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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과 겨울의 여왕은 서로를 마주 보았으며 두 사람이 발을 딛고 있던 빙판은 하늘을 향해 솟아났다. 기사왕은 광채를 잃은 녹슨 갑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가 양손에 쥐어든 성검은 한 낮의 태양처럼 밝게 빛이 났다. 겨울의 여왕은 얼음조각을 엮어 갑옷의 형태로 자신을 보호했으며 손에 들린 얼음의 양날검에는 핏빛 기운이 가득 모여 있었다.
겨울의 여왕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기사왕을 바라보았다.
“어째서 네 가족들을 전부 죽였느냐. 그들은 언제나 너를 위해서 신들께 기도를 올려주었건만.”
씁쓸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어째서 납치해간 자들을 위하여 너를 낳아준 어미에게 적의를 드러내고 있느냐. 사랑하는 아들아.”
겨울의 여왕은 얼음 같은 손길을 아르투르의 얼굴을 향해 내뻗었지만, 아르투르는 성검을 그녀에게 겨누었다. 여왕은 깊은 비탄에 잠긴 얼굴로 손을 거두었다. 두 사람이 딛고 선 빙판은 수십여 미터 상공으로 치솟아갔다. 지름만 이십미터 정도 되는 이 빙판 위에서는 세상의 모습이 전부 눈에 들어왔다. 결투를 벌이기엔 충분한 넓이였다.
“……어찌하여 네 어미에게 칼을 겨누냔 말이다. 페르넬이 그리도 네게 잘해주었더냐.”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분은 늘 배불리 먹여주었고 좋은 잠자리를 주었으며 그들과 똑같은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소. 마지막에는 친자식들에게도 남기지 않은 유산을 남겨 주셨소.”
“아무리 좋은 것을 받았다한들 어찌 천륜을 거스르겠느냐. 금수조차 제 어미는 아낀다. 그런데 사람인 네가 그게 할 짓이더냐?”
아르투르는 짧은 순간 겨울 여왕의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했다. 허나 그것뿐이다.
“나는 인간을 노예로 잡고 그들의 고통을 산 제물로 바치는 이들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겨울 여왕은 목소리를 높여 꾸짖었다.
“그렇다면 너는 스스로를 짐승의 자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짐승의 자식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길러진 자요. 그러니 사람을 위해 싸우는 것이지. 이제 질긴 악연을 끝냅시다. 겨울 여왕.”
기사왕은 단숨에 겨울 여왕을 향해 돌격했다. 그녀는 신속하게 권능을 사용해 여러 종류의 저주를 퍼부었다. 얼어붙은 한기가 몰려와 기사왕의 행동을 굼뜨게 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세찬 바람을 불러와 단숨에 원판 바깥으로 그를 날려보내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기사왕을 감싸는 엘라카르시스의 가호는 모든 저주를 모조리 무력화했다.
“엘라카르시스! 당신이 빼앗아간 내 자식을 돌려주시오! 발타리아! 당신은 사도들에게 어미를 죽이라 가르치는가!”
타네르사는 허공을 향해 절규했지만 어떤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들려오는 것은 아르투르의 성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뿐. 아르투르를 둘러싼 공기가 얼어붙으며 다중의 얼음판을 형성해 성검을 막아내려 했으나 신성한 화염은 부딪치는 모든 것을 녹여버렸다. 다음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얼음 조각들이 날아들었지만 성검에서 뿜어져나온 빛의 보호막이 조각을 모조리 튕겨냈다
그렇지만 겨울 여왕은 조금도 멈추지 않고 양날검을 휘둘러 성검을 받아친다. 아르투르는 검을 거두어들이는 듯하다가 타네르사의 심장을 노리고 찔렀다. 타네르사는 우측으로 이동하며 안개를 흩뿌려 수많은 잔상을 만들어냈으나 신성한 권능으로 강화된 아르투르의 감각은 본체를 꿰뚫어보고 곧 바로 성검을 내리쳤다.
“이런!”
신성한 화염이 타네르사를 불태우기 직전, 그녀의 왼손에서 맺어진 백색 파동이 날아가 아르투르를 밀어냈다. 단 세 발자국이었지만 성검의 궤도를 미끄러지게 하는 일에는 충분했다. 아르투르의 일격은 얼음 갑옷을 부수었을 뿐 몸을 베지는 못했다.
“백병전으론 자신이 없으시오?”
아르투르의 도전적인 눈빛에 타네르사는 마법의 힘을 거두어들였다. 어차피 주문으로 어떻게 해보기엔 성검이 너무 강해진 상태였다. 저 성검은 최고신 발타리아의 힘이 깃든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유물로 누구도 정확히 어떤 힘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처음에는 단지 강철을 베고 상처를 치유해주는 수준이었지만 이제는 작은 태양이나 다름없는 힘을 내뿜고 있었다. 타네르사는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하. 은혜도 모르는 것. 네 재능을 누구한테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느냐?”
“스벤이란 늙은이 덕 아니겠소?”
“우리 북구인들이 왜 어머니를 공경하는지 알게 해주마!”
겨울 여왕은 위로 도약하며 공중에서 여러 바퀴 돌더니, 원심력을 이용해 거세게 얼음창을 내리쳤다. 단숨에 보호막이 깨져나갔지만 아르투르의 전투 감각은 위협을 감지하는 일을 늦추지 않고 정확한 반격을 가했다. 타네르사는 지상에 우아하게 착지해서는 양날검의 두 날을 이용해 정말로 한시도 쉴 수 없는 공격을 가해왔다.
아르투르로서도 처음 상대해보는 경지의 적이었다. 이제부턴 그동안 쌓아올린 경험과 스스로의 실력을 믿을 뿐이었다. 베고, 막고, 찌르고 받아친 후 회피하고 보호막을 끌어냈다가 신성한 불길을 내뿜었다.
겨울 여왕은 막고, 후려치고, 회피한 후 받아친 후 강타하며 얼음 조각을 날려 보냈다가 극한의 얼음을 불러내 불길에 대항했다.
냉기와 온기, 불길과 얼음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었다. 기사왕과 겨울 여왕은 공방을 주고받으며 전투의 노래를 불렀다. 타네르사가 가는 곳마다 눈보라가 몰아치며 시야가 어두워졌지만 아르투르가 갈 때마다 태양빛이 눈보라를 몰아내며 새로운 희망을 내보였다.
두 사람이 발을 디딘 원형의 빙판은 계속 하늘 높이 떠올랐으며 두 사람은 공수와 좌우를 바꿔가며 싸움을 벌였다. 평범한 이들은 눈으로 따라가기조차 어려운 몸놀림의 싸움이었다. 간단한 베기조차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한 최적의 자세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이들의 신체와 지각 능력은 이미 종적인 한계를 초월한 반신(Demi-god)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보통 이런 싸움의 결말은 인간으로 쌓아온 기예가 아닌 서로의 격과 권능을 통해 결판이 났다. 하지만 여태 승부가 나지 않는 것은 두 사람의 힘이 정확히 길항하기 때문이었다. 수십에 달하는 옛 신들은 모두 겨울 여왕에게 축복을 내린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은 오래 전에 죽었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 자들이었다. 소량의 힘 밖에 보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 세상에 남아있던 엘라카르시스의 정수는 훨씬 많은 힘을 전달할 수 있었다. 또한 기사왕이 든 성검의 정체는 발타리아의 정수였다. 발타리아는 최고신으로서 주신 서넛을 합친 것만큼 강한 자였으니 그의 축복이 내리는 힘도 다른 신들과는 크기가 달랐다.
“하! 후레자식이 검은 제법 잘 쓰는구나!”
“나보다 두 배는 넘게 살았을텐데 고작 이 정도요? 내 스승님이 살아계셨다면 당신 이상이겠군.”
“네 혀를 뽑아주마!”
세상은 두 사람의 싸움을 보았다. 전장터에 선 자들과 고향에서 기도중인 자들은 물론이고 성불하지 못한 혼령들과 저승의 신들도 자신이 응원하는 쪽이 이기길 간절히 희망했다. 피에 굶주린 옛 신들의 사도에게 맞서는 아르투르의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희망을 품었다.
혹시.
혹시나 기사왕이라면 정말로 성공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우리의 믿음이 잘못 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희망을 품자 그의 열정과 용기가 다른 사람들의 마음으로 옮겨 붙었다. 영원한 겨울이 시작된 이래 모든 문명인들은 절망 외의 다른 것을 느끼지 못했다. 단지 절망에 굴복한 자들과 절망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믿는 바를 따르다 죽기를 원한 자들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정말로 저 사람이라면.
정말로 저 기사라면.
정말로 저 왕이라면.
평생을 승리해온, 우리의 염원을 담고 있는 저분이시라면 영원한 겨울에 맞서 승리를 가져다주실지 모른다.
이 결투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기 희망이 섞은 믿음이 퍼져나갔다. 그럴수록 성검에 담긴 힘은 한층 더 강해져갔다.
“큭!”
겨울 여왕이 쥔 얼음의 양날검에 금이 갔다. 그녀는 재빨리 마술로 금이 간 이음새를 매웠으나 그 아주 잠깐에 불과한 시간조차 아르투르에겐 일방적인 공격을 가할 기회였다. 성검이 겨울 여왕의 뺨을 스쳤다. 신성한 열기가 주변을 휩쓸며 그녀에게 화상을 입혔다. 두 번째로 들어오는 타격은 도로 양날검으로 받아쳤으나 또 금이 갔다.
‘제기랄. 발타리아의 성검이 갈수록 강해지잖아.’
성검뿐만이 아니었다. 접전 시간이 길어지자 양손검의 특징과 활용법을 파악해냈다. 처음 보는 무기여서 대하는 데 조금 난처했을 뿐 공략법은 확실했다. 한 쪽 날로 공격한 뒤 다른 날을 사용하는 사이에 동작이 비었다. 상대는 실력과 마술로 그걸 보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마술은 봉쇄하고 체력을 지치게 만들면 그만이겠군.’
아르투르는 한층 강해진 성검의 힘을 전부 불꽃의 세기로 돌렸다. 이제 성검은 날에 스치기만 하더라도 사람을 태워죽일 정도의 위력을 발휘했다. 타네르사는 자신의 몸을 강화하던 모든 마력을 얼음 갑옷으로 돌려 성검의 열기에서 스스로를 지켜야했다.
“종말의 선고자시여! 제게도 힘을!”
그러나 응답은 없었고 그 사이 아르투르의 공격은 계속 되었다. 낯선 공격 방식에 익숙해진 후, 마력의 가호마저 빼버리자 아르투르는 타네르사가 어려운 적수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로 마스터 나이트보다 못한 실력이었다.
“새로운 무기를 보여줘서 고맙소. 꽤 재밌었구려.”
아르투르는 공수를 균형 있게 맞추어가다가 상대가 얼음창이 깨지지 않게 집중하는 찰나의 순간, 완전한 공세로 바꾸었다. 눈이 한번 깜짝이는 순간이면 공격을 가하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타네르사는 갈수록 궁지로 몰려 들어갔으나 아르투르는 조금의 사정도 두지 않은 채 몰아친다.
“어째서냐! 어째서 우리와 네 조상들을 저버렸느냔 말이다! 혈연은 신성한 것이다!”
“북구의 여왕이여. 내가 짊어진 게 고작 혈연으로 보이오?”
아르투르는 태산 같은 태도로 그녀를 노려다보며 칼날을 계속 내리친다. 그 때마다 타네르사는 마력과 체력을 쥐어짜내 버티고, 또 버텼다.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발악이었다.
“고작 혈연이라고 했느냐?! 내가 너를 낳았다. 안나타르! 내가 아니었으면 너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었어!”
“물론 혈연은 소중하고 귀한 거지. 나도 내 딸들과 아들들을 모두 사랑하오. 그들을 낳아준 여자들에겐 늘 고맙고 미안하지. 누군가 그들을 위협한다면 가차 없이 베어버릴 것이오. 하지만 말이오.”
쨍그랑 - !
성검과 계속 부딪치던 얼음창이 조각나 공중으로 흩어진다.
“나는 지금 혈연보다 더 귀하고 무거운 걸 짊어지고 이 자리에 왔소.”
타네르사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지탱하며 새롭게 얼음의 장검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번에 내리친 일격에 또 금이 갔고, 그녀의 오른쪽 무릎이 꿇려졌다.
“내가 짊어진 것은 이 세계. 이 세계를 이루는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이오. 내가 이 자리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삶이 사그라졌는지 아시오? 사람이 죽었고 가족이 사라졌으며 가문이 소멸했고 왕국이 멸망했소. 당신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혈족이 아닌 자들의 삶에 의미를 둘 줄 모르기 때문이오.”
아르투르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성검을 내리쳤다. 간신히 버티고 섰던 얼음의 장검이 깨져나갔다.
“그만 당신이 섬기는 신들에게 가시오. 당신의 신들도, 당신의 혈족도, 당신도 끝났고 누구도 그것들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오.”
기사왕의 성검이 겨울 여왕의 갑옷을 부수었다.
아르투르의 칼날이 타네르사의 심장을 찔렀다.
아들이 어머니를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