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어느 추운 겨울.
새하얀 눈이 쌓인 거리에 힘없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이십대 초반의 한 여성.
민희는 머리에 소복이 쌓인 눈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길을 걸었다.
“후우.”
그러던 중 나직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잠시 후, 고개를 든 민희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흐릿하게 보이는 밤하늘. 멍하니 이를 보고 있노라니 그녀의 뇌리로 어떤 목소리가 스쳤다. 방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의사의 목소리였다.
‘너무 늦게 오셨습니다. 현재로썬 도무지 손쓸 방도가······.’
무미건조한 의사의 음성이 비수처럼 가슴에 박혔다.
점점 시력을 잃어갈 거라는 말. 곧 실명이 될 거라는 말. 더 이상 이 세상을 볼 수 없다는 말. 모두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하, 하하.”
메마른 웃음이 나왔다.
민희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오래 이 풍경을 눈에 담아두려는 것처럼.
“······이제야 좀 제대로 살아보나 싶었는데.”
민희의 입술을 비집고 억눌린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내가 없으면 우리 엄마는, 우리 엄마 혼자 어떻게 놔두라고······!”
말을 잇던 민희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서 작은 이슬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멍하니 서서 한참을 흐느끼던 중, 돌연 민희의 귓가로 작은 기침소리가 들려왔다.
“쿨럭, 쿨럭!”
금방이라도 꺼질 것만 같은 촛불처럼.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기침소리에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쿨럭! 껌 좀 사시구려. 여기 껌 하나만······.”
기침소리의 주인은 한 노인.
허름한 행색의 그는 전봇대 아래에서 껌을 팔고 있었다. 민희가 그 광경을 지켜보던 그때, 거리를 지나는 한 남녀가 노인을 바라봤다.
“오빠, 우리 껌 하나 사자.”
“무슨 껌을 사. 너 껌 좋아하지도 않잖아?”
“그래도 불쌍하잖아.”
“뭐가 불쌍해? 저거 다 가짜야. 앵벌이 몰라?”
“앵벌이? 진짜?”
“그래, 저게 뭐냐면······.”
노인에게 잠깐 시선을 주었던 남녀는 다시 걸음을 옮겨 제 갈 길을 갔다. 다만 민희는 우두커니 선 채로 노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폐를 쥐어짜내는 듯한 기침소리.
엄동설한의 날씨 탓에 창백하게 질린 얼굴.
불편해 보이는 두 다리.
노인의 모습에서 민희는 문득 그녀의 엄마를 떠올렸다.
그 짧은 상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할아버지.”
민희는 어느새 노인의 앞에 다가가 있었다.
“이 껌 얼마에요?”
“어어? 하, 하나에 2천원일세.”
껌 한 통 치고는 비싼 가격이다.
하지만 민희는 말없이 외투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녀의 손에 꼬깃거리는 만 원짜리 한 장이 잡혔다.
“그럼 다섯 개 주세요.”
“쿨럭! 고맙네, 고마워.”
노인은 행여나 민희의 마음이 바뀔 새라 바닥에 늘여놓은 껌 다섯 통을 모두 담았다. 그리고 민희가 자리를 떠나려는 찰나, 그녀에게 사탕 하나를 건넸다.
“이거 서비스야. 가면서 먹게나.”
“네? 아, 네. 추운데 얼른 들어가세요.”
얼떨결에 사탕을 받아든 민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민희는 후회했다.
노인에게 베푼 만원은 그녀가 당장 주말을 버틸 식비였으니까.
“후우, 이번 주도 물로 때워야겠네.”
민희가 가만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시선이 서비스로 받았던 사탕으로 가 닿았다.
아몬드가 박힌 네모난 사탕.
그 사탕은 공교롭게도 민희가 가장 좋아하는 사탕이었다.
바스락-
민희는 그대로 캔디를 입에 넣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맛이 금세 입 안을 가득 메웠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현실이 사탕의 달콤함에 뒤덮여 잠시나마 모습을 감췄다.
그 기분 좋은 맛에 민희는 두 눈을 감은 채, 옅게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떴을 때.
“······어?”
민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가만히 거리를 바라보던 그녀는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거리를 보았다.
눈부신 도시의 불빛과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바닥에 소복하게 쌓인 흰 눈이 보였다.
새카만 밤하늘과 구름 틈새로 반짝이는 밝은 별빛이 보였다.
아주 또렷하게.
“어, 어어어?”
몇 번이고 눈을 깜박였지만 세상이 변한 게 아니었다.
변한 것은 그녀의 시력뿐.
한참 만에 이를 자각한 민희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탓이었다.
“흑! 흐윽······!”
그렇게 멍하니 세상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고개를 숙여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까 전과는 다른, 기쁨과 감격으로 가득 찬 울음이었다.
***
눈으로 뒤덮인 차디찬 거리.
작은 온기가 머물고 있던 어느 전봇대 아래.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낡은 가방을 들쳐 매고 으슥한 골목으로 향했다. 주변의 인적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노인은 담벼락에 등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후우, 다리 아파 죽는 줄 알았네!”
“수고하셨어요, 주인님.”
그때 노인의 어깨에서 자그마한 생물이 불쑥 나타났다.
소녀는 특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한복처럼 보이는 옷차림에 등에는 작은 봇짐을 메고 있는 모습.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바로 소녀의 크기가 종이컵처럼 작다는 것이었다.
소녀의 등장에 대충 고개를 끄덕인 노인은 돌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관찰자가 정보만 제대로 줬어도 이 고생까진 안 하는 건데.”
“뭐, 신입이니까 어쩔 수 없죠.”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벌써 일주일 째 이 모양이면 어쩌자는 거야?”
노인의 말과 함께.
돌연 그의 귓가로 무미건조한 여성의 음성이 들렸다.
[임무를 완료했습니다.]
그 말에 노인은 씨익 웃었다.
“좋아, 임무 완료다.”
동시에 그는 턱에 붙은 수염을 쭈욱 떼어냈다. 그러자 노인의 얼굴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주름진 피부는 다리미로 다린 것처럼 펴졌고 머리와 눈썹은 검게 물들었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것은 허름한 행색의 노인이 아닌, 허름한 행색의 청년이었다.
그때 청년의 어깨에 앉아있던 종이컵만한 소녀가 입을 열었다.
“기뻐하긴 일러요. 하나가 더 남았거든요.”
“아, 맞아. 오늘 임무는 두 개였지.”
청년은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휴, 빨리 해치우고 집에 가자. 다음 기적(奇跡)은 뭐였지?”
“글 쓰는 속도가 너무 느려서 스트레스를 받는 무명의 작가에게 일일 한정, 한 시간을 세 시간으로 늘려주는 마법의 노트북이요.”
“거참 묘하게 쓸모 있을 거 같으면서도 없을 거 같은 기적이네. 뭐, 좋아. 일단 가자.”
피식 웃은 청년이 턱에 수염을 붙였다.
잠시 후, 노인으로 변한 청년은 뒷골목을 빠져나와 거리로 향했다.
그러고는 곧 수많은 인파 속에 휩쓸려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 프롤로그 > 끝
ⓒ 남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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