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9. 동료 (3) >
“혹시 학생이 기르는 애야?”
“하하, 네. 어쩌다 보니 인연이 닿아서······.”
민호가 머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유, 잘됐네. 여긴 널찍하니 키우기도 좋을 거야.”
입을 가린 채 웃는 영자.
이어 그녀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에 발을 내딛었다.
“나중에 우리 해피랑도 인사시켜 줘야겠다. 그럼 푹 쉬어.”
“예, 들어가세요. 수박 잘 먹겠습니다.”
“멍!”
민호와 영물이 영자를 배웅했다.
이윽고 그녀가 모습을 감추자 민호는 수박을 들어올렸다.
“크! 실하다, 실해. 얼른 잘라서 넣어둬야지.”
묵직한 무게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 수박이면 넉넉잡아 열흘은 먹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민호가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도령, 도령!
별안간 영물이 민호의 앞을 막아섰다.
답지 않게 흥분한 모습이었다.
-나도 조금 먹어봐도 될까?
영물의 초롱초롱한 눈빛에 민호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괜찮긴 한데, 개가 수박 먹어도 돼?”
-응, 포도만 아니면 상관없어.
“뭐, 그렇다면야. 알았어, 금방 잘라줄게.”
-만세!
어째 집을 만들어준다고 할 때보다 더 기뻐 보이는 모습이다.
잠시 후, 민호는 쟁반에 수박을 담아왔다.
먹기 좋게 껍질도 벗겨냈다.
“자, 여기.”
민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영물은 쟁반에 코를 박고 수박을 먹기 시작했다.
챱챱챱-
수박을 먹는 영물의 꼬리가 엄청난 속도로 살랑거렸다.
흡사 헬기의 프로펠러를 보는 기분이었다.
참 맛있게도 먹는 영물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중, 문득 민호의 뇌리를 스치는 단어가 있었다.
“수박이.”
“네?”
“그래. 수박이라고 하자. 수박을 좋아하니까.”
민호가 영물을 바라보며 말하자 율은 어색하게 웃었다.
“또 그런 대충 갖다 붙인 이름을······.”
-촌스럽지만 괜찮은 이름이네.
“진짜요?!”
율이 깜짝 놀란 듯 되물었다.
-빼어날 수(秀)에 옥돌 박(璞). 나쁘지 않은 이름이잖아.
“아니, 그 수박이 아닌 거 같은데요.”
-좋아. 그 이름으로 할게.
율의 반박에도 영물은 민호가 지어준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한 듯했다.
수박이는 입 주변에 수박 씨앗을 가득 묻힌 채, 씨익 웃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민호 도령.
***
그로부터 약 30분 정도가 더 지났을 무렵.
민호는 다시 공덕 상점에 복귀했다.
“미안,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괜찮아요.”
비단이 옅은 미소와 함께 민호를 반겼다.
예전에 비하면 확연히 부드러워진 태도였다.
“그럼 이제 느긋하게 한 번 둘러볼까.”
“네. 새로운 상품도 들어왔답니다.”
생긋 웃은 비단은 앞장서서 민호를 안내했다.
확실히 저번보다 다양한 상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다양하기만 할 뿐, 눈을 확 사로잡는 물건들은 마땅히 없었다.
“불면증 치료약에 머리를 말려주는 약? 탈모제는 또 뭐야?”
다양한 잡동사니들의 향연에 민호는 실망한 듯 중얼거렸다.
그러던 중 문득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곳이 있었다.
“어?”
민호의 걸음이 멈췄다.
이어 그는 비단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곳에 있는 건 뭐야?”
“어떤 거요?”
“저기 붉은색 깃발이 꽂힌 곳.”
민호가 손을 들어 가리키자, 비단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아, 기간 한정으로 50퍼센트 이상 세일하는 특별 품목들이에요.”
“그래? 그럼 저길 먼저 봐야겠네.”
세일이란 말에 민호의 눈이 반짝였다.
아쉽게도 세일 품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술병과 목걸이, 몇 가지 약이 전부였다. 하지만 민호는 실망하지 않고 하나하나 천천히 살펴봤다.
“오, 이건 좀 비싸 보이는데?”
그 중에서도 상단에 있는 술병 하나가 그의 이목을 자극했다. 새하얀 학 다섯 마리가 새겨진 술병은 마치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고풍스러움을 자랑했다.
이윽고 술병의 정보가 눈앞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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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품목) 면죄의 술
*품질: 중급
*마시면 악덕이 일부 지워진다.
*감소량: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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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을 지울 수 있다고?”
파격적인 능력에 민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전에 율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악덕은 일반적인 방법으론 지워지지 않으며, 정 지우고 싶다면 특별한 보물이 필요하다고. 아마 눈앞에 있는 [면죄의 술]이 바로 율이 말했던 그 보물이리라.
하지만 문제는 가격이었다.
=====
*판매가: 9,350(가이드 팁 10%포함)
*판매 종료까지 남은 시간: 12:0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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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켁! 뭐가 이렇게 비싸?”
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면죄의 술을 구매하기 위해선 9,000공덕 이상이 필요했던 탓이다.
“악덕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보물이니까요.”
비단의 말은 사실이었다.
세일을 하니까 이 정도였지, 정가로 구매하려면 무려 2만이 넘는 공덕이 필요했으니까.
“그보다 전달자님께 추천해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오, 뭔데?”
“이거에요.”
비단이 가리킨 것은 붉은색 가죽 목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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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품목) 견신(犬神)의 목걸이
*품질: 상급
*개가 쓰면 신체능력이 대폭 향상된다.
*주인의 공덕 획득률이 소폭 증가한다.
*효과: 모든 신체능력 +40%
*공덕 획득률: +10%
*판매가: 770(가이드 팁 10%포함)
*판매 종료까지 남은 시간: 00:5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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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걸이의 능력을 본 민호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건 그야말로 수박이한테 딱 어울리는 보물이었다.
“영물에게 선물하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미소를 띤 비단이 말을 보탰다.
그녀의 말대로 수박이가 착용하면 꽤나 쓸 만할 것 같은 보물이었다. 앞으로 임무를 하는데 있어 수박이가 어떤 도움이 될 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흐음.”
민호가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정가로 구매하려면 2천이 넘는 공덕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구매하면 민호가 가진 공덕으로도 충분히 구매가 가능했다.
“아 참, 세일은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50퍼센트가 넘는 할인율. 게다가 오늘이 마지막 세일.
이어진 비단의 말은 갈팡거리는 민호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결국 민호는 비단에게 넘어가버렸다.
“좋아, 이걸로 살게.”
“감사합니다.”
비단의 말과 함께 결제가 완료됐다.
그러나 민호의 쇼핑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 그리고 이거랑 저것도 같이 줘.”
그가 고른 것은 각각 매화와 물망초가 달린 머리장식.
이를 본 비단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괜찮으시겠어요? 그건 단지 향기만 나는 머리장식인데······.”
가끔 저런 상품이 있다.
이른바 상품 숫자만 채워놓는 잡동사니들.
공덕 상점을 찾는 신의 대리인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것들. 하지만 민호는 흔쾌히 머리장식 두 개를 구매했다.
“흐음, 어디보자.”
민호는 허공에 손을 뻗어 머리장식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그러고는 그 중 하나를 비단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매화 모양의 머리장식.
얼떨결에 이를 받아든 비단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이걸 왜 제게······?”
“그야 네게 주려고 산거니까.”
민호는 애써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수박이한테만 선물을 주기가 미안했던 탓이었다.
‘사실 더 좋은 걸로 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기엔 민호의 남은 공덕이 그리 많지 않았다.
또 지금 공덕상점에 있는 것들 중에서 이 두 개가 그나마 나았다. 다른 것들은 무좀을 치료하는 비약이나, 5분 동안 미세먼지를 사라지게 만드는 등, 선물로는 영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한편 머리장식을 받은 비단의 눈은 점점 커다랗게 변했다.
이를 본 민호는 멋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았거든.”
그 말에 비단은 일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그녀의 두 눈이 물기로 촉촉하게 젖었다. 이어 비단은 민호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소중히, 소중히 간직할게요.”
진심어린 감사 인사에 민호는 쑥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이내 비단에게 손을 뻗었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
“네!”
힘찬 목소리와 함께 비단은 환하게 웃었다.
선녀의 미소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미소였다.
***
달빛이 은은하게 내려앉은 밤.
주택가 사이로 누군가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흐흐응, 흐응~”
잔뜩 신이 난 목소리.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이는 다름 아닌 율이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몸을 빙그르르 돌리며 춤까지 췄다. 그러자 그녀의 머리에 꽂혀있던 파란 물망초 머리장식이 달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한편 그녀의 곁에 있던 민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끄응, 오늘은 안 나오려고 했는데······.”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
민호가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곧 자신의 곁에서 함께 걷는 수박이를 쳐다봤다. 견신의 목걸이를 착용한 수박이는 전보다 훨씬 활발한 움직임을 자랑했다.
“그나저나 할 일이 있다는 게 뭐야?”
민호가 밖에 나온 이유는 수박이 때문이었다.
오늘 안에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해서 일단 나오긴 했지만, 민호는 얼른 들어가고 싶은 눈치였다. 한편 민호와 눈을 마주친 수박이는 씨익 웃었다.
-이거야.
수박이가 한쪽 다리를 들었다.
개에게 있어선 익숙한 포즈.
민호는 설마 하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민호의 우려는 정확하게 적중했다.
쉬이이이-
노란 물줄기가 길가를 적셨다.
이를 보자마자 민호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야, 빨리 끊어! 여기서 함부로 싸면 안 돼!”
-진정해, 도령.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민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수박이가 볼일을 보고 있는 장소 때문이었다.
전봇대나 풀숲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거다.
하지만 수박이는 민호가 살고 있는 원룸텔 입구에다가 시원하게 쏘아내고 있었다.
-난 지금 표식을 새기고 있는 거라고.
“영역표시를 잘못 말한 거겠지.”
-그런 이유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결계야.
“결계?”
-응. 악귀와 잡귀를 내쫓는 신성한 결계.
“영 신빙성이 없어보는데······.”
민호가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수박이는 머쓱하게 웃었다.
-뭐, 사실 좀 급하기도 했고.
“역시 거짓말이었냐!”
-하지만 결계는 사실이야. 기록자도 알고 있을 걸?
수박이의 말과 함께 둘의 시선이 율에게로 향했다.
“율아, 얘 말이 사실이야?”
“네? 뭐가요?”
-이거 말이야.
수박이가 흥건해진 바닥을 가리켰다.
“아~ 맞아요. 영물의 분뇨는 귀신을 쫓는 효과가 있어요.”
-그럼, 그럼. 아마 잡귀는 냄새만 맡아도 도망갈걸?
뿌듯한 표정을 짓는 수박이를 뒤로 한 채.
민호는 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민호에게 물망초 머리 장식을 받은 이후부터 줄곧 텐션이 높았다. 콧노래를 부른다거나 춤을 추면서 스스로의 기분을 표현했다. 그 모습에 민호는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그렇게 좋아?”
“에헤헤, 그럼요! 선물은 처음 받아보거든요.”
율이 배시시 웃었다.
생각보다 훨씬 기뻐하는 모습.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빨리 줄 걸 그랬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민호는 다시 수박이를 돌아봤다.
“이제 들어가도 되지?”
-그렇긴 한데, 이왕 나온 김에 산책이나 한 바퀴······.
“피곤해. 다음에 하자.”
그 대답에 수박이의 꼬리가 시무룩하게 쳐졌다.
그러던 중, 돌연 민호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 Chapter 9. 동료 (3)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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