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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6화 (24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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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네토르 왕국의 수도, 아헨은 본디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인구가 모인 지역 중 하나였다. 왕국은 발루아누스 왕과 기사들의 항전으로 멸망을 지연시키고 있었지만 포기할 수 없는 밖에 목숨들이 있었다. 북구인들은 포로를 잡지 않았고 이교도들의 고통과 비명을 신들에게 바치는 제물이라고 믿었다. 습격으로, 전투로, 약탈로, 인신공양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셀 수 없게 많은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다.

썩지도 못한 채 버려졌던 시체들의 안광이 빛을 냈다.

뼈만 남은 망자들이 일어섰다.

불타없어진 자들은 망령으로 나타났다.

목이 잘려 죽은 병사가, 옷이 찢어진 여인들이, 제단에 바쳐진 어린아이들이, 산 채로 피부가 벗겨졌던 사제와 귀족들이 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해냈다. 그들은 엉망이 된 자신의 몸을 바라보며 분노로 들끓었다.

- 피에 굶주린 신들은 우리의 분노를 모른다! 인간들의 의지를 모른다! 그들에게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줄 시간이다! -

파라오의 원혼이 유령마들이 끄는 전차에 타고 나타났다. 위엄을 떨치고 포부가 넘치던 전성기의 모습으로 돌아온 세마수트라였다. 조상들의 힘을 한꺼번에 사용한 그의 원혼은 삼지창을 드높이며 유령마에게 채찍을 가했다. 수백만에 이르는 원혼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방이 막혀 달아날 곳은 없었다.

사자들의 물결은 겨울의 군대를 휩쓸었다. 도망치려고 날아오른 야수는 귀기 어린 화살비에 맞고 떨어져 좀비들에게 집어삼켜졌다. 미라들은 북구인들의 안구를 뽑고 내장을 자르며 최대한 오래 살려두었다.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물인 맘모스는 뼈와 시체들을 짓밟으며 난동을 부렸으나 명을 재촉하는 일일뿐이었다. 사자들의 군대는 서로를 짓밟고 올라가 산 채로 맘모스의 피부를 잘게 뜯어버렸다. 그들은 고통의 비명을 지르며 하나둘 쓰러져갔다.

어떤 군대도 사자들의 분노에 맞서선 승산이 없었다. 전멸은 시간 문제였다.

“결국 네가 이겼구나.”

타네르사는 입에서 피를 가득 토해내며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아르투르는 가차 없이 타네르사의 심장을 꿰뚫은 성검을 빼냈고 그녀는 얼음 바닥으로 쓰러졌다. 겨울 여왕의 시선은 검게 닫혀있는 하늘로 향했다.

“모든 게 끝났소. 어머니.”

타네르사는 피범벅이 된 모습으로 웃었다.

“끝에 가서야 어머니라고 해주는 거냐.”

아르투르는 자신이 부인할 수 없게, 동정심을 담아 북구의 여왕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알았다.

“한번쯤 같은 인간에게 어머니라는 단어를 말해보고 싶었소. 우리는 죽어서도 만날 수 없을 테니 말이오.”

“조상들의 전당에선 함께 하게 되지 않겠느냐.”

아르투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대는 피에 굶주린 신들의 궁전으로 갈 거요. 하지만 나는 진짜 어머니의 정원으로 가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될 거요. 우리의 운명은 영원히 갈라졌소.”

진짜 어머니라는 말이 타네르사의 마음을 찔러왔다. 그녀는 스스로의 몸이 차가워지며 눈꺼풀이 감겨오는 걸 느꼈다. 영원한 암흑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들아. 난 진심으로 네가 반가웠다.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우리는 함께 할 수 있었을텐데.”

“이젠 부질없는 가정이오. 말을 아끼고 저승으로 떠나시오.”

대답이 없자 아르투르는 쓰러진 적의 눈을 감겨주었다. 이것이 자신의 생모에게 표출할 수 있는 그리움의 전부였다. 마법이 사라지자 겨울 여왕의 육신은 굉장히 늙은 노파로 쭈그러들었고 이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두 사람이 딛고 있던 발판은 도로 지상으로 내려갔으며 아르투르는 다른 왕들에게로 갔다.

“다행히 다들 살아있었군.”

레오폴트, 발루아누스, 현왕과 덕왕, 거기에 노왕까지 전부 한 군데 모여 적들이 쓸려나가는 모습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노왕이 보기 흉할 정도로 늙은 노인에서 중년의 사내로 가득 회춘해있었다.

“노왕. 어떻게 된 거요? 잠깐. 이 얼굴은………….”

황금관을 쓴 중년의 파라오는 목청을 가다듬으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엣헴.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소. 기사왕. 나는 파라오 중의 파라오이신 노왕의 유지를 이은 새로운 파라오. 황금왕 만프레드라고 하오. 용병왕이라고 불러도 좋소.”

다른 왕들은 용병놈이 꼴깝을 떤다는 표정이었다. 아르투르도 위 아래로 새로운 파라오를 살핀 후, 상대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딱밤을 놨다.

“아악! 같은 왕 간에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시끄럽다. 네가 영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충성 맹세는 유효하다. 그 전까지는 말을 높여라. 용병왕.”

“넵.”

사자들의 군대는 문명인들은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은 채 비켜나갔다. 맘모스고 북구인들의 마법이고 아무런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적들이 쓸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에쿠잘루스가 다가와 아르투르의 곁에 섰다. 기사왕은 오랜 동료의 머리 갈기를 쓰다듬은 후 등에 올라탔다.

북구인 사제들이 모두 쓰러지자 구름의 일부가 걷히며 햇살 한 줄기가 들어왔다.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맘모스도 쓰러지자 겨울의 군대는 전멸했다.

덕왕이 호기롭게 소리쳤다.

“끝났다!”

기사왕은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오.”

유령이 된 노왕과 사자의 군대는 여전히 사기로 끓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의 손톱과 무기는 하늘을 향했다.

“이제 시작이오.”

구름 속에서 거대한 존재가 움직이고 있었다. 햇살은 그림자에 파묻혔다. 아르투르의 초인적인 감각은 구름 속에 있는 저 커다란 존재가 자신을 응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최후의 용이었다.

모든 왕들의 마음속에 장엄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기어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오게 되었구나. 너희의 의지에 경의를 표한다. 발타리아의 사자와 그의 추종자들아. -

듣는 것 만로도 오금이 저려왔으나 청년왕 발루아누스는 용감하게 답한다.

- 왜 여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느냐? 사악한 뱀아. -

- 너희의 의지를 존중하고 싶었다. 미물이라고 한들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는 합당한 것이다. 내 모습을 보고 너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렇지만 너희는 승리했고, 살아남았다. 그러니 이제 진실을 목도해야만 한다. -

하늘을 뚫고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이들은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너무나 거대하여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시야의 중앙에는 화산처럼 보이는 시커먼 몸체가 있었다. 뒤로는 꼬리로 추정되는 기다란 산맥이 자리 잡고 있었고 옆으로 펼친 양 날개는 시야에 모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날아다니는 검은 산맥은 비교적 작은, 뱀처럼 보이는 머리를 내밀었지만 대도시의 성벽보다도 높고 커보였다.

자줏빛을 내는 거대한 보석과 같은 안구가 번득이며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옛 사람들은 자주색을 언제나 불길한 색채라고 여기며 죽음의 색으로 여겼다. 오래된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뭐, 뭐냐. 저게.”

청년왕 발루아누스는 손에서 검을 떨어뜨렸다. 분명히 저 검은 산맥은 전승되는 용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대한 도마뱀과 같은 몸과 머리. 비교적 왜소하고 넓은 날개와 앞뒤로 있는 두 쌍의 단단한 발톱이 있다. 그러나 생김새를 빼고는 어떤 전승과도 일치하지 않았다. 기사의 창으로 심장을 꿰뚫거나 마법의 화살에 급소를 맞아죽는 비만 도마뱀들이랑은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거대한 존재가 지상으로 강림하고 있었다. 그가 날개를 펄럭여 바람을 일으키자 태풍과 같은 세기의 강풍이 들이닥쳤다. 강림할 장소에 있던 허약한 해골 병사들이 우수수 날아가 먼 곳에 떨어졌다.

마침내 진실의 시간이 왔고.

모두는 깨달았다.

기사왕이 우리를 속였다.

처음부터 희망 따위는 없었다.

세상을 창조한 신들이 정해둔 일에 인간이 거역할 방법이 있을 리가.

가장 강인한 정신력을 지닌 자들조차 자신의 행보를 후회했다. 신이 있다면 바로 저런 존재다. 그러니 우리도 저 존재를 섬겼거나 집에서 편안한 최후를 맞이해야했다.

우리가 함께 다짐해온 결의는.

우리가 함께 해온 모든 고난은.

우리들이 함께 치루었던 희생은.

─── 모두 헛되디 헛된 것.

크롸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

종말의 신의 포효가 잠들어있던 세계를 깨웠다. 잠잠해지던 눈보라가 전세계에 강렬히 몰아쳤으며, 대륙은 지각 변동을 준비했다. 모든 살아있는 인간은 멸망을 알리는 신호를 들었으며 거대한 존재는 모든 곳에서 목격되었다. 절망이 번져나갔고 가까스로 유지되던 질서는 단숨에 무너졌다.

“끄, 끝이다.”

레오폴트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피의 마검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오래 전부터 용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모아둔 무기였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으리라. 이런 무기는 신에겐 이쑤시개도 되지 못한다.

“도망쳐! 도망쳐라! 신의 진노를 피해 도망쳐라!”

만프레드는 공황에 빠져 미쳐 날뛰며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다. 도망쳐도 살 수 있을 리가 없건만. 이미 이성적인 사고는 멈춰버린 뒤였다.

“기사답게. 오’데르만 왕가의 수장답게. 페르넬의 손자답게. 맞서. 맞서라고!”

발루아누스는 스스로 떨어뜨린 검을 집으려고 했으나 몸이 굳어버렸다. 더 이상 발루아누스의 몸은 이성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본능은 움직이는 걸 거부했다. 끝까지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우리에게 주어진 최선의 방법이 무엇이겠소? 현왕.”

덕왕은 애써 공포를 억누르며 물었다. 현왕은 몇 초 사이에 세계 최고의 지성으로 최적의 해답을 도출했다.

“자살입니다.”

조언을 남긴 현왕은 누구보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잘 알았기에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느끼고 기절해버렸다. 덕왕은 그녀를 데리고 남은 군대와 함께 피난을 시작했다. 저건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자연 재해에 맞서 싸우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일단 살아남고 볼 일이다.

“우와아…… 신의 진신이라는 건 진짜 대단하구나. 그래도 생애에 한번이라도 보았으니 됐어. 살아온 보람은 있었네. 고맙다. 아르투르. 덕분에 이런 것도 보고 가네. 너도 할 만큼 한 것 같아.”

외딴 곳에 쓰러져 숨을 추스리던 힐데군드는 손에서 검을 놔버린 채 사지를 벌리며 뻗어버렸다. 두려움은 없었다. 단지 필멸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객관적 진실을 수용했을 뿐이다.

“시구르드. 너라도 도망쳐라.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 정도는 신세계에서 살아남는 쪽이 좋겠지. 나는 여기까지만 살겠다.”

가장 용맹하며 특출난 자들이 이런 상황이었으니 다른 이들의 상황은 볼 필요도 없었다. 겨울이 맨 처음 닥칠 때와 같은 혼란이 문명들을 엄습해갔다. 사람들은 미쳐갔다.

콰아아아아앙 - !

검은 재앙이 지상에 강림한 자리에 커다란 구멍이 패이며 지축이 흔들렸다. 수많은 사자의 군대가 거체에 눌려 짓뭉개졌고 노왕의 혼은 산산조각났다.

- 간만에 집으로 돌아왔군. 새롭게 집을 꾸며야하니 대청소를 좀 해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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