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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전해드립니다-21화 (21/182)

< Chapter 5. 가족 (2) >

“어머, 은호야.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주희가 말을 걸자 은호도 그녀에게 배꼽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도 잘 지내셨어요?”

“그럼. 얼마 전에 하와이에 다녀왔거든. 참, 그보다 엄마는 어디 계시니?”

“엄마는 집에 있어요.”

“정말? 그럼 혼자 나온 거야?”

“네.”

은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주희는 김이 샜다는 듯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그렇구나. 아, 노는 것도 좋지만 이제 곧 저녁인데 얼른 들어 가봐야지. 엄마가 걱정하실라.”

주희의 말이 끝나던 순간!

은호의 안색이 어둡게 물들었다. 하지만 주희는 이를 눈치 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아줌마가 입구까지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아니에요. 혼자 갈 수 있어요.”

“그래? 그럼 조심히 들어가렴. 다음에 보자.”

주희의 배웅과 함께 은호는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어냈다.

집으로 향하는 은호의 뒷모습은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우리도 따라가자.”

민호는 은호의 곁에 나란히 선 채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21층에 도착하자, 은호는 능숙하게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삐! 삐삐삐삐-

덜컹-

은호와 함께 민호도 덩달아 집 안에 들어왔다.

조용한 거실을 향해 은호는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에 은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현관문 옆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은호의 움츠러든 어깨에 민호는 괜히 가슴이 아팠다.

‘집에 아무도 없는 건가?’

민호가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봤다.

그때 율이 거실 너머에 있는 방을 가리켰다.

“앗! 저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요.”

율이 가리킨 곳은 안방이었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어떻게 하죠? 거기선 계속 안 받아준다는데.”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누군가와 전화를 하고 있는 여성이 보였다.

밝은 갈색 머리에 인공미(人工美)가 물씬 풍기는 얼굴을 가진 30대 중반의 여성.

민호는 눈을 가늘게 좁힌 채 그녀를 바라봤다.

=====

*이름: 백수연

*나이: -

*공덕: 86

*악덕: 307

*성향: -

=====

그녀가 바로 은호의 양모였다.

그리고 수연의 상태창을 본 민호는 순간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악덕 수치가······.’

어마어마했다. 지금껏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높았다.

그러던 중 민호는 문득 율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패륜이나 살인을 저지르면 악덕이 100정도 쌓인다고 했지.’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할 때, 100정도의 수치가 쌓인다.

그런데 수연의 악덕 수치는 무려 300이 넘는다. 만약 율에게 악덕이 누적된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수연을 연쇄살인마로 착각했을 거다.

그러던 중 그녀의 휴대폰 너머에서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기간도 아직 안 지났는데 왜 안 받겠다고 하는 거야?

“그러니까 말이에요.”

수화기 너머의 남성은 아마 은호의 양부(養父)인 듯했다.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아니잖아요? 툭 터놓고 얘기해서 걔는 우리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고. 이 정도면 납득하고 넘어가 줄만도 한데······.”

-맞아.

“에휴, 이래서 그런 근본 없는 곳에선 입양하는 게 아니었는데······.”

수연의 말에 민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민호의 존재를 알지 못하는 수연은 계속해서 양부와 대화를 주고받았다.

“당신은 뭐 좋은 생각 없어요?”

-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

“어떻게요?”

-일단 무작정 찾아가서 난리 좀 피우자고. 내가 덩치 큰 애들 몇 명 추려서 데려갈게. 그쪽에서도 동네 시끄러워지는 거 싫어할 거고, 그럼 받아주지 않겠어?

“나도 마음 같아선 그러고 싶지만 파양을 하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된대요.”

-이유라면 있지.

“어떤 거요?”

-걔 머리가 좀 나쁘잖아. 한글도 좀 늦게 깨우치고.

“종자가 그러니까 어쩔 수 없죠.”

-그러니까 거기선 우리한테 하자가 있는 애를 준 거지. 그걸 명분 삼으면 되지 않을까?

양부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호는 꽉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모욕적인 말에 순간적으로 화가 치솟은 탓이었다.

“에이, 그런 걸로 먹히겠어요?”

-그런가?

“그럼요. 그보다 이건 어때요?”

-어떤?

“당신 밑에 사람들 시켜서 외국으로 보내버리면 안 될까요? 왜 중국이나 그런 곳 있잖아요. 그리고 좀 뒤에 실종 신고를 하면······.”

거기까지가 민호가 가진 인내심의 한계였다.

콰앙-!

“꺅!”

거실에서 들려온 큰 소리에 수연은 짧은 비명을 질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의 양부가 다급히 물었다.

-뭐야? 왜 그래?

“모, 몰라요. 뭐가 떨어졌나?”

수연은 쭈뼛쭈뼛하게 거실로 나왔다. 변함이 없는 거실의 모습에 수연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위층에서 들린 소린가 봐요. 휴, 깜짝 놀랐네.”

그 말을 끝으로 수연은 다시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잠깐 나온 탓에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한 게 있었다. 누군가 주먹으로 후려친 것처럼 거실 벽 일부분이 살짝 훼손되어 있는 부분이었다.

한편 수연이 모습을 감추자 율은 황급히 민호에게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주인님! 흥분하면 도깨비감투의 능력이 사라져요.”

그녀의 말에 민호는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수연과 양부의 대화를 떠올리자 다시 분노가 치솟았다.

“······은호를 데리고 가자.”

민호가 씹어뱉듯 말했다.

처음엔 이딴 게 무슨 기적인가 싶었다.

은호와 양부모를 갈라놓으려는 천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직접 보러 왔다. 하지만 막상 현장을 보고나니, 천계의 선택은 매우 합리적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저런 쓰레기들한테 은호를 맡겨둘 수 없어.”

얼굴을 굳힌 민호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안방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으앙! 으아아앙!”

“어머, 우리 아들 깼나봐.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울음소리가 들리기가 무섭게 수연이 안방에서 나왔다.

잠시 후, 수연의 품에는 한 아기가 안겨있었다. 그녀는 칭얼거리는 아기를 따뜻하게 바라보며 연신 아기를 달랬다.

“착하지, 우리 주훈이. 엄마 왔어요. 우쭈쭈.”

아기를 바라보는 수연의 두 눈에는 사랑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은호가 집에 와도 대꾸조차 하지 않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

한편 민호는 우두커니 서서 그 장면을 바라봤다.

입을 살짝 벌린 채, 마치 뭔가에 홀린 것처럼.

잠시 후, 민호의 입을 비집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건 또 뭐야?”

그의 눈동자에 아기의 상태창이 비쳤다.

=====

*이름: 채주훈

*나이: -

*공덕: 0

*악덕: 999

*성향: -

=====

주훈의 악덕 수치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높았다.

“악덕이 999라니, 대체 전생에 뭔 짓을 한 거지?”

“네? 악덕 수치가 999라구요?”

율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응. 심지어 공덕은 하나도 안 쌓았네.”

이어진 민호의 말에 율은 순간적으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잠시 후, 그녀는 심각해진 표정과 함께 중얼거렸다.

“······그렇군요. 이제 알겠어요.”

“뭘?”

“이 집안은 징벌 대상이에요.”

“그게 뭔데?”

“현생에서 악덕을 너무 많이 쌓으면 징벌 대상으로 선정돼요. 그럼 천계에선 징벌 대상을 처벌하기 위해, 대상에게 불행이 끝없이 이어지는 불행의 씨앗을 내리죠.”

예전에 율이 말한 적 있었다.

악덕을 많이 쌓은 이들은 살아서는 끝없는 불행에 시달린다고.

“불행의 씨앗은 저마다 형태가 다양해요. 식물일 수도 있고, 동물일 수도 있죠. 물건일 수도 있고 음식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율이 말을 흐렸다.

그러고는 수연의 품에 안긴 주훈을 바라봤다.

“갓 태어난 아기일 수도 있죠.”

“그럼 설마 저 아기가······.”

“네, 제가 알기로 그런 수치를 가진 건 불행의 씨앗이 유일해요.”

율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이 집안은 끔찍한 불행을 맛보게 될 거예요. 그리고 이 집안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게도 크고 작은 불행이 찾아올 테죠.”

“······천계에서 왜 이런 기적을 줬는지, 이제야 알겠네.”

민호가 쓰게 웃었다.

천계에서 결정한 기적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쓰레기 같은 양부모와 인연을 끊는 것도 모자라, 예정된 불행에서 빼내주기도 하니까.

“그럼 바로 끊어버리자.”

민호의 얼굴에 남아있는 마지막 망설임이 사라졌다.

그러자 율이 돌연 민호의 앞을 막아섰다.

“주인님, 도깨비감투를 쓴 상태에선 기적을 사용할 수 없어요.”

“뭐?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나중에 접근해야죠. 또 지금은 상황이 안 좋아요.”

율이 수연과 주훈을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여기서 인연을 끊어버리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아······.”

민호는 뒤늦게 깨달은 듯 신음을 흘렸다.

여기서 인연을 끊는다면 은호와 양부모는 서로가 서로를 몰라보게 될 터다. 그럼 필시 귀찮은 일이 벌어지리라.

“하지만 은호를 이런 곳에 놔두기에는······.”

“걱정 마세요. 조만간 기회가 올 테니까요.”

율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민호를 달랬다.

그리고 율이 말했던 것처럼.

기회는 의외로 금방 찾아왔다.

< Chapter 5. 가족 (2)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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