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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이 겨울 여왕과의 싸움을 압도하던 순간에도 원정대의 병력들은 큰 곤경에 처해있었다. 성난 맘모스들이 뿔을 휘두르면 기병이 날아가고 발로 짓밟으면 보병이 전멸했다. 그런데 털과 가죽이 너무 두꺼워 상처를 입지 않았다. 용감한 장사들이 온 힘을 다해 맘모스에게 무기를 휘둘러도 얕은 상처만 입혀 야수들의 화만 돋구는 결과를 가져왔다. 희생자만 하루 종일 늘어났다.
“으아아아아악!”
울려퍼지는 병사들의 비명.
“뿌우우우우우우우!”
태고의 야수들의 분노 앞에 북방인 보병대를 학살하던 낫전차나 기사들은 반대의 입장이 되었다. 잔인한 심성의 맘모스들은 그들을 가지고 놀면서 펑펑 날려댔다. 거대한 야수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여름 제도의 명사수들이나 동방의 화염 술사들은 이미 전멸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잔여 병력들은 어떻게든 버텼다. 아득바득 시체로 산을 쌓아갈 때,
노왕이 주문의 마지막 구절을 외웠다. 머나먼 선조인 죽음의 신의 정수가 그의 몸에서 들끓으며 방출될 준비를 마친 것이다. 노왕 혹은 세마수트라 1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눈에 덮인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너무나, 너무나 오래 산 인간이었다. 평균 연령이 중년에 있음에도 모두가 그를 엄청난 연장자로 대우한 이유가 있었다.
세마수트라 1세는 혼자서 하나의 왕조가 시작되고 끝날 정도의 세월을 군림했다. 나이를 세는 것도 포기했다. 세 번의 세기가 지났다는 기억할 뿐이었다. 고대 영웅의 후손은 어려서부터 모든 면에서 미천한 인간들보다 뛰어났다. 영특한 일곱 살 소년은 세계에 군림하여 선정을 베푸는 것이 자신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열 여섯의 청년은 세계 정복이 이뤄지는 날까지 잠들지 않겠노라 맹세했으며, 그 정도로 긴 삶을 살 수 있도록 위해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는데 일생을 바쳤다. 청년이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몸에 흐르는 죽음의 신의 정수를 이용하는 법을 깨달았다. 영원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오오오! 이것이다! 이것이 짐을 있어야 할 자리로 올려줄 것이다!”
불사를 얻는 과정에서 알아낸 지식의 부산물들도 유용히 쓰였다. 미라 군단과 움직이는 스핑크스들을 만들어낸 세마수트라는 선포했다. 자신은 고대 영웅의 마지막 후예로서 세계의 정당한 지배자이다. 따라서 모든 왕들은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그러자 이웃 왕들은 죽음을 정복한 강령술사 왕이 나타났다며 공포에 떨었다!
보아라! 이 세마수트라 1세의 위대함을!
세마수트라는 섬기지 않는다! 세마수트라는 지배한다!
만국의 군주들이 그를 찾아와 절할 것이다!
……
만국의 군주들이 몰려오기는 했다. 엄청난 군대를 거느리고 말이다. 세마수트라가 자신을 세상의 제왕으로 선포하고 일 년 후, 그의 나라는 완전히 망했다. 그들은 고대의 피라미드의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세마수트라의 석관을 파괴하는데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마수트라가 돌아왔을 때는 예전의 영화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의 나라를 재건하고 군단을 복원하는 데 수백 년이 걸렸다.
마침내 준비가 끝났다.
이제는 자발적인 복종 따윈 기대하지 않으리라! 인간 왕들은 너무나 미개하다! 짐의 위엄을 무력으로 보이겠다!
고대의 피라미드 속에서 세계 지도를 살폈다.
‘기사왕이라는 젊은이가 가장 큰 문제군. 일단 그부터 쓰러뜨리면 모든 게 쉬워지겠어.’
그런데 영원한 겨울이 닥쳐왔다.
이런 썩을. 이대로면 내가 정복할 세계가 안 남잖아!
***
노왕은 회상에서 깨어났다.
“흠.”
“할배! 뭐하쇼! 준비 끝났으면 당장 써!”
레오폴트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군마는 창에 맞아 절명했으며 스스로는 맘모스의 뿔을 타고 오르는 묘기를 보이며 분투하고 있었다. 아슬아슬한 순간이 여러 번 지나갔지만 패왕은 결국 맘모스의 머리 위로 올라가, 북구인 사수들을 모조리 베어버린 후 맘모스의 두뇌에 마검을 꽃아 넣었다.
“뿌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 !”
야수의 절규가 들린다. 피의 마검이 맘모스의 생명력을 포식하며 배를 채웠다. 머리 부분이 통째로 해골로 변해버린 맘모스는 힘을 잃고 쓰러졌다. 처음으로 맘모스가 쓰러지자 병력들은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노왕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었다. 주문을 쓰면 자긴 죽을 텐데.
“아직 죽기에는 너무 한 많은 인생이다. 세계 정복도 못해봤단 말이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 노왕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너무나! 너무나 원통했다! 세계 정복이 눈앞이었단 말이다! 마음을 바꾸겠다!
“에이. 너희가 알아서 해결해라. 너희가 그렇게 좋아하는 기사왕 보고 해결하라고 해! 짐은 전쟁이 끝나고 세계를 정복하겠다!”
“미라 냄새나는 병신 노인네 새끼야! 이 전쟁 지면 세계 정복도 못해!”
레오폴트의 격분한 목소리에도 노왕은 시니컬하게 답할 뿐이었다.
“흥. 아무튼 살아남은 자는 있을 것 아닌가. 그들을 전부 다스리면 짐의 세계 정복은 이뤄지는 것이다.”
“뭐요? 당신 미쳤어? 이곳까지 오느라 쓰러진 당신 백성이 얼만데?”
“에잉. 너 같이 불손한 놈을 위해 왜 짐이 희생을 해야 하느냐. 노왕의 종복들은 주군을 섬기다가 죽은 것을 영광으로 여길 것이다.”
노왕의 어처구니없는 아집에 다른 왕들마저 할 말을 잃고 대응하지 못할 때, 용병공의 외침이 들려왔다.
“오오오! 왕이자 황제이며 교황이며 신-왕이실뿐만 아니라 역사상 존재했던 영웅들 중 제일 가는 전사이시며 현자들 가운데 현자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신의 17대 손으로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 앞으로 태어날 자들 가운데 가장 존귀하고 로열하시며 드높으신, 전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군주로서 군림하시는 임페라토르-대칸-천자이신 파라오 중의 파라오 세마수트라 1세 만세!”
굉장히 장황하기만 할 뿐, 공허하기 그지없는 칭호였으나 만프레드는 열과 성을 다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제단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왕에 대한 한없는 존경의 시선을 보냈다. 토라져있던 노왕의 표정이 밝게 펴졌다.
“오오! 갸륵한 지고! 다른 우매한 자들을 너를 용병이라고 업신여기지만 너야말로 진정으로 현명한 자였구나!”
만프레드는 손을 싹싹 빌고 고개를 조아리며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그렇고말고요! 위대하신 파라오 중의 파라오에 비하면 기사왕 따위는 용력만 믿는 필부에 불과합니다! 저희는 당신을 진정한 주인으로 섬기나이다! 전군! 머리 박아!”
용병공은 아예 말에서 내려 물구나무를 서면서 절했다.
“오오. 그 동작은 무엇이냐?”
“존귀하신 파라오 중의 파라오께 경의를 표하기에는 절을 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래서 제가 새롭게 위대한 절이라는 예식을 만들었지요!”
아르투르의 봉신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표정이었으나 만프레드가 입모양으로 그들에게 신호를 전했다.
‘멍청이들아! 충성을 바친 상대가 죽으면 서약은 끝나잖나!’
‘아! 그런 간편한 방법이!’
기사왕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봉신들도 와서 같이 위대한 절을 바쳤다. 현왕은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자신도 절을 바쳤고 동오의 덕왕은 이를 악물고 백성들을 위해 굴욕을 감내했다. 모두의 시선이 레오폴트에게 향하자 결국 그도 하는 수 없이 엎드려 절했다. 물론 속으론 다른 생각을 했다.
‘일이 끝나면 당신네 왕국으로 찾아가 피라미드란 피라미드는 모조리 부수고 부장품은 도굴해갈 테다. 씨발놈.’
세상의 위대한 군주들이 자신에게 복종을 표하는 모습을 본 노왕은 아주 흡족한 표정이 되었다. 용병공은 이 때다 싶어 큰 소리로 외쳤다.
“존귀하신 파라오 중의 파라오이시여! 청이 있나이다!”
“갸륵한 자여. 파라오가 네 말을 듣노라.”
“부디 죽음의 권능을 사용하시어 저희를 구원해주소서!”
노왕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짐도 그러고 싶으나 아직 세계 정복이 끝나지 않았기에 짐은 죽을 수 없다.”
만프레드는 계속 싱글 벙글 웃으며 재빨리 혀를 놀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살아남은 모든 문명인들의 대표! 따라서 이들의 복종은 모든 문명의 복종을 뜻하지 않겠습니까?!”
“으음. 그런가? 현왕의 의견은 어떠한가?”
노왕의 물음에 현왕도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실로 그렇사옵니다! 파라오 중의 파라오이시여!”
“으음. 그대의 말이라면 맞겠지. 허나 아직 기사왕이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다들 마음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전장터에서 한창 싸우던 군주들이야 어떻게 불러왔지만 혼자서 적의 수장과 싸우고 있는 기사왕을 어떻게 이 자리에 데려와 머리를 박게 한단 말인가. 모두가 시간 낭비를 했나 싶어 암담한 심정이 되었던 무렵, 불멸의 용병은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그 점에 대해 충심으로 조언할 것이 있나이다! 파라오시여! 이미 기사왕은 파라오 중의 파라오께 충성을 맹세한 것이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세계 정복이 완수되신 겁니다!”
노왕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 어찌 그런고? 갸륵한 자가 사특한 말로 짐을 속이려는 건 아니겠지.”
다시 위대한 절을 바치는 만프레드.
“절대 아닙니다! 제 말을 차분히 들어주십시오. 우선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모래바람의 왕국의 관습에선 한 가문의 대표는 한 사람뿐이며, 모든 사람은 가주의 명에 종속되지 않습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노왕.
“지당하다.”
“또한 가주는 가문 내의 최고 연장자가 아닙니까?”
“그것도 옳다. 그러니 기사왕은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것이다. 엘라카르시스 가문의 수장이 아직 짐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어!”
용병일을 하다보면 고객들을 달래거나 속여야 할 때가 온다. 지금은 일생일대가 걸린 순간이었다. 굴러라. 혓바닥아. 돌아라. 머리야!
“엘라카르시스 가문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건 저희 미개한 서부인들의 관습에서 나온 거지요.”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린고? 짐을 감언이설로 속이려는 것 아니냐?”
만프레드는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파라오의 자식이라면 다 같은 왕족이지, 그들의 배우자가 어떤 신분인지는 상관이 없지 않습니까? 한 명의 배우자만을 적법한 결혼 상대라고 주장하는 것은 미개한 저희의 관습입니다! 교정되어야 할 일이지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왕.
“좋은 말을 했다! 갸륵한 자여! 파라오의 자식들은 다 똑같은 권리가 있지! 어머니의 신분이나 성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파라오의 자식은 다 파라오가 될 권리가 있어야하는 것이다! 이제는 전 세상이 올바른 미풍양속을 따라야만 하리라!”
“오오! 역시 파라오 중의 파라오십니다! 청컨데 해당 법률은 당연히 소급적용이 되겠지요? 이 미천한 자도 가문의 유산을 되찾고 싶습니다!”
“갸륵한 자가 청한다면 들어주어야겠지! 세계의 군주가 선언한다! 이제 사전에서 사생아라는 개념을 지우라! 부모의 자식은 모두 같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엘라카르시스 왕조는 없습니다! 오’데르만 왕조만 있지요!”
“?”
좌중이 일시 혼란에 빠졌다.
“기사왕께서는 오’데르만 왕조의 수장인 페르넬 오’데르만의 아들로 태어나셨습니다. 지금 가문 내의 원로와 그의 형들은 모두 죽었지요. 하지만 레오폴트 폐하께서는 기사왕보다 백 일 먼저 태어나셨습니다! 마땅히 연장자로서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옳거니! 갸륵할 뿐만 아니라 현명하기도 하구나!”
노왕은 크게 웃으며 손뼉을 친다.
“가주의 충성을 받으면 가문원의 충성은 이미 받아낸 것! 따라서 기사왕은 사실상 파라오 중의 파라오께 충성을 바친 것입니다! 존귀한 분께서는 방금 세계를 정복하셨습니다! 경하드리옵니다! 파라오 중의 파라오이시여어어어어 -!”
만프레드의 혼이 담긴 연기에 다른 이들도 모두 똑같이 따라주었다. 경축드리옵니다아아아아아! 폐에에에하! 레오폴트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이딴 병신 짓에 누가 속아 주냐?’
하지만 노왕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오오! 위대한 선조들이시여! 제가 마침내 위업을 해냈나이다! 분열로 가득 찼던 세계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나이다!”
“질서를 가져오셨으니 평화를 가져오실 때입니다! 부디 세계를 구원해주시옵소서서어어어 -!”
노왕은 자신의 영토를 침범하여 백성들을 살육하고 있는 외적들을 바라보았다.
“군주라면 권리를 행사하기 전에 의무를 지켜야하는 법. 갸륵한 자는 짐의 앞으로 나와 명을 받들라!”
만프레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왕에게 걸어갔다. 얼굴은 존경심으로 가득 찬 표정이었으나 속은 조마조마했고 땅에 박았던 머리는 너무 아팠다. 씨발. 인생 힘드네.
“무릎을 꿇거라!”
장난 그만해! 지금도 내 부하들이 죽어간다고!
“그대를 짐의 모든 권리와 재산의 관리자로 지명한다. 짐이 죽음에서 돌아오는 날까지 파라오 중의 파라오를 대신하여 짐의 왕국을 보살피고 통치하도록 하여라. 이제부터 그대는 섭정왕이라고 불릴 것이다.”
노왕은 용병공의 머리 위에 파라오의 금관을 씌어주었고 붙잡아 일으켜 세운 후, 스핑크스 문양이 새겨진 지팡이를 손에 쥐어주었다.
“예?”
세마수트라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만프레드의 어깨를 두드렸다.
“지팡이를 반드시 잘 보관하게. 젊은이. 내 백성들은 이 지팡이를 쥔 자를 파라오로 모실 걸세. 뿐만 아니라 모래바람 속에 숨겨진 짐의 피라미드로 가는 안내자이자 비밀의 금고를 여는 열쇠지. 자네에게 남기는 내 유산일세.”
노왕은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이해하지 못하고 벙 쪄있는 군중을 둘러보았다.
“고맙네. 친구들. 치매 걸린 노인네의 변덕에 맞추어주어서 고맙군. 말년에 흑역사만 하나 더 만들었어. 이제 그만 가보겠네. 함께 해서 영광이었네.”
세마수트라는 완성된 주문의 시동어를 내뱉었다. 노왕의 몸에서 죽음의 신의 정수들이 가득 뿜어져 나왔다. 그의 몸과 뼈는 잿가루가 되어 공중으로 날아갔다. 숨이 끊기는 마지막 순간, 노왕의 마지막 의지를 담은 언령이 울려 퍼졌다.
- 짐의 말을 들어라! 얼어붙은 대지 속에 원통하게 잠든 망자들아. 성불하지 못하고 떠도는 원혼들아! 너희의 삶을 앗아간 자들에게 복수하자! 짐의 군대가 되어서 일어나라! 피에 굶주린 신의 종복들의 피로 포식하리라! 일어나라! 사자의 군대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