동이었다. 119가 오기 전까진 자리를 뜰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보였다.

‘이대로 있으면 안 돼.’

민호는 입술을 살짝 때물었다.

계속 이렇게 있다간 민지가 먼저 저체온증으로 쓰러질 판이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이 난관을 빠져나갈 묘안이 필요했다.

그렇게 민호가 머리를 굴리던 그때!

돌연 민지가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이어 몽롱한 표정을 짓더니, 그대로 옆으로 픽 쓰러졌다.

“어, 어어?”

갑작스런 민지의 변화.

이에 민호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민지를 부축했다. 두 눈을 곤히 감은 그녀는 누가 봐도 잠에 든 모습이었다.

“뭐지?”

다치거나 정신을 잃은 게 아니라 다행이었지만 조금 이상하긴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애가 갑자기 잠에 든다? 상황 자체가 너무 이질적이었던 탓이었다.

그러던 중 수풀 너머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

“임무 완료한 거 축하해.”

이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잠시 후, 한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갈색 야상 잠바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있는 그녀는 민호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래 누나?”

“곤란해보여서 도와주러 왔지.”

2급 토벌자 차미래.

그녀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아, 너무 걱정하진 마. 잠깐 재운 거니까. 한 시간이면 깨어 날거야.”

민지를 잠에 빠지게 만든 장본인은 미래였다.

한편 민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여긴 어떻게······.”

“말했잖아? 늘 지켜보고 있다고.”

다시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질겁하는 민호의 모습에 미래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 농담이야. 사실 율이한테 연락을 받았거든.”

“히히, 제가 모셔왔어요! 잘했죠?”

미래의 어깨에 앉아있던 율이 의기양양한 듯 외쳤다.

이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그래, 잘했어.”

난데없는 등장에 깜짝 놀라긴 했지만 어쨌든 덕분에 살았다.

그렇게 생각한 민호는 민지에게 겉옷을 입혀줬다. 체온이 내려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얘, 되게 안쓰럽더라. 몇 시간 동안 혼자 저기서 울고 있더라고.”

미래는 측은한 시선으로 민지를 바라봤다.

그녀의 말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민지가 얼마나 괴로웠을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기적을 전해줬으니 괜찮아지겠지.”

민지의 머리를 쓰다듬던 미래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보다 민호야.”

“······네?”

“혹시 보라색 원피스 입고 있던 애 알아?”

뜬금없는 질문에 민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미래가 설명을 덧붙였다.

“얘랑 같이 있던 애였어. 꽤 예쁘장한 얼굴이었는데 이름이 뭐더라······.”

“신은미요?”

“아, 그래. 그런 이름이었지.”

미래는 기억났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이거 보고 여기에 없는 정보 있으면 좀 줘볼래?”

“네? 우왓!”

미래가 갑자기 휴대폰을 던졌다.

가까스로 이를 받아든 민호는 그녀의 휴대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진하에게서 온 문자가 있었다.

-대상의 이름은 신은미.

-나이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됐어.

-공교롭게도 민호와 같은 학교네.

-그리고 차주에 가평으로 MT를 간다고······.

진하가 보낸 문자 내용.

민호는 순간적으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응, 맞아.”

미래는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얼굴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걔가 내 토벌 임무의 대상이야.”

< Chapter 11. MT (4)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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