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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3화 (243/248)

243

아르투르는 상반신이 반쯤 잘려나간 채 바닥에 뻗어있었다. 장기들은 주인을 살리고자 마지막 힘을 다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피는 갈수록 흥건해졌다.

“네 친구가 그러는데 이 상징을 쥐고 있으면 평화의 전당으로 갈 수 있다더군. 나도 거기에 갈 수 있나?”

반쯤 잘린 아르투르는 손에 황금 십자가를 쥔 채로, 성검을 쥔 아르투르를 보며 물었다.

“당사자에게 물어보지.”

성검의 아르투르의 눈에서 푸른빛이 잠깐 뿜어져 나왔다.

“지금이라도 네 삶을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가능하다는군. 네 죄를 고백할 텐가?”

반쯤 잘린 아르투르는 피를 토하며 큭큭 웃었다.

“웃기지 말라고 해라. 난 최고의 삶을 살았어. 가지고 싶은 건 모두 가지고, 기분 나쁘게 하는 건 모두 죽였지. 거기다 최고의 전사에게 쓰러졌으니 이것 이상의 삶은 없다.”

“그렇다면 너희들의 신에게 가겠군.”

성검의 아르투르는 뒤로 돌아 두 여인이 싸우고 있는 현장으로 걸어갔다. 반쯤 잘린 아르투르는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또 다른 자신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야.”

성검의 아르투르는 고개만 살짝 돌린다. 발걸음은 멈추지 않은 채.

“넌 내 형이었다.”

“그랬던가.”

“그랬던 거지.”

“그렇군.”

반쯤 잘린 아르투르의 숨이 멎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리는 일 초도 안 되는 찰나의 순간 동안 무의식적으로 그의 명복을 빌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뒤집힌 거울상이었고 순전히 어디에서 태어났느냐로 운명이 갈렸을 뿐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 그들은 서로를 이해했고 그렇기에 한 쪽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도 이해했었다.

이제 아르투르는 다시 한 명만 남았다.

***

비슷한 시각, 용병공 만프레드는 레무리아 군을 인솔해 맘모스를 향해 돌격하고 있었다. 그는 진짜, 진짜, 진짜, 하기 싫은 작전이었지만 레오폴트의 명이라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었다.

그가 맨 처음 작전 개요를 설명했을 때, 자신은 그가 실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예? 저 거대 괴수들에게 정면 돌격하라고요? 폐하.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정신이십니까?”

자신의 대답은 매우 무례하긴 했으나 레무리아 군에 있는 모든 지휘관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어려운 일을 할 때, 누군가는 창대를 매야하는 법이다.

“만프레드. 너 많이 컸구나. 나한테 말대답도 하고?”

레오폴트는 살벌한 웃음을 지으며 용병공을 노려보았다.

“저도 이제 어엿한 공작이니까요! 생환하면 대공 작위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지요!”

하지만 용병공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르투르 폐하라면 이런 무모한 명령은 내리지 않으실 겁니다.”

“아냐. 그놈이었으면 더한 짓도 했을 상황이니까 그냥 까라면 까. 인마. 너희 군대가 어떤 스타일인진 알겠다만. 아르투르 부재 시, 혹은 유고 시 총 지휘권은 나한테 있는 거 알지? 딴 소리하면 반역이다.”

만프레드는 뻘줌하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음. 엄. 으. 그렇군요. 하지만.”

“네가 역심을 품은 것이렸다?”

레오폴트는 싱글싱글 웃으며 마검을 뽑아 만프레드의 목에 겨누었다. 피를 빨아먹으며 사는 마검을 보면서 모두가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만프레드만 빼고 말이다. 그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비명횡사를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게 말이지요. 폐하. 그게…….”

레오폴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의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흠. 용병공은 내가 작전 전체 개요를 설명해주지 않으면 끝까지 따르지 못 하겠다?”

“그렇다기보단 저도 아랫사람들에게 납득을 시켜야하는 입장이라 말입니다. 그냥 닥치고 까란다고 말을 듣는 애들이 아니라서요…….”

“아하! 그러면 네 부하들에게 이렇게 전해라. 이번 지시는 스티리아의 대왕 레오폴트 1세가 너희의 주군을 대신해서 내리는 명령이며 이에 불응할 경우 전쟁이 끝나고 영지와 가산이 박탈될 것이다. 알겠나?”

레오폴트는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너희 왕세자의 장인이란 걸 명심해라. 아르투르한테 업혀서 나한테 한번 이겼다고 기고만장한 놈들이 많나본데. 케이 정도로 아르투르와 가까우면 몰라도 니들은 이의를 제기할 위치가 아니야. 까라면 까.”

결국 만프레드는 마지못해 부하들에게 레오폴트의 명령을 전했다. 탈영을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니 다른 길은 없었다.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에잉. 왕족 놈들은 항상 건방져가지고 말이야.”

만프레드의 오랜 부관, 마일즈가 투덜대며 거들었다. 그는 흉터가 인상적인 미중년의 사내가 되어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번에 봐주지 말고 확 폐위를 해버렸어야 하는데.”

“그때 몸값이나 받고 풀어주잔 놈이 누구였더라.”

“어라, 그런 주장이 있었나요?”

아홉 왕의 군대가 원정을 시작한 이후 9할에 가까운 사망률을 보였지만 만프레드는 절반이 넘는 병력을 여태 살려서 데려오고 있었다. 특히 그가 가장 아끼는 용병대 출신 고참병들은 오히려 9할에 가까운 생존률을 자랑했다. 만프레드는 처음부터 출진할 군대를 세심하게 짰다. 몸과 정신이 모두 건강하고 강인한 자들만 선발한 것은 물론 자신의 사비를 탈탈 털어서 최고의 방한 장비들을 마련해주었다. 전투에서는 항상 작전에 앞서 부하들이 가장 많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모색했다.

“그래도 대장 덕분에 우리가 여기까지 살아있던 겁니다. 너무 침울해 하지 마십쇼. 대장은 하실만큼 하셨습니다.”

“인정해주니 고맙다.”

지금은 남작이 된 다른 용병대 간부가 만프레드를 위로했다. 점차 맘모스들의 대열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장난기 가득하던 만프레드의 표정에 웃음기가 싹 가셨다. 그는 휘하의 장병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제군들! 다들 몸조심해라! 이번 전투만 끝나면 돌아갈 수 있다. 다들 몸조심하고 살아서 보자. 져도 끝장이지만 이겼는데 죽어도 말짱 꽝이야. 용맹함을 떨칠 생각하지 말고 영리하게 싸워라. 살아남으면서 이길 방법을 찾아. 그게 진짜 용병이다. 모두 영리하게 돌격!”

“용병공 만프레드 만세!”

다른 기사들은 맘모스의 무지막지한 발굽을 향해 정면으로 돌격했지만 만프레드의 군단은 양 옆으로 갈라지며 가지고 온 투사 무기를 쏘아내고 갈고리를 던져 맘모스들의 행동을 제약하며 싸웠다. 이곳에 모인 원정대원 중 아직 생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은 유일한 자들이 바로 용병공과 그의 봉신들이었다. 남들이 처절한 방식으로 싸워가는 동안 만프레드의 군대는 영악하고 치사하고 더럽게 싸웠다.

수많은 기사들이 대의를 위하여 쓰러져간다.

명예를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

신앙을 위하여.

충의를 위하여.

수많은 기사들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위해 싸우다 죽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맹세를 지키다 전장에서의 죽는 것이야말로 기사가 선망해 마땅한 것!

그러나 금괴 기사들은 달랐다. 그들은. 반드시 살아남고자 했다. 만프레드가 말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었다.

- 제군들. 죽음은 외롭고 아픈거다. 자랑스러운 죽음 따위는 믿지 마라. 최고의 죽음은 침상에서 울상이 된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면서 죽거나, 벽난로 앞에서 손자 손녀들에게 옛 이야기를 들려주다가 잠드는 거다. -

용병 출신 기사들은 만프레드의 말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었고 멸망이 다가온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날, 연합군은 노왕이 자신의 생명을 다한 주문을 완성시킬 때까지 맘모스들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때가 되고 나서도 만프레드와 그의 측근들은 대부분 목숨을 건지는데 성공했다.

***

시구르드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보며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할머니 모두 일찍이 본 적 없는 수준의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힐데군드는 화산의 힘이 깃든 대검을 예술적인 실력으로 휘둘렀다. 대검을 아래로 내리치자마자 위로 올려치고 허리에 힘을 실어, 오른쪽에서 나아가 가로로 크게 벤 후, 이번에는 왼편에서 베었다.

“대단하구나. 이건 완전히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수준이로군.”

타네르사는 웃음을 흘리며 양날검을 꽉 쥐었다. 그녀의 얼음으로 된 양날검은 지팡이처럼 긴 막대의 형태였으나 끝자락에 각각 거대한 날이 붙어있는 형태였다. 힐데군드의 맹공이 이어질 때, 그녀는 자신의 양날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현란하게 회전시키며 공격과 방어를 동시에 수행했다. 한쪽 날이 힐데군드의 일격을 막아내면 반대편 날은 동시에 상대를 위협했다.

“이런 특이한 무기를 숨겨두셨네? 나한테는 검과 방패를 다루는 방법만 가르쳐줘놓고 말야.”

“네가 배신할 지도 모르니 비장의 한 수 정도는 숨겨둬야 할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내 생각이 맞은 걸 보니 기쁘구나!”

힐데군드는 잽싸게 위로 뛰어서 다리를 노린 공격을 막아낸 후, 떨어지는 힘을 더해 대검을 내리쳤다. 대검이 거세게 타오르는 모습을 본 타네르사는 위험을 느꼈다. 따라서 공격을 받아치는 대신 왼손에 머금은 바람의 힘으로 자신을 뒤로 밀어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있던 자리에 화산의 대검이 내리쳐졌다.

콰아아앙 - !

화염의 힘을 머금은 폭발이 일어나며 불길이 솟아올랐다. 얼어붙어있던 강의 표면에 원형의 큰 구멍이 생겨났으며 그곳에서 혹한의 물줄기들이 용솟음쳤다. 타네르사는 겨울의 바람으로 자신을 감싸 폭발 장소에서 거리를 벌린 뒤였다. 화산의 검이 일으킨 불길과 구멍난 빙판에서 치솟는 물길이 시야를 제한했으나, 그녀는 뚫어져라 연기 속을 쳐다보았다.

“!”

연기 속에서 자신을 향한 적의가 날아드는 걸 느낀 타네르사는 왼손에 일렁이는 겨울의 힘을 쏘아보냈다. 높이 도약해서 다가오던 힐데군드는 날아든 얼음 조각에 몸 곳곳을 꿰뚫리고 뒤이은 강풍에 맞아 뒤로 멀찍이 나가 떨어져 강물에 빠졌다. 힐데군드는 고통과 한기로 인해 순간 정신을 놓칠 뻔했으나, 무수한 죽음의 위기를 거치며 형성된 그녀의 감각이 가까스로 정신을 놓는 걸 막아 세웠다.

그녀는 얼어붙은 물속을 헤엄쳤다. 매 순간마다 서릿발이 전신을 파고들었으나, 그녀는 기어이 손으로 빙판을 잡고 수면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흐억. 흐억. 흐억.”

힐데군드가 땅을 짚고 강물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거센 힘이 그녀의 손아귀를 짓밟았다. 타네르사의 시선이 힐데군드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하. 칼싸움하다 말고 마법부터 날리다니. 이거 완전 비겁한 것 같은데.”

타네르사는 비릿한 표정으로 지으며 그녀를 비웃었다.

“문명인들의 법칙에 물들었구나. 내가 이기면 전부라고 가르치지 않았더냐?”

“맞다. 그랬지. 나도 그놈들 싸움 방식에 좀 물들었나봐.”

힐데군드는 근심 한 점 없는 표정으로 깔깔 웃었다. 그녀가 공포에 떠는 모습을 보고 싶던 타네르사는 기분이 나빠져 그녀의 머리채를 붙잡고 끌어내 빙판에 내동댕이쳤다. 힐데군드는 발길질을 하고 주먹질을 날려봤지만 모두 무위로 돌아갔고 얼음 조각이 힐데군드의 양 손바닥과 발목에 내리꽂혀 움직일 수 없도록 고정시켰다.

“넌 곱게 죽진 못 할 거다. 배교자여. 우선 네 사지를 찢어 내 가족들의 죽음에 대한 대가부터 받아내겠다.”

데구르르르 -

무엇인가가 굴러와 타네르사의 뒷무릎에 닿았다.

십대 후반쯤 되어보이는 소년과 소녀의 얼굴이었다. 날씨가 워낙 추워 죽은 당시의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는데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다.

“그 대가는 나한테 받아내셔야지. 당신 가족은 내가 다 죽였으니까.”

기사왕은 태양처럼 빛나는 성검을 들고 겨울의 여왕을 향해 걸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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