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0. 토벌자 (2) >
“너, 민호라고 했었나?”
“네? 아, 네.”
“최근에 악덕을 한 번에 50이나 쌓았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민호는 일순간 한기를 느꼈다.
이상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땀이 날 정도로 더웠는데 지금은 더위가 싹 가셨다. 대신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차디찬 기운이 몸을 감쌌다.
“그 정도면 사람 하나 반 죽여 놨다는 소린데······.”
미래가 말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어 그녀는 민호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속마음까지 꿰뚫어보는 시선과 함께, 미래가 입을 열었다.
“······설마 마인이라도 될 생각은 아니겠지?”
그러자 다시 공기가 뒤바뀌었다.
차갑던 공기는 날카로운 칼처럼 변했다. 민호의 본능이 강렬한 경고를 보내왔다. 자칫 잘못 대답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꿀꺽!
긴장감에 민호가 마른침을 삼키던 그때.
“토벌자님!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요.”
“차미래, 그건 내가 설명······.”
율과 진하가 미래를 말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던 그때, 둘이 미처 생각지 못한 존재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설명할게.
방금 전까지 민호의 발밑에 앉아있던 수박이었다.
한편 그의 등장에 진하와 미래의 얼굴엔 놀람의 빛이 어렸다.
“여, 영물?”
“어라? 영물이 왜 여기에······.”
-민호 도령은 죄가 없어. 탓하려거든 날 꾸짖도록 해.
혼란스러워하는 둘을 바라보며 수박이는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차디찬 맥주가 미지근하게 식을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길게 이어졌던 수박이의 이야기가 끝났다.
“그랬구나.”
민호 주변을 감싸던 싸늘한 공기는 진즉에 사라졌다. 미래는 두 눈을 감은 채, 수박이의 이야기를 곱씹었다.
그러고는 이내 납득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겠네.”
눈을 뜬 미래는 곧장 민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오해했네. 미안해.”
깔끔한 사과였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와 함께 말을 덧붙였다.
“내가 마인 알레르기가 좀 있어서. 헤헤.”
“하아, 내가 그 급한 성격 좀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했냐?”
한숨을 내쉰 진하가 미래를 쏘아봤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미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기억났다!”
“또 뭐가?”
“민호 동생을 찾아온 이유. 아, 민호 동생이라고 불러도 되지?”
미래가 묻자 민호는 쿨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크! 누구랑은 다르게 시원해서 좋다.”
짧은 감탄을 내뱉은 미래는 진하를 흘겨봤다.
이어 그녀는 헛기침을 하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그럼 민호야.”
미래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중요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분위기.민호도 덩달아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그러나 미래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영 생뚱맞은 것이었다.
“다음 주말에 누나랑 같이 가평 갈래?”
“······네?”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아야야!”
그때 진하가 미래의 귀를 잡아당겼다.
꽤 세게 꼬집은 탓인지, 미래의 귓불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아, 왜애?!”
“그러니까 급한 성격 좀 고치라고. 중간에 생략한 부분부터 차근차근 말해.”
진하의 말에 미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미래가 난데없이 가평에 가자고 한 이유.
그건 바로 그녀의 다음 임무와 관련이 있었다.
전달자의 주된 임무가 기적을 선인에게 전하는 것처럼, 토벌자의 주된 임무는 마인 토벌이다. 마인으로 변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마인이 된 타락자들을 처단하는 것.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할 건, 토벌자가 마인을 토벌하면 그가 가지고 있던 기적은 세상에서 소멸된다는 점이었다.
“왜냐면 기적은 오직 전달자만이 만질 수 있으니까.”
미래의 말에 민호는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말은 언젠가 율에게서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반드시 회수해야만 하는 기적을 마인이 가지고 있을 때야.”
마인은 기적을 악용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전달자나 관찰자는 마인을 상대하기 어렵다. 그럼 어쩔 수 없이 토벌자가 마인을 상대해야하는데, 그렇게 되면 기적은 소멸한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그래서 너와 협력을 하고 싶어.”
미래가 진지한 눈으로 민호를 바라봤다.
“대체 어떤 기적이기에······.”
얼마나 대단한 기적이면 소멸하지 않고 회수해야한단 말인가?
민호가 궁금해 하자 미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곧 네가 전달해야할 기적.”
“네?”
“조만간 그 기적을 필요로 하는 선인이 나타날 거야.”
미래의 대답에 민호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임무조차 내려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민호의 얼굴에 미래는 돌연 씨익 웃었다.
“2급 토벌자 쯤 되면 약간이나마 천기를 읽을 수 있거든.”
완전히 이해되진 않지만 그래도 대충 납득할 수는 있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민호의 의문은 아직 전부 풀리지 않았다.
“그냥 천계에서 기적을 다시 만들어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천계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기적은 내려주지 않아.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기적을 회수하거나 소멸시킨 다음에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지.”
이 세상에 동일한 기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렇게 설명했다.
“그런데 소멸한 기적을 다시 만들려면 꽤 시간이 걸려. 그런데 만약 그 사이에 명부에 들 예정인 선인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곤란한 상황이 벌어질 거다.
대상이 명부에 들기 전에 적합한 기적을 전달해야하는데 정작 기적 자체가 없으니까.
“설마 임무가 생겨나지 않게 되는 건가요?”
“맞아.”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민호가 놀란 듯 묻자, 미래는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상은 예정대로 명부에 들고, 기적은 다음 생에 주어지게 돼. 천계 입장에서 보면 이번 생과 다음 생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니까. 또 실제로도 그런 경우를 종종 봤고.”
“······!”
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미래가 말한 게 무슨 뜻인지 깨달은 탓이었다.
마인에게서 기적을 회수하면, 정상적으로 임무가 생성된다. 그럼 명부에 들 예정이었던 선인은 전달자를 통해 기적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기적을 회수하지 않고 소멸하도록 내버려두면, 원래 생겨나야 할 임무가 생성되지 않는다. 천계가 다시 기적을 만들기 위해선 다소 시간이 걸리니까.
그럼 선인은 다음 생이 되어서야 기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난 그런 경우를 최대한 줄이고 싶어. 그러려면 믿을 만한 전달자가 필요해.”
응당 받아야할 기적을 받지 못해 죽어간 이들.
미래는 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현재의 그들을 구할 가능성이 단 1퍼센트라도 있다면 구하려고 했다.
“다시 한 번 물을게. 날 도와줄래?”
미래와 민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흔들림이 없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민호는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생각 좀 해볼게요.”
“그래, 그럴 줄 알았······ 엥?”
“사정은 딱하지만 저도 제 삶이 있으니까요.”
민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누군가의 불행을 막는 일은 굉장히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민호는 미래가 더욱 대단해보였다. 단순히 임무를 완수하는 걸 넘어, 천기를 읽으면서까지 선인을 구하려고 하니까.
“제 임무는 선인에게 기적을 전하는 일입니다.”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민호의 말이 이어졌다.
“전 선인에게 기적을 전하며 보람을 느껴요.”
착하게 산 사람들에게 기적을 전해, 그들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
그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하지만 저는 그들을 위해 제 인생까지 바치고 싶진 않아요.”
이게 바로 민호가 미래와 다른 점이었다.
미래는 지나치게 토벌자의 사명에 충실했다. 그래서 세계 최초이자 최고라는 거창한 타이틀까지 손에 넣었다. 동북아시아 제일의 토벌자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러나 민호는 달랐다.
그는 전달자가 됐음에도 임무에 모든 걸 쏟아 붓진 않았다. 임무를 하면서도 본인의 생활에 충실했고, 또 남는 시간에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알바도 했다.
미래처럼 사명에 충실한 사람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리라.
“남을 위해 사는 건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전 저를 잃으면서까지 살고 싶진 않습니다. 제가 전달자가 된 건 선인을 돕기 위한 것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저를 위해서니까요.”
민호는 소신껏 스스로의 신념을 밝혔다.
그의 말이 끝나자 미래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불처럼 화를 낼까? 아니면 무책임하다며 다그칠까?
민호는 내심 긴장했다.
그러고는 잠자코 이어질 미래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미래는 그가 예상한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번’ 전달자는 좀 다르네. 안심했어.”
그저 시원한 미소와 함께 묘한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진 말도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럼 다음 주 몇 시에 만날까? 누나가 데리러 갈게.”
그녀의 말에 민호는 멍한 얼굴로 미래를 바라봤다.
“······저기, 제 말 제대로 이해하신 거 맞죠?”
“응? 물론이지. 날 도와준다는 거잖아?”
“아니, 그게 아니잖······.”
“선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널 위해서 하면 되는 거지? 그럼 답은 간단해.”
민호의 말을 끊은 미래가 테이블에 비스듬히 걸터앉았다.
그녀는 민호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하한테서 들었어. 너 주말마다 알바 한다면서?”
알바를 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
돈을 벌기 위해서다.
그래서 미래는 민호에게 가장 강력한 미끼를 던졌다.
“내 임무를 도와주면, 내 보상 전부 환전해서 네게 줄게. 어때?”
“······!”
파격적인 제안에 민호는 눈을 크게 떴다.
“2급 토벌자의 환전액은 꽤 많아. 음, 이번 임무는 큰 거로 세 장이려나.”
미래가 손가락 세 개를 폈다.
민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어때? 구미가 당기지 않아?”
미래의 입가에 시원스런 미소가 맺혔다.
이를 마주보던 민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까지 어디로 가면 됩니까?”
마인을 처단하고 선인을 돕는데다가 막대한 금전적 보상까지 받는다.
거절하는 게 이상할 정도로 좋은 조건이었다.
“후후, 그건 나중에 문자로 알려줄게.”
미래는 민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그럼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오늘은 그냥 실컷 마시자. 내가 쏠 테니까.”
“크흠! 난 내일 오전 근무라 먼저 일어나지.”
그때 돌연 진하가 몸을 일으켰다.
이상할 정도로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 이를 본 민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어, 저도 내일 수업이 있어서 이만······.”
민호도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그때!
덥석-
미래가 손을 뻗어 둘의 손목을 움켜잡았다.
“에이, 벌써 가면 재미없지.”
그녀의 말과 함께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뿌리치려고 해도 힘이 들어가지가 않았다. 또 힘을 줘서 빼내려고 하면 어디 한 군데가 부러질 것만 같은 불길한 기분도 들었다.
“자, 얼른 앉아. 난 아직 취하지도 않았다고.”
“······!”
미래가 팔을 거두자 민호와 진하의 몸이 기우뚱거렸다. 둘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의자에 앉게 됐다. 미래는 테이블에 걸터앉은 채로 캔 맥주를 들었다.
“자자, 건배!”
그녀의 외침에 진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모든 걸 포기한 듯한 한숨.
그리고 민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한숨의 의미를 이해했다.
“푸흐흐, 오늘 밤은 재우지 않을 거니까 각오해.”
미래의 음흉한 미소를 끝으로.
민호는 그 자리에서 아침을 맞이했다.
이후 ‘절대 함께 술을 마시면 안 되는 사람 블랙리스트’에 미래를 추가했다.
< Chapter 10. 토벌자 (2)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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