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8. 마인(魔人) (3) >
율과 영물은 멍하니 민호를 바라봤다.
그의 말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이다.
그 사이, 민호는 정환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더니 갑자기 발을 들어 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퍽!
“끄억!”
정환의 입을 비집고 비명이 터져나왔다.
연달아 이어진 무자비한 발길질.
퍼억! 퍽퍽퍽!
“컥! 제, 제발 그만! 커헉!”
정환은 몸을 웅크린 채 연신 고통스런 비명을 내질렀다.
그 광경을 본 율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안 돼요! 주인님! 폭력을 사용하면 악덕이······.”
“괜찮아. 적당히 팰 테니까.”
“그, 그런 문제가 아니라요!”
당황한 율이 민호를 말렸지만 그의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영물이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지?
영물의 목소리는 당황과 분노로 가득했다.
원래 저 자리는 민호의 것이 아니었다. 영물의 자리였어야만 했다.
난데없이 복수를 빼앗긴 영물은 이를 드러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민호는 발길질을 멈춘 뒤, 영물을 쳐다봤다.
“아깝지 않냐?”
-뭐가?
“너 공덕 엄청 쌓였잖아.”
-흥!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전혀 아깝지 않아.
영물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자 민호는 주변을 에워싼 개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 녀석들은? 네가 이 새끼를 공격하는 순간, 네 동족들도 함께 악덕을 쌓을 거다. 그래도 괜찮아?”
-이 녀석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이야. 나와는 상관없어.
“그래? 내가 알고 있는 거랑은 다른데.”
-뭐가 다르다는 거지?
영물이 묻자 민호는 율을 돌아봤다.
“율아.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된다고 했지?”
“악행을 저지르는 상황 자체를 함께 만든 죄로 악덕이 쌓여요.”
-거짓말하지 마!
율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영물이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하지만 율은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하늘에 맹세코 사실이에요. 이것도 엄연히 당신의 복수극에 동참한 셈이니까요.”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율의 모습.
이에 영물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저 녀석은 악마다!
그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놈은 지금까지 내 자식들을 수십도 넘게 죽였어. 그게 다가 아니다. 다른 동족도 저 악마에게 죽었다. 그런데 악인을 단죄하는 게 어째서 죄가 되는 건가!?
“악인을 심판할 수 있는 건 오직 천계뿐이에요.”
-그럼 내 자식들은, 죽어간 내 가족들의 원한은 누가 달래준다는 말이냐!?
영물이 분노와 비통함에 울부짖었다.
혼자 악덕을 쌓는 건 각오했다.
하지만 동족들이 악덕을 쌓는 건 안 된다. 아무리 그가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그들이 피해를 봐선 안 된다.
이건 오직 영물만의 복수였으니까.
이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영물은 분노했다.
“내가 해줄게.”
그러자 그때 가만히 있던 민호가 나섰다.
난데없는 그의 말에 율과 영물은 일제히 외쳤다.
“······네?”
-뭐라고?
정환에게 다가간 민호가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민호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리고 율이 미처 말릴 틈도 없이, 그의 주먹이 정환의 안면에 꽂혔다.
콰직!
“끄허억!”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숨이 넘어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주먹이 피로 물들었지만 민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퍽! 퍽! 퍼억! 퍽!
“끄흐! 아악! 그, 그만! 컥!”
점점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정환의 얼굴.
반면 민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제, 제발 살려, 살려······. 끄르륵!”
공포에 질린 눈으로 민호를 쳐다보던 정환은 곧 몸을 축 늘어뜨렸다.
고통을 이기지 못해 그만 정신을 놓아버린 듯했다.
하지만 민호는 기계적으로 다시 주먹을 들어올렸다.
이어 그의 얼굴을 강타하려던 찰나!
“안 돼요, 주인님!”
율이 다급히 민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있는 힘껏 팔을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악덕이 지나치게 쌓였어요. 이대로라면 주인님도 마인이 되어버릴지 몰라요!”
멈칫-
그 순간 민호의 주먹이 정환의 코앞에서 멈췄다.
그녀의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이 돌아왔다.
이어 민호의 눈앞에 보인 건 피투성이가 된 채 기절해있는 정환.
그리고 피로 물든 주먹이었다.
“······후우, 후우!”
거칠게 숨을 몰아쉰 민호의 눈빛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입술을 꽉 깨문 뒤 천천히 주먹을 거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흥분을 가라앉힌 민호는 영물에게 고개를 돌렸다.
“후우, 미안한데 이 정도로 참아주지 않을래?”
-······.
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영물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민호를 응시했다.
-······그대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잠시 후, 영물에게서 말이 흘러나왔다.
그 말에 민호는 뭘 그리 뻔한 걸 묻냐는 듯 답했다.
“넌 죄가 없잖아. 네 동족들도 마찬가지고.”
-그러는 그대는?
“난 이 녀석한테 원한이 있었어. 내가 아는 동생한테 폭력을 휘둘렀으니까.”
민호가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 거짓은 담겨있지 않았다.
-그게 이유의 전부야?
“다른 이유가 필요해?”
되묻는 민호의 모습에 영물은 기가 차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군.
영물이 푸흐흐 웃음을 터뜨렸다.
-한낱 개를 위해서 악덕을 쌓는 전달자가 세상에 어디 있어?
“그러니까 방금 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내 원한을 푼 것에 불과해. 딱히 널 위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너랑은 조금도 관계없어.”
민호는 뻔뻔한 얼굴로 영물의 말에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러고는 영물을 뒤로 한 채, 율에게 속삭였다.
“어때? 이러면 악덕은 나만 쌓이는 거지?”
“네. 그, 그치만 그럼 주인님이······.”
“괜찮아. 이 정도는 쌓여도 상관없어.”
민호가 상태창을 힐끗 쳐다봤다.
방금 전의 행동으로 무려 50의 악덕이 쌓였다.
정환을 반죽음 상태로 만든 대가였다.
하지만 민호는 스스로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정환은 단순히 기분이 더럽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폭행하고 죄 없는 생명까지 빼앗아간 악인이었으니까.
“오히려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민호가 차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영물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방금 전까진 악귀와도 같은 얼굴이었다면, 지금은 그보단 조금 나아진 표정이었다.
얼마 후, 영물의 입이 열렸다.
-먹어 치우려고 했다. 육편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하지만······.
영물은 고개를 들어 민호를 응시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검은색 눈동자.
-바보 때문에 김이 빠졌다.
그 속에서 더 이상 증오의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영물의 기세는 한결 수그러들었다.
-전달자.
민호에게 다가온 영물.
-그대의 이름을 들려줘.
평정을 되찾은 그의 목소리에 민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후, 민호가 스스로의 이름을 밝혔다.
“공민호.”
-그럼 민호 도령이라고 불러도 돼?
“마음대로 불러.”
민호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영물은 민호의 앞에 쪼그려 앉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민호 도령.
가만히 민호를 바라보던 영물이 돌연 고개를 숙였다.
-염치불구하고 부탁하지. 저 악마에게 마땅한 죗값을 치르게 해줘.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개들도 하나둘씩 머리를 숙였다. 영물은 복수를 포기하고 민호에게 정환의 처분을 맡긴 것이다.
이에 민호도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맡겨둬.”
-······고맙다.
진심이 우러나는 감사인사와 함께.
영물을 포함한 수십여 마리의 개들은 수풀 사이로 사라졌다.
이제 자리에 남은 것은 민호와 정환, 그리고 기절한 늑대뿐이었다.
털썩-
“후우, 겨우 끝났네. 끄흐으!”
자리에 주저앉은 민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고통이 찾아온 탓이었다.
“괘, 괜찮으세요?”
“······그럭저럭 버틸 만해.”
민호는 율의 부축을 받아 가까스로 다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모든 원흉인 정환을 매섭게 노려봤다.
이를 본 율은 황급히 민호의 앞을 막아섰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더 이상 때리면 안 돼요! 죽을지도 몰라요.”
“알아. 이제 안 때려.”
“저, 정말이죠?”
“그래.”
고개를 끄덕인 민호가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기적을 회수할 시간이다.
민호는 정환이 차고 있던 팔찌에 호리병의 주둥이를 가져다댔다.
슈우우우우-
팔찌에서 흘러나온 녹색 연기가 호리병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시 후, 연기가 모두 빠져나가자 팔찌는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기적을 성공적으로 회수한 민호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작성했다.
=임무 완료했습니다.
=죄송하지만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지금 제가 있는 곳이······.
진하에게 보내는 문자였다.
“······나머진 진하 형에게 맡기자.”
모든 용무를 마친 민호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공원의 어둠에 묻혀 서서히 몸을 감췄다.
***
그로부터 약 십여 분 뒤.
“저기! 저기에요!”
쓰러진 정환이 있는 곳으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다가왔다. 일행의 선두에는 외투를 걸친 아담한 체구의 여성이 있었다.
바로 소혜였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 있는 건 세 명의 경찰관.
현장에 거의 다 와가던 그때, 한 경찰이 돌연 눈을 가늘게 좁혔다.
“잠깐, 저게 뭐지?”
그의 말에 경찰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뭔가 커다란 개가 쓰려져 있었다.
“제가 한 번 가보겠습니다.”
그때 젊은 경찰이 조심스럽게 현장에 다가갔다.
잠시 후, 그는 소스라치게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느, 늑대입니다!”
“뭐? 늑대가 왜 여기에 있어?”
“그러니까 제가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때 소혜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콩콩 두드렸다.
“아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돼서······. 아무튼 모두 조심히 접근해!”
경찰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늑대는 상처투성이인 채 기절해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그때, 젊은 경찰의 눈에 또 다른 게 보였다.
“어? 선배님! 저곳에 사람이 쓰러져 있습니다.”
“사람?”
“혹시 신고자분이 말했던 남자 아닐까요?”
그의 말에 소혜는 순간적으로 어깨를 덜덜 떨었다.
당시의 공포가 떠올랐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소혜는 입술을 꽉 깨물며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정환을 본 소혜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맞아요. 그 사람이에요. 어? 그런데······.”
말을 잇던 소혜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사람이 맞긴 한데 얼굴이 아주 곤죽이 되어 있던 탓이었다.
“허! 누가 때렸는지는 몰라도 거의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네.”
선배 경찰이 혀를 낮게 찼다.
그 말처럼 정환의 상태는 심각했다.
“일단 구급차 불러. 그리고 여기 CCTV 조회해서 피의자 수배하고.”
“피의자 아니에요! 절 도와주신 분이에요.”
그때 소혜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부정했다.
그러자 선배 경찰은 귀찮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으며 대답했다.
“그건 나중에 서에서 확인할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절 도와줬다니까요. 절대 피의자 아니에요. 절대로요!”
소혜는 경찰을 졸졸 쫓아다니며 연신 그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렇게 한밤중에 일어났던 사건은 구급차가 도착하면서 막을 내렸다.
***
그날 새벽.
어두컴컴한 방 안으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화면에 띄워진 건 아기자기한 배경의 채팅방.
요즘 한창 유행하는 익명 채팅이었다.
타닥! 타다다닥-
쉴 새 없이 채팅을 하던 그때.
우측 하단에서 쪽지 아이콘이 반짝였다.
마우스 커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쪽지 아이콘을 클릭하자 곧 새로운 채팅창이 등장했다.
이윽고 나타난 것은 귀여운 곰 캐릭터를 프로필로 설정한 참여자.
잠시 후, 그가 대화를 시작했다.
[곰]: ‘테이머’의 포섭이 실패했다.
그 말에 키보드에 올려둔 이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펭귄]: 이유는?
[곰]: 능력을 잃은 것 같더군.
[펭귄]: 설마 토벌자가 나선 거야?
[곰]: 아니, 녀석은 아직 중국에 있다.
멈칫-
“······토벌자가 아니라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가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
[펭귄]: 그럼 누가 한 거야? 관찰자가 그랬을 리는 없고.
[곰]: 그래서 지금 알아보는 중이다.
[펭귄]: 내가 알아봐줄까?
[곰]: 필요없다. '오리'가 조사에 착수했으니까.
[곰]: 그러니까 경거망동하지 말고 대기해라.
[곰]: 보스의 지시가 내려올 때까지.
“쳇.”
[곰]의 말에 여성은 혀를 낮게 찼다.
그러고는 다시 키보드를 두드렸다.
[펭귄]: 뭐, 일단 알겠어.
[곰]: 다른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연락하지.
[펭귄]: 땡큐, 아저씨.
=1:1 비밀 채팅이 종료되었습니다.=
대화는 금세 끝났다.
그리고 모니터도 이내 빛을 잃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가 발가락으로 전원 버튼을 눌러버린 탓이었다.
“흐응, 토벌자가 아니면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의자에 등을 기댄 여성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영 궁금해서 안 되겠어. 한 번 알아봐야지.”
차가운 미소를 끝으로.
여성은 방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 Chapter 8. 마인(魔人) (3)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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