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hapter 1. 신의 선택을 받다 (4) >
율의 말에 ‘어떻게?’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올 무렵.
문득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설마······.”
민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러자 율의 밝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냐면 저 분은 리스트에 올라와 있거든요.”
리스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지 않았지만, 민호는 그것이 무엇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동석 삼촌이 기적을 받을 수 있는 거야?”
그 질문에 율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을 대신했다.
이에 민호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동석 삼촌이······.”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는 동석을 바라보며.
민호는 말없이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
회식은 평소보다 일찍 끝났다.
동석이 노모를 혼자 오래 둘 수 없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민호는 비교적 멀쩡한 상태로 집에 돌아왔다.
끼이익-
문을 열고 신발을 벗던 중, 돌연 율이 쪼르르 날아 방의 불을 켰다. 그러고는 민호를 마주보며 밝게 웃었다.
“주인님, 다녀오셨어요?”
그 뻔뻔한 모습에 민호는 피식 웃었다.
“꼭 집 지킨 것처럼 말한다?”
“헤헤, 그래도 누가 맞이해주면 좋잖아요.”
그도 그랬다.
아무도 없는 빈 방보다는 누군가 맞이해주는 편이 좋았으니까.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민호는 율을 불렀다.
“율아.”
“네?”
“계약서 줘봐.”
“네, 여기요!”
율은 행여나 민호의 생각이 바뀔 새라 냉큼 계약서를 내밀었다.
“잠깐 살펴볼게.”
“얼마든지 살펴보세요.”
민호의 시선이 계약서로 향했다.
“음, 의외로 심플하네.”
계약서의 내용은 별 게 없었다.
일단 계약 기간은 1년. 기간이 지나면 재계약을 하거나 해지할 수 있다.
다음으로 계약자인 전달자가 해야 할 일은 불규칙적으로 임무를 받고, 해당 임무를 수행하는 게 계약 조건의 전부였다.
그리고 하나, 특이한 게 있었다.
“계약 체결 시, 기존의 공덕과 악덕은 봉인된다? 이게 무슨 소리야?”
“주인님이 여태껏 쌓아온 공덕과 악덕이 일시적으로 봉인된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추후 전달자 역할을 끝마치면, 그간 쌓은 공덕과 악덕을 비율에 맞게 계산해서 합산되죠.”
율의 말에 따르면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쌓인 공덕은, 평범한 이들이 쌓는 공덕과 다소 다른 종류라고 했다.
그래서 둘이 뒤섞이지 않도록 기존에 쌓은 공덕과 악덕을 모두 봉인한다는 소리였다.
그 말에 민호는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계약서를 살펴봤다.
하지만 그것 말고는 특별한 게 없었다.
대신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런데 여기 뭐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
“어떤 거요?”
율이 고개를 배꼼 내밀었다.
“임무를 성공하면 보상이 주어지잖아?”
“그렇죠.”
“그럼 실패하면 어떻게 돼?”
“공덕을 쌓을 수 없어요.”
심플한 대답에 민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다야?”
“그게 다에요.”
“악덕은 안 쌓이는 거고?”
“일부러 실패로 이끈 것만 아니면 안 쌓여요.”
간단명료한 대답이었다.
율의 대답에 마지막 남은 찜찜함도 사라졌다.
이후 계약서를 서너 차례 더 검토한 민호는 곧 마음을 굳혔다.
“여기다 사인하면 되는 거지?”
“네! 이 펜을 쓰시면 돼요.”
율이 파란색 펜을 내밀었다.
펜을 받아든 민호는 마지막으로 계약서를 훑어봤다. 딱히 문제가 되는 조항은 발견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노인으로 분장을 하고 대상에게 기적을 전달하는 게 전부인 일. 게다가 보상을 돈으로 받을 수도 있다. 부업으로 하기 좋아보였다.
또 동석을 도울 수 있다는 점도 결정을 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였다.
“아, 이건 계약서랑은 별개의 질문인데······.”
사인을 하려던 찰나!
민호는 문득 떠오른 의문을 꺼냈다.
“내가 계약서에 사인해서 전달자가 되면 넌 어떤 이득을 보는 거야?”
율은 이상할 정도로 계약에 집착했다.
마치 계약을 따내야만 하는 영업사원처럼.
이를 의아하게 느낀 민호가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율의 얼굴에 일순간 당혹스러운 감정이 맺혔다.
“그, 그건······.”
말을 흐리던 율이 고개를 푹 숙였다.
이를 지켜보던 민호는 다시 계약서로 시선을 돌렸다.
“곤란한 대답이면 말하지 않아도 돼.”
“아니에요! 곤란한 건 아닌데······.”
말을 흐린 율이 치맛자락을 꼬옥 움켜잡았다.
잠시 후,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소리쳤다.
“······주인님께서 임무를 완료할 경우, 공덕의 일부를 나눠받아요.”
“공덕? 얼마나 받는데?”
“10퍼센트 정도요.”
“그게 다야?”
“네? 아, 네.”
“그럼 됐다.”
민호가 피식 웃었다.
좀 더 거창한 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답잖은 대가였다. 또 지금 민호에게 있어 중요한 건, 임무 완료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물직적인 이익이지, 공덕이 아니었다.
율은 자신의 고백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민호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봤다. 한편 의문이 해소된 민호는 곧장 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계약서의 크기가 잘 안 보일 정도로 작게 줄어든 것. 계약서는 율이 가지고 있던 봇짐 속으로 쏙 들어갔다. 그와 함께 율이 테이블 위에 다소곳하게 앉았다.
“주인님.”
민호를 똑바로 쳐다본 천율.
그녀는 민호에게 큰 절을 올렸다.
“다시 한 번 인사드릴게요. 저는 천율. 주인님이 전달자의 역할을 수행하시는 동안, 주인님을 보조하는 도우미이자, 모든 것을 기록하는 임무를 맡은 기록자에요. 지금처럼 율이라고 불러주세요.”
율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그럼 전달자가 된 걸 축하드려요, 주인님.”
그녀의 인사에 민호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달자가 됐다고는 해도 막상 뭐가 변한 건지 잘 느껴지지 않았던 탓이다.
“이게 끝이야?”
“네! 이제 스타터에게 지급되는 특별 보상을 선택할 수 있어요.”
“아, 맞아. 그런 것도 있었지.”
신의 권능, 초능력.
돈으로 바꿀 수 없다는 말에 잠시 잊고 있었다.
율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보상은 고르실 수도 있고, 뽑으실 수도 있어요. 어떤 걸 선택하시겠어요?”
“뭘 고를 수 있는데?”
“잠깐만요. 여기 어디다가 뒀는데······. 아 찾았다!”
봇짐을 뒤적이던 율이 민호에게 낡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고르시면 돼요.”
율의 외침과 함께 민호는 책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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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기가 깃든 행운부(幸運符)
*등급: 정(丁)
*몸에 지닌 것만으로 행운이 대폭 증가한다.
*행운 상승률: +50%
2) 무신(武神)의 격려
*등급: 정(丁)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주는 신의 축복.
*모든 신체 능력: +30%
*최대 수명 증가: +15%
3) 해태의 고환
*등급: 정(丁)
*정력이 대폭 상승한다.
*정력 상승률: +99%
4) 강철두(鋼鐵頭)
*등급: 정(丁)
*평생 탈모에 걸리지 않는다.
*탈모 면역력: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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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천외한 능력으로 가득한 책.
하지만 민호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으음, 막상 고르려고 하니 썩 땡기는 게······.”
말을 흐린 민호가 페이지를 연신 넘겼다.
그런데 그때!
“어?”
민호의 시선을 잡아끄는 능력이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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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전귀(錢鬼)
*등급: 병(丙)
*돈에 미친 귀신을 부릴 수 있다.
*단, 과도하게 사용하면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으니 주의할 것.
*금전 획득운: +40%
*금전 수익률: +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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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돈에 관련된 초능력.
민호는 기대감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율아. 여기 수익률이라는 건 뭐야?”
“말 그대로 주인님이 얻은 돈이 해당 비율만큼 늘어나는 거예요.”
그 대답에 민호의 두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 그럼 내가 만원을 얻으면······.”
“5만원이 손에 들어오는 거죠.”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금방 큰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가장 현실적인 능력.
늘 돈 타령을 하는 민호에게 아주 어울리는 능력이었다.
“좋아, 이걸로 할게!”
민호는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그런데 그때 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앗! 죄송해요. 이 말을 드리는 걸 깜박했어요······.”
“뭔데?”
“주인님께서 고르실 수 있는 건 1번부터 10번까지의 능력이에요.”
“뭐? 그럼 이건 뭐야?”
“그건 뽑기 리스트에요.”
“뽑기 리스트?”
“능력을 선택하지 않고 신께 선택을 맡기면, 11번부터 999번의 능력 중에서 하나가 주인님께 부여돼요.”
“그 말은······.”
민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전귀(錢鬼)를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다는 소리죠.”
“젠장, 좋다 말았네.”
설렜던 가슴이 차갑게 식었다.
한숨을 내쉰 민호는 1번부터 10번까지의 능력을 쳐다봤다.
대부분 고만고만한 능력들.
“그나마 끌리는 건 행운부 정도네.”
행운이 높으면 금전운도 함께 상승한다는 뜻일 테니까.
하지만 전귀라는 능력을 먼저 봐서 그런 건지, 확 끌리진 않았다. 책을 붙들고 한참을 고민하던 민호는 이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라 모르겠다. 뽑기 해보자!”
민호의 외침에 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그래.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뽑아.”
“네, 알겠어요.”
몸을 돌린 율은 봇짐에서 뭔가를 꺼냈다.
지우개 정도의 크기를 가진 자그마한 상자.
“그럼 이제 뽑을게요!”
율의 손이 상자 안으로 쑥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며 민호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제발 전귀나 비슷한 걸로 나오길······.”
최대한 돈과 관련된 능력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리고 율이 손을 거두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이 일순간 방 안을 가득 메웠다.
파아아앗-!
“윽!”
민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민호의 오른손에 문양 하나가 새겨졌다.
“이건······.”
푸른색으로 적힌 ‘吸’이라는 한자.
문양은 몇 차례 반짝이더니 이내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펼쳐졌다.
그곳에는 민호가 얻은 능력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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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9) 흡수(吸收)
*등급: 갑(甲)
*임무를 완수한 뒤, 기적을 일부 흡수한다.
*흡수율: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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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이를 본 민호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게 뭐야?”
< Chapter 1. 신의 선택을 받다 (4)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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