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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7화 (24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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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불결한 것들부터 좀 치워볼까. 역시 이 세상은 나 혼자 쓰기엔 너무 크단 말이지. 나의 피조물들이 살아있었으면 일손을 좀 덜었을텐데 말이야. -

검은 재앙은 미물들의 시체가 꼴보기 싫은듯 꼬리를 몸의 오른쪽까지 당긴 후 왼쪽 끝까지 후려쳤고 그 꼬리는 지상을 휩쓸고 지나가 부딪치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만 구가 넘는 시체가 한 번에 사라졌다. 세마수트라가 지휘하는 사자의 군대는 멈추지 않았으나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앞발로 후려치고 뒷발로 걷어차길 몇 번 반복하자 또 다시 만 구가 사라졌다.

- 너무 쓰레기가 많구나. 좀 태워야겠다. -

검은 재앙은 머리를 뒤로 당기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소용돌이가 일어나 일대의 모든 공기가 검은 존재의 아가리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근방에 있던 수 백구의 시체들도 검은 존재의 아가리 속으로 빨려 들어갔고 피어오르던 화염에 전소되었다. 검은 재앙의 목구멍에선 용암이 들끓는 소리가 울렸고 일대의 모든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 당분간은 부지런해져야겠다. 일단 이 썩은 것들부터 치운 후에 나머지 군집들을 모조리 불살라야겠군. -

검은 재앙의 선포를 누구도 허황되다고 여기지 않았다. 저 존재에겐 능히 그럴 힘과 의지가 있다. 감히 필멸자가 맞설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삶을 포기한 채 죽음을 기다리거나 살아남을 가능성을 쫓아 달아날 뿐이다.

그렇지만 단 두 명의 생명만은 반격을 준비했다.

“에쿠잘루스! 우린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야. 이번에도 우리 둘만의 여정을 떠나자고.”

늙은 백마는 발굽을 높이 들어올리며 몸을 비틀었다. 달리 돌아서서 도망치려는 의도였다. 아르투르는 그를 강제로 붙잡아 세우는 대신 귀엣말을 속삭였다. 엘라카르시스의 정수를 전해받은 후 아르투르는 어떤 생명체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멈춰봐.”

에쿠잘루스가 멈추자 아르투르는 그의 등에서 내려 차고 있던 모든 장비를 풀어주었다. 안장도, 등자도, 마갑도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친구야. 잘 생각해봐. 어차피 너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혼자서 쓸쓸하게 골골거리다 죽느니 평생을 함께 해온 벗과 함께 하는 게 전장터에서 살아온 네게 어울리지 않겠어? 친구야. 평생 너는 나를 태우고 달려주었지. 이번 한번만 더 달려줄 수 있겠니?”

에쿠잘루스는 이 강인하고 지혜로워서 모자란 인간만큼은 똑똑했기에 숙고라는 걸 할 줄 알았다. 결국 그는 결정을 내렸다.

푸히히힝 -!

‘네 말이 맞다. 친우여!’

히히히힝-!

‘사나이가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는가! 가자!’

에쿠잘루스는 일생동안 처음으로 등을 낮추어서 아르투르가 타기 편하게 만들어주었다. 이제 두 사람은 검은 재앙을 향해 질주했다. 깨달은 에쿠잘루스는 모든 힘을 다해 달렸다. 평생을 아르투르와 함께 해온 군마의 말굽은 크게 닳아있었고 경주마로선 진작에 수명이 끝난 상태였지만 지금만큼은 전성기의 속력을 되찾았다. 이것이 생애 최후의 질주였다. 몸이 상하더라도, 체력이 모두 소진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래야 내 친구답지! 가자! 친구야!”

심장과 근육을 혹사시키며 내달렸다. 평생을 함께 해온 두 전우가 최고의 속력으로 검은 화산을 향해 돌격했다. 아르투르는 깨달았다. 이곳이 자신의 모험이 시작된 곳.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던 곳. 그는 스무 살의 청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모험심으로 들떴다.

힝힝?

‘이길 수 있는가?’

“아니. 못 이긴다.”

이히히히히힝 - !?

‘너는 살날이 남았는데 왜 죽으러 가는가? 미쳤나?!’

기사왕은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나는 기사야. 몸을 움직일 수 있으니 맹세를 지키러 갈 뿐이야.”

에히히히히히힝 - !

‘멋지다! 나의 친우여! 죽음은 또 하나의 여정일 뿐이지! 달리자! 형제여!’

아르투르는 빛나는 성검을 내밀며 힘차게 소리쳤다.

“돌격하자! 형제여!”

히히히히히히히힝 -!

아르투르는 자신의 삶을 옭아매던 모든 굴레를 잊어버렸다. 왕의 의무도, 아버지의 책임도, 친구나 연인들에 대한 것도 내던졌다. 자신이 평생을 추구해온 명예에 대한 욕심도 버렸다.

나는 기사다.

기사는 맹세를 지킨다.

검은 재앙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를 보며 동정심을 느꼈다. 이루지 못하는 꿈을 꾸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울 것인가.

아가리의 방향이 돌아갔다.

태초의 불길이 한 쌍의 인마를 향해 들이닥친다.

***

여태껏 질서를 유지하던 모든 문명인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를 믿었다. 자신들의 왕들을 이끄는 기사왕을 믿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왕들이 가득 모였으니 무언가 해줄 거라는 믿음.

전설적인 기사왕이라면 우리의 세상을 지켜내 주리라는 믿음.

신들이 내린 종말의 맞설 우리는 모르는 방법이 있을 거라는 믿음.

하지만 검은 재앙이 강림한 순간 모두는 끝이 도래한 것을 깨달았다. 그나마 질서가 유지되던 건 희망에 대한 실낱같은 믿음이었다. 이제는 모두가 알았다. 희망은 없었다. 왕들이 그들을 속인 것이다. 기사왕이 우리를 속인 거야!

“으아아아악! 세상이 끝났다!”

사람들은 절규하며 미쳐 날뛰었다. 모든 이들은 품어왔던 희망을 저버리며 스스로 무너졌다.

모든 사람들이 기사왕에게 저버렸던 기대를 포기할 때.

개인 예배당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소녀는 검은 재앙이 나타난 뒤에도 기사왕을 위한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여전히 기사왕이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을 믿었고 그러니 누군가 그에게 축복을 내려주길 바랬다.

그녀는 이제 한 영지의 군주였지만 기사왕 앞에서는 늘 한 명의 소녀이길 바랬다. 어린 시절의 구원은 그에게서 왔었으니까.

천상은 믿음이 없다면 지상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간절한 기도는 산 자들의 세계와 천상을 잇는 통로가 되어줄 수 있다.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가 기도에 응해 통로를 통해 기적을 일으켰다. 살아있는 모든 인간들의 심상에 기사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분출 직전의 화산을 향해 성검을 내밀고 돌격하는 기사의 모습은 모두에게 실소를 불러일으키는 우스꽝스런 행동이었다. 하지만 이런 우스꽝스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용기는 우스꽝스럽지 않다.

기사왕의 행보에 구원을 받아온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마음과 마음은 서로를 잇고 희망의 전염병이 번져나갔다.

엘베르 마을의 사람들과 알튼 가문의 사람들이 백인을 벤 기사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망나니 귀족에게 살해당할 뻔했던 극단의 배우들과 카밀의 누이가 가장 낮은 자를 위해 싸운 기사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마스터 대장장이와 그의 가족. 그리고 적선을 받아 삶을 바꾼 한 남매가 지나가던 방랑기사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두라노 인들은 국가의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신사적인 대우를 받고 풀려났던 포로들이 빚을 갚기 위해 기사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엘라카르시스 왕가의 사람들이 가주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기사왕의 태평성대를 누린 레무리아 왕국의 사람들이 국왕 폐하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서부 대륙의 평화를 바라던 사람들이 아르투르 대왕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노예의 사슬에서 풀려난 모든 사람들이 해방자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모든 투사들이 자신들의 이상을 구현하고 있는 사내와 함께하기 위한 돌격을 시작했다.

- 자신들을 위하여 최후까지 싸워주는 것에 고마움을 느낀 모든 인간들이 수호자를 위한 기도를 올렸다.

모든 이들의 간절한 기도가 모여 어둠을 내몰고 하늘을 열었다. 밤이 사라진 가득 펼쳐진 맑은 하늘에서 태양이 떠오르고 천상의 빛이 모여들었다.

그 순간 태초의 불길이. 절대로 길들일 수 없는 꺼지지 않는 원시의 분노가 아르투르와 신의 있는 군마를 휩쓸고 지나갔으며 그들은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그러나 기사왕의 돌격은 멈추지 않았다.

- 무슨 짓이냐?! 배신자 왕이여! 어떻게?! -

검은 재앙은 이를 갈았으나, 빛의 신이 자신의 힘을 온전히 지상으로 전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만인의 기도는 천상과 지상의 경계를 일시적으로 허물어뜨렸다. 황금의 성검은 최고신의 힘을 한 점도 흘리지 않고 담아내었으며 그 힘은 고스란히 아르투르에게 전달되었다. 암흑의 불꽃은 기사왕과 군마가 태어났던 육신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애버렸으나 천상의 힘이 그들을 고스란히 부활시켰다. 이제 기사왕과 그의 군마는 천상의 선봉장이 되었다.

- 내 정수가 담긴 성검은 종말의 시간에 만인의 기도를 담아낼 수 있는 수단으로 남겨둔 것이다. 즉 온전히 너를 치기 위해 남겨둔 것이지. 하지만 나도 승리를 의심하기는 했다. 나의 힘을 받았던 인간들은 결국 자신들의 욕망만을 쫓았을 뿐. 타인의 기도를 담아낼 수 있는 존재가 된 적이 없었으니까. -

아르투르와 에쿠잘루스는 전성기의 모습으로 돌아갔으며 그들의 머리에선 황금빛 후광이 번득였다. 황금의 성검은 수십 미터에 이르는 빛의 창으로 변했으며 에쿠잘루스의 등에선 백색 날개가 솟아났다. 군마가 펄쩍 뛰어오르자 그들은 문자 그대로의 바람과 같은 속도로 날아올랐다.

- 하지만 결국 인간들 가운데 해낸 자가 나왔구나. 종말의 선고자여. 이것이 네가 멸시하던 종족들의 저력이다. 이제 그대도 스스로의 종말을 납득할 때가 되었다. 우리들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인간들의 시대가 시작되리니. -

- 배신자! 반역자! 네 동족을 저버리고 피조물을 선택한 자여! 내가 그리 쉽사리 죽어줄 줄 아느냐! 네가 그토록 아끼는 이 미물들을 모조리 불태우겠다! 그것이 합당한 결말이다! -

안칼라타르는 순식간에 날개를 펼쳐 드높은 창공으로 올라갔다. 엄청난 거체가 한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놀라운 속도였으나 에쿠잘루스는 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날아올라 먼저 태양을 등지고 서서 맹공을 가했다. 이제 흑룡은 종언을 고하는 신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는 생물의 입장이 되었다.

거대한 흑룡은 날개와 발톱, 이빨을 이용해 아르투르를 부숴버리고 했으나 아르투르는 오히려 작은 덩치를 이용해 창으로 찌르고 빠지며 상처를 누적시켰다. 안칼라타르의 몸 곳곳이 창으로 꿰뚫렸다. 흑룡은 크게 흥분하여 거센 맹공을 가했으나 평정심을 잃은 공격은 저렇게 작은 대상을 맞출 수 없었다. 필멸자들을 짓뭉개고자 가장 거대한 모습으로 강림한 점이 오히려 해악이 된 것이었다.

지상의 모든 생명들은 저 높은 하늘에서 번득이는 불꽃과 천상의 빛을 보며 자신들의 기도가 응답받은 것에 목 놓아 울며 환호했다.

- 안돼! 동족의 부활을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데 고작 인간 따위에게 실패한단 말이냐! -

- 당신이 잠들어있는 동안 세상은 크게 변했소. 당신의 시간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마지막 용이여. -

흑룡은 거대한 바람을 일으켜 아르투르를 몰아내면서 자신의 힘을 다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지상을 향해 암흑의 불길을 쏟아 부어 모조리 불태울 생각이었다. 물론 아르투르는 안칼라타라의 암흑의 불길을 막기 위해 정면으로 돌격해 들어갔다. 종말의 용은 세상을 불태울 수 있을 지독하고 강력한 불길을 내뿜었다.

그럼에도, 기사왕은 그저 정면만을 바라보며 빛의 창을 내세웠다. 에쿠잘루스의 발굽이 공기를 밟으며 더욱 빨라졌다. 빛의 창이 지옥의 불길보다 뜨거운 암흑의 불길을 정면으로 가로질렀다.

“영광스러운 승리를!”

빛의 기사는 불길의 파도를 거슬러 올라 흑룡의 가슴을 향해 돌격했다. 모든 이의 염원이 한 자루의 창을 향해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간절히 기도했다. 하늘이여! 열려라!

그들의 갈망이 담긴 창날은 흑룡의 심장을 꿰뚫었다. 안칼라타르의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거대한 흑체가 드넓은 바다를 향해 떨어져 내린다. 삶을 갈구하던 용은 하늘을 향해 손을 내뻗었지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다가오는 것은 심연 뿐이었다.

활짝 열린 천상의 문에서 계단이 나타나고 물기에 젖은 백색의 여신이 계단을 딛고 내려왔다. 생명의 여신은 추락하는 종말의 신에게 짧은 전언을 보냈다.

- 안칼라타르. -

답신이 왔다.

- 엘라카르시스. -

두 신은 서로의 이름을 여러 감정을 담아 불렀다. 서로에 대한 원망과 증오의 감정이었으나 한편으로는 함께 해온 동지에 대한 고별인사이자 서로가 베풀었던 것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종말의 신은 대해로 떨어졌으며 가장 깊은 심연에 유배되었다. 생명의 여신은 빛의 기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것으로 용의 시대는 끝이 났다.

생명의 여신은 빛처럼 아름답고 호수처럼 깊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들아.”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의 등에서 내려, 그와 함께 천상의 계단을 타고 올랐다.

“예. 어머니.”

두 사람은 같이 계단을 오르던 중 잠시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왕국과 몇몇 사람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느꼈으나 뿌리치기로 했다. 지상은 산 자들의 세상이다.

엘라카르시스는 엉망이 된 지상을 연민이 가득한 딱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도로 내려간다면 많은 이들을 고통에서 구제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이제 인간들을 자신들의 품에서 내보내야할 때라는 걸 알았다. 생명의 여신은 인간들의 저력을 믿기로 했다.

엘라카르시스는 천상의 목소리를 드높여 아르투르의 장송곡을 부르기 시작하자 천상과 지상을 잇는 통로가 닫혔다. 여신의 장송가는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찬 송가였으며 삶에 대한 찬미로 가득 차 있었다. 아르투르는 감미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천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천상의 문 앞에 풍채 좋은 호남형의 기사가 미소를 머금은 채 자신을 반겨주고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대견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어서 오거라. 아들아.”

“마침내 돌아왔습니다. 아버지.”

부자는 서로를 포옹했다.

- 기사왕 아르투르 마칩니다.

에필로그로 찾아뵙겠습니다. -

에필로그

최후의 용이 쓰러지자 세상의 종말이 멈추었다. 영원한 겨울이 끝나자, 굉장히 따뜻하고 풍요로운 해가 수년이나 반복되며 새로운 시작을 축복했다. 살아남은 자들은 기사왕과 아홉 왕의 원정대에 대한 저마다의 신화를 믿게 되었다. 원정대에 참가했던 자들은 말단 병졸조차 고향으로 돌아가 영웅 대우를 받았다.

사람들은 농작물을 기르고 아이를 낳으며 사회를 재건하느라 바쁜 날들을 보냈다. 역사상 가장 긴 평화의 시대가 도래 했으며 큰 소란이 없는 나날이 이어졌다. 재앙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삶을 사랑하고 목숨을 소중히 여겼으며 축제를 벌였다. 그들은 모두 아홉 왕의 백성들이었다.

아홉 명의 왕들은 종말에 맞선 인간들의 연대의 상징으로서 모든 문명권에서 존중 받게 되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조각상들이 세워졌다. 평화를 이어가던 어느 날, 어디에선가, 어떤 이유로 다시 다툼이 발생했다.

분쟁이 돌아왔다.

처음에 벌어진 분쟁은 경미했다. 그러나 여러 세대가 지내자 사람들은 다시 종말의 기억을 잊고 서로를 향한 적의를 온 힘을 다해 퍼부었다. 그러나 기사왕의 전설은 살아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어려운 시대가 올 때면 사람들은 언젠가 기사왕 아르투르가 돌아와 자신들을 구원해주지 않을까 희망을 품었다. 이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기사왕을 입장과 이해관계를 초월한 화합의 상징으로 삼고자 했다. 현실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기사왕의 연대기를 거듭해서 읽으며 어째서 그가 성공할 수 있었는 지 되새기며 교훈을 배웠다.

기사왕의 이야기는 시간의 세례를 견디며 불멸의 이야기로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이것까지가 기사왕 아르투르의 삶에 대한 이야기의 끝이다.

연대기의 마지막 장은 기사왕이 떠나고 남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우선 기사왕의 정통 후계자인 엘라카르시스 왕가(Dynasty)의 이야기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선 왕조의 어머니가 된 샤를로트 왕비는 섭정으로서 왕조를 이끌어갔다. 왕비는 유능한 통치자였으며 동시에 자신이 쥔 권력을 만끽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고 시대의 혼란을 수습했다.

통치 후반기는 장성한 아들과 제법 마찰이 벌어졌다. 그렇지만 왕비가 훌륭한 통치자로서 왕조의 기초를 닦는데 성공한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샤를로트 왕비는 삶의 마지막 날까지 봉신들의 동향에 대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 그녀는 과로로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샤를로트는 스스로가 이뤄낸 성과를 자랑스러워하며 눈을 감았다. 그녀는 자신의 재산 절반을 고향, 피오렌치아 인들에게 골고루 나눠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아르투르의 장남 테라일 대왕은 어머니가 죽자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움켜쥐었다. 테라일은 부왕이 남긴 평화를 이어가려면 반드시 굳건한 힘과 질서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타고난 천재였으며 열성을 다해 노력하는 법도 아는 사람이었다. 여기에 부모가 물려준 든든한 기반이 있으니 모든 분야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낸 건 당연했다. 테라일은 문명의 토대를 새롭게 세운 후 황제의 자리에 등극했다. 그가 세운 제국은 천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으며 현대인들은 그를 대제라고 기린다.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사람들은 무력과 지략에서 모두 다른 가문들을 압도하며 비범한 명성을 떨쳤다. 선인이건, 악인이건, 평범한 사람이건 그들은 권력을 추구했다. 마치 지배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말이다. 명성 높은 군주, 상인, 장군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항상 좋은 쪽의 사람만 있던 건 아니다. 이 가문은 성군과 영웅만큼이나 많은 폭군과 악당을 배출했다.

다음으론 위르마넨 가문을 보자. 위대한 전사들을 배출해오던 이 유서 깊은 가문은 혈통의 기원이 기사왕 이전으로 올라간다. 하지만 아델라이데 후작 이후로는 기사왕의 후예 가문으로도 볼 수 있다. 아델라이데 후작은 평생 자식들의 아버지에 대해 함구했으나 당대인들은 누가 아버지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아델라이데 후작은 기사왕의 죽음을 뼈저리게 슬퍼했다. 그녀는 남은 삶을 검은 드레스를 입고 살며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삶을 살다가 몸이 약해져서 요절하였다. 기사왕과 염문이 있던 다른 여인들이 잠깐 슬퍼한 후 각자의 삶을 찾아간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아델라이데의 후계자인 프리드리히 대공은 테라일 대제의 측근으로 기용되어 여러 행정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전사로서는 형편없었으나 다방면의 학문에 걸쳐 큰 업적을 남겼다. 위르마넨 가문은 프리드리히 대공의 시대 이후로도 수 세기를 더 이어갔다. 위르마넨 가문 사람들은 성실하고 신의가 있으며 백성들을 사랑할 줄 아는 군주로 명성을 떨쳤다.

기사왕의 수많은 애인 중 가장 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자는 단연코 모험가 힐데군드일 것이다. 힐데군드는 이 전설의 시대에 가장 뛰어난 전사 중 한명이었고 누구도 가보지 못한 곳을 쏘다니며 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의 삶은 단독으로도 장편의 서사시를 쓸 만한 것이지만 이 연대기에서는 기사왕과 연관된 부분만 다루어보겠다.

힐데군드는 종말이 끝나고 모두가 기사왕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을 때, 옛 애인이 대단히 멋진 죽음을 맞이했다며 기뻐서 춤을 추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할양 받은 영토로 돌아가 독립적인 군주로서 살아남은 북구인들을 다스렸다. 군주로서의 그녀의 통치는 옛 신들에 대한 숭배를 매우 엄격히 금한 것 외에는 다룰 게 없다. 군주의 자리에서 누리는 부귀영화만 누리며 아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백성들이 싸움을 벌이면 알아서 해결하게 두었고 통치에 부족한 게 있으면 그때그때 신하에게 빼앗아서 해결하는 무정부나 다름없는 통치를 했다. 몇 년이 지난 후, 힐데군드는 가장 아끼는 측근들만 데리고 자신이 가장 아끼는 푸른 배에 올라 서쪽의 끝없는 망망대해로 떠나버렸다. 세상의 끝을 보고 오겠다는 말 외에는 그녀가 남긴 말도, 이후로 서부 대륙에서 그녀를 보았다는 어떤 공식 기록도 없다.

그녀의 행방은 당대에도 음유시인들의 관심사였던지라 다양한 이야기가 전해져온다. 망망대해 너머에 있는 또 다른 거대한 대륙에 도착해 탐험하다 죽었다고도 하고, 힐데군드의 푸른 배가 폭풍우를 만나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금 허황된 이야기지만 세상의 끝을 지키는 크라켄과 전쟁을 벌였다고도 한다.

필자도 진실은 모르겠다. 어떤 것도 검증된 바가 없으며 근거도 없다. 힐데군드의 마지막은 순전히 전설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힐데군드는 아버지가 다른 여섯 명의 자녀들이 있었고 이들은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성공해서 일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독보적인 명성을 얻은 “괴물 살해자” 시구르드는 평생을 어머니가 남긴 대검 한 자루에만 의존한 채 떠도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오직 강함과 모험만을 쫓는 삶을 살았다. 시구르드는 늘 지역에 도착하면 강자와 겨루고 몬스터를 해치우고 축제를 대접받은 다음 지역으로 옮겨가는 간소한 삶으로 전설적인 명성을 얻었다.

나중에 시구르드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시구르드의 후예들”은 백 명이 넘었는데, 대부분 기사왕이나 힐데군드를 닮아서 신빙성이 있다고 여겨졌다. 시구르드의 혈통은 굉장히 호전적이며 즉흥적인 삶을 사는 전사와 모험가들을 배출했다.

패왕 레오폴트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강철과 불로 질서를 바로 세웠으며 젊어서 바라던대로 아버지의 명성을 한창 능가하는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 쉼 없이 전장을 나도는 삶을 살아야했다. 레오폴트는 말년까지 자신의 삶을 후회하지 않았으나 아르투르의 방법이 자신의 방법보다 나았다는 걸 인정했다. 단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 녀석이 나았던 건 맞아. 하지만 누구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행운과 재능을 타고나는 건 아니라고. 나는 내 입장에서 최선을 다 한거야.’

패왕이 죽자 그에게 강제로 무릎 꿇려져있던 이들이 일제히 반란을 일으켰다. 프란츠 왕이 살해당하는 지경에 이르자 테라일 대제가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 반란군을 제압하고 자신의 아내인 레오노르 황후를 스티리아의 대왕으로 대관시켰다. 레오노르 황후는 반란군에 대해 관대한(영악한) 처우를 베풀었고 이로서 레오폴트가 다스리던 방식의 통치는 끝이 났다.

훗날 두 사람의 사이에 태어난 황태자가 레무리아와 스티리아의 왕관을 각각 부모에게 물려받으며 두 국가는 완전한 연합을 이루었다. 스티리아의 오’데르만 왕조는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자 결혼 상대로서 천년이 넘는 유대 관계를 이어갔다.

장인들의 도시인 두라노는 기사왕이 참주의 통치를 끝장낸 날을 해방의 날이라고 부르며 지금까지도 가장 큰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마스터 에렌은 전후에 레무리아 왕국의 농경지 복구와 경제 부흥을 이끌며 많은 업적을 남겼다. 종말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근위대장 조레스는 이후로도 수 대를 엘라카르시스 왕조에 충성하며 공신 세력으로 남아있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본디 기사왕을 침략자에 가깝게 보며 경원시했었다. 그러나 이제 기사왕은 일개 군주가 아닌 종말의 용을 쓰러뜨린 구세주의 대리자가 되었다. 이제 피오렌치아 인들은 다른 고장보다 자신들의 고장이 위대하다는 근거에 자신들이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수도라는 중대한 근거를 추가했다. 물론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들을 더 꼴보기 싫어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백인대장 레니에의 사람들은 신질서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이후에는 왕국의 신민으로서 만족하며 살아갔다. 불멸의 명성을 가진 기사왕의 후예라는 권위는 누구도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군주들에게 견제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했다. 귀족들조차 짓눌리는 판국에 평민이 정치에 참여할 공간은 없었다.

그러나 수 세기 뒤, 기사왕의 후예라고 절대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폭군이 나타나 제국을 멸망 직전으로 몰고 가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폭군 삼촌의 목을 날리고 새롭게 즉위한 황제는 황권에도 제약이 필요하다고 느껴, 레니에가 제안했던 의회의 개념이 받아들여졌다. 이제 제국 의회는 민의를 대변하는 기구로 기능하며 정치적 안정을 이루고 있다.

한편 명사수 카밀은 사생아조차 남기지 않아 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렇지만 말년에 찾은 그의 누이와 조카들은 넉넉한 연금을 받으며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받았다. 몇 대가 지나자 그들은 명사수 카밀과 혈연이 닿아있는 걸 영광으로 여기고 가문의 이름을 카밀로 고쳤다.

이제 명사수 카밀에 대한 이야기는 민중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공명정대한 법관의 표본이자 권력자의 불의에 대한 민중 저항의 상징으로 굉장한 인기를 누리며, 위대한 케이 백작과 함께 전설의 시대에서 가장 명성 높은 영웅이 되었다. 황실을 폐지해야한다는 극단주의자들이 카밀을 상징으로 사용하지만 독자들은 잊지 말라. 그는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충실한 심복이었다.

이상의 내용은 세퍼드 가문원들에게만 공개되는 “위대한” 케이 대공의 회고록에 근거해 집필되었다. 지성을 갖춘 교양인이라면 당연히 “위대한” 케이 대공이 기사왕과 가장 가까웠던 동료라는 점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번 판본에는 다른 이들은 알 수 없던, 기사왕의 현실적인 결점이나 한계 역시 담고 있다. 그분은 완벽한 분은 아니었으나 우리가 아는 한 가장 위대한 제왕이시자 불멸의 기사이시라는 점에는 의문을 제기할 자가 없을 것이다.

“기사왕 아르투르” 연대기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 레무리아 제국의 재상, 엘타르 대공 케이 15세 -

* 집필자와 동일한 이가 내용을 검토하고 공인한 제국의 공식 교과서임. 모든 학문적 논의는 해당 연대기에 근거하여 이뤄질 것이며 다른 학론을 내세울 시 황실 모독 방지법, 가짜소식 유포 방지법, 기사의 명예훼손 금지법, 역사 바로세우기법에 의거하여 처벌될 것임. *

천 년 전에 살던 자신의 선조를 꼭 빼닮은 케이 15세는 기지개를 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중요한 내용을 삽입하는 걸 놓친 것 같았다.

‘흠. 아. 그래. 요주의 인물 하나를 빼 먹었군. 뭐, 그런데 중요한 인물도 아니고 배워봐야 도움도 안되는 인물이니 빼자고. 기사답지도. 영웅답지도 않은 놈을 써서 뭐하냐? 귀찮은데 넘어가자.’

***

전쟁이 끝나고 용병공 만프레드는 심복들과 함께 노왕의 왕국을 찾아갔다.

“와하하하하하! 대박이다아아아아아! 대박!!!!”

“우린 부자야!!!!!!!!!!!!!!!”

“만프레드! 만프레드! 만프레드!”

세마수트라 1세가 넘겨준 지팡이는 고대의 피라미드로 만프레드 일행을 이끌었다. 피라미드의 지하실에는 천 년 동안 파라오들이 모아둔 재화가 있었다. 만프레드 일행이 가져온 자루에 보물을 가득 담고 나서도 여전히 산더미처럼 보화가 쌓여있었다.

“우린 부자야!”

“일단은 이 정도만 가져가자고! 너무 많이 풀면 또 물가가 올라가니까!”

“역시 대장은 똑똑해!”

만프레드는 부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쥐었다. 이곳 백성들은 세마수트라 1세가 점지한 후계자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파라오의 보물을 팔아서 벌어들인 돈은 황금을 물 쓰듯이 쓸 수 있을 정도로 많았다. 다 떨어져도 피라미드에 가서 새롭게 가져오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 사람들은 만프레드를 두고 황금의 파라오라고 불렀다.

“이봐. 시종장. 황금의 파라오는 너무 길고 거창해. 좀 바꿔야겠어.”

환관인 시종장은 90도로 머리를 숙여보였다.

“저희가 무엇이라고 주인의 존함을 칭하면 되겠습니까?”

만프레드는 서늘한 언덕의 쇼파에 앉아서 풍요로운 범람원을 내려다보았다. 백성들이 열심히 일하며 자신에게 바칠 세금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칭호만이 문제가 아냐. 만프레드라는 이름도 너희가 들을 때 너무 낯설어. 유수프, 지브릴, 하마드. 이런 현지 이름으로 좀 바꿔야겠다. 난 너희가 정말 좋아서 친해지고 싶거든!”

황금의 파라오는 이곳의 삶이 정말 좋았다. 궁전에 있는 환관들과 정말 정말 정말 정말 아름다운 시녀들은 하루 종일 자신을 따라다니며 관심이라도 받으면 은혜를 입은 것 마냥 고개를 조아렸다.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었다니!

“새로운 호칭을 말씀해주시면 저희가 따르겠나이다.”

황금의 파라오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빠졌다. 파라오는 마음에 안 드니 왕으로 하자. 만프레드는 발음은 비슷하면서 현지 느낌이 나는 게 좋겠어.

“나의 새 칭호는 부자왕 만수르다!”

“경배드리나이다. 부자왕 만수르이시여.”

부자왕 만수르는 사십 년을 더 통치했다. 단 한 번도 고민하거나 자제한 적이 없었다. 원하는 건 다 했고 어려운 문제는 신하들이 알아서 했다. 그러면서도 나라는 잘 돌아갔고 백성들은 자길 좋아했다! 이게 가능했던 까닭은 부자왕이 돈을 팍팍 풀어서 모두가 부자가 되었던 덕이다! 지갑이 두둑해진 백성들은 기사왕에게조차 바치지 않던 극한의 존경을 부자왕 만수르에게 보냈다!

세상을 구원해주는 건 십 년이 고맙지만 부자로 만들어주면 평생이 고마운 법!

황금. 황금이 최고다!

그런데 사십 년이 지나고 부자왕 만수르가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스물여덟 명의 손자들이 걱정스런 얼굴로 찾아왔다.

“할아버지. 이제 국고에 돈이 없는데요? 이대로면 폭동이 날지도 몰라요. 어떻게 합니까?”

만수르는 깔깔 웃었다.

“껄껄. 걱정할 것 없다. 짐을 따라오거라.”

부자왕은 손자들을 데리고 고대의 피라미드로 향했다. 이번에도 보물 창고에서 부장품을 꺼내면 되겠지!

흥분에 들뜬 만수르가 보물 창고로 급히 들어가다 난간에 발을 헛디뎌서 넘어졌다.

“어이쿠!”

만수르가 무너지며 보물 창고의 한 켠에 쌓여있던 금괴의 산을 건드리고 말았다.

“어?”

땅바닥에 자빠진 부자왕의 눈에는 자신을 향해 떨어지는 수백 개의 금괴가 보였다. 손자들의 피하라는 외침이 들려왔지만 늙은 몸뚱이는 제때 움직여주지 않았다. 아. 이제 살 만큼 살았다. 노인의 얼굴에 행복감이 가득 퍼졌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쾌락과 즐거움을 겪어본 뒤에 금괴에 맞아죽는 죽음이라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결국 부자왕 만수르는 금괴의 파도에 짓눌려 압사 당했다. 후손들은 할아버지의 탐욕 때문에 옛 파라오들의 저주가 임한 게 분명하다며 고대의 피라미드를 다시 비밀에 붙였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는 탐욕을 경계하라는 격언을 이렇게 전한다.

‘만수르를 기억하라.’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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