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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2화 (24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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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본 혈족의 전사들은 아르투르를 둥글게 감싸며 포위했다. 아르투르가 적들의 발걸음과 자세를 통해 살펴보니 놈들은 한두 번 몰이사냥을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같은 혈족답게 싸움과 사냥을 늘 함께 해온 모양이었다.

‘단합력은 괜찮군. 실력도 어디 한 번 볼까.’

아르투르는 탐색전으로 전면에 있는 적에게 가볍게 검을 찔렀다. 상대는 방패를 들어서 막아냈다. 비록 크게 금이 가기는 했지만 성검에 방패가 꿰뚫려 목이 달아나는 사태는 없었다. 그들에겐 다행히도 겨울의 가호가 그들의 무장을 강화시켜준 덕이었다.

“너는 우리의 축복을 받고 태어나지 않았느냐! 배교도! 배신자!”

나이 많은 북구 전사가 소리치며 도끼를 내리쳤다. 아르투르는 가볍게 도끼를 흘린 뒤 빈 틈으로 눈을 찔렀다. 다음 일격을 위해 깊게 찌르지 않고 빼낸다.

“나, 나는 네 삼촌이다. 패륜아…….”

“내 삼촌은 강철의 대공 페르디난트다. 야만인.”

아르투르는 성검을 빼낸 다음 후방에서 날아드는 무기를 정면으로 후려쳤다. 공격자는 비교적 작은 체구의 여전사였는데 그녀는 아르투르의 힘을 고스란히 받아서 뒤로 수 미터 나가떨어져서 빙판에 머리를 찧었다. 앞뒤좌우상하에서 자신을 향한 공격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현란한 발걸음과 손목돌림을 이용해 완벽한 각도로 잇달아 날아드는 공격들을 차례대로 쳐냈다. 태양빛을 내는 성검이었기에 흡사 광채가 아르투르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체는 단지 검을 빠르게 휘두르는 것에 불과했지만.

“왜 우리를 배신한 것이냐!”

“당신들이 피에 굶주린 신들에 빌붙어 먼저 인간들을 배신했잖소.”

아르투르는 냉정하게 답하며 달려드는 적들을 차례로 죽였다. 그가 판단하기에 피만 이어진 친척들은 신체 조건이나 순수한 전투 감각에서는 자신에게 크게 떨어지는 것이 없었다. 하지만 경험과 기술이 너무 부족했다. 고립된 곳에서 그들만의 전투 방식만을 반복하다보니 자연스레 몇 가지 동작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덕분에 빈틈이 너무 많았다.

마스터 나이트 바야르는 늘 세계 각지의 검술서를 입수하고 사범들을 만나는 데 전념했었다. 많은 기사들은 이미 기사들의 정점인 바야르가 왜 이국의 조잡해보이는 검술에 관심을 지니는 지 이해하지 못했다. 바야르는 그때마다 정통 검술의 달인이 된 이후에는 반드시 스스로가 처음 배운 색채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달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해서 아무도 마스터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지. 소드마스터들이나 왕실기사들조차 그분의 기준에선 달인조차 아니었던지, 그들이 조언을 청하면 항상 기본에 충실하란 말만 했던 분이시니까.’

이제 마스터가 남겼던 모든 말이 이해가 되었다. 자신의 사촌쯤 되어 보이는 건장한 전사가 양손 도끼를 위압적으로 내리쳤다. 북구인들은 늘 공격적인 전술을 택하며 그들에게 내려오는 무기술들도 굉장히 공격이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강자를 숭상하는 북구의 문화는 자신보다 신체 조건이 좋은 자를 보면 가능한 한 양보를 할 것을 가르친다. 그것이 서로가 사는 길이기에 자신보다 강한 자에게 무릎을 꿇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에 북구에서 싸움이 벌어진다면 세력이나 싸움 실력이 비슷하다고 평가되는 이들 사이에만 벌어진다. 이런 싸움을 길게 끌면 탈진에 이르거나 부상을 입는 건 필연이고, 그렇다면 상대를 이기더라도 북구의 혹독한 환경에서 생존을 보장받기는 힘들다. 즉, 싫건 좋건 전투가 벌어지면 최대한 빨리 끝내야하는 입장인 것이다.

‘지금처럼 방어를 도외시한 공격만을 계속해온단 말이지. 어차피 상대도 똑같은 처지인 걸 아니까. 북구인 간의 싸움에서 승자란 누가 더 빠르고 정확하고, 위력적으로 치느냐에 달려있는 게 되는 거지.’

아르투르는 가볍게 흘려내며 상대의 숨을 흐트러뜨리고 약점이 더 많이 노출되길 기다렸다. 북구인들은 다른 문화권들과도 굉장히 싸움을 오래해온 자들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전술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인종들보다 실제로 강하고 빨랐기에 전술을 바꿀 이유가 전혀 없던 까닭이다.

‘하지만 말이야. 너희들보다 빠르고 강하게 칠 수 있는 상대를 만나면 공격에만 의존하는 건 죽는 길이지. 지금처럼.’

삼촌을 죽였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 방어의 틈새를 파고들어 간단한 찌르기로 사촌을 죽였다. 이렇게 둘이나 죽고 나니 다른 혈족들은 공세를 느슨하게 만든 후 수비를 가다듬었다. 윈터본 혈족들은 분명히 타고난 싸움꾼들이었고 엄청난 전투 경험이 쌓인 자들이었다. 그들의 본능과 감각이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는 일과 새로운 싸움법을 도출해내는데 전념하고 있을 터이다.

지금이 가장 죽이기 좋은 때였다.

아르투르는 자신과 눈매를 닮은 청년의 상체를 향해 성검을 내리쳤다. 북부인들이 열세에 몰리면 항상 방패에 의존했고 청년도 그렇게 했다. 아랫배가 비었다. 힐데군드를 몰아붙이던 타네르사의 절규에 가까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나타르! 그 애는 네 조카다!”

그러나 성검은 가차 없이 조카의 배를 꿰뚫었다. 상대의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배에선 장기가 흘러나온다. 아르투르는 조카를 가만히 바라봤다. 체격이 크고 남자다우며 잘생긴 근육질의 청년 전사라. 세상 어디가나 남편이자 사위로 환영받을 인재가 가 아닌가.

칼날은 쉬지 않는다. 다음엔 나이 많은 여전사의 목을 베었다. 허망한 표정을 지으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머리의 정체는 숙모일까 아니면 누이나 사촌일까? 힐데군드에게 듣기로 북구인들은 근친상간도 흔하다고 했으니 둘 다일지도 몰랐다.

‘아무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아르투르가 한 무리의 윈터본 혈족들을 차례로 죽이는 사이, 군나르를 비롯한 왕실 기사들도 다른 무리의 윈터본 혈족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들 사이엔 우열을 가리기 힘든 박빙의 싸움이었다. 양측의 기량도 길항했고 필사적인 건 마찬가지였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전멸하다시피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남은 건 단 두 사람, 기사단장 군나르와 아르투르를 꼭 빼닮은 적발의 중년뿐이었다.

“제법이군. 배교도.”

“너야말로. 이교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칼날을 교차해서 휘두르며 스쳐지나갔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흘렀다.

군나르는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적발의 아르투르는 쓰러진 군나르를 향해 다가갔다.

“약해서 도망친 자들과 다르게 너흰 훌륭한 전사들이더군. 왜 배신했나? 강자가 살기엔 이쪽이 훨씬 좋을텐데.”

담담하게 묻는 붉은머리의 아르투르.

“평화를 원했으니까.”

“얻었나?”

“지상에서의 삶은 속죄의 연속이었다. 우리가 짓지 않은 죄가 없었기 때문이지.”

적발의 아르투르는 눈살을 찌푸렸다.

“병신 짓을 했군. 그럴거면 이쪽에서 실컷 즐기다가지 그랬냐.”

하지만 군나르는 씩 웃어보였다.

“나는 이제 영원한 평화의 전당으로 간다. 너희는 사후에 신들을 만날 것을 두려워하며 산 제물을 바쳐야하지만, 우리는 온전히 우리의 신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사랑해주셨다. 그분이 우릴 향해 손을 내뻗으신다.”

“죽고 나서 만나는 신이 다 무슨 소용이냐? 북구의 신은 살아서 만날 수 있는데.”

적발의 아르투르는 갸웃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군나르에겐 대답이 없었다. 그는 군나르의 눈을 감겨주다가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보았다. 북구의 전사는 충동적으로 손을 내뻗어 십자가 목걸이를 쥐어뜯어,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적발의 아르투르는 진짜 아르투르가 자기 친척과 형제자매들을 학살하는 광경을 바라봤다.

‘어머니의 자리를 물려받을 경쟁자가 줄어드는군. 다음으로 신들의 축복을 받는 자는 내가 될 수 있겠어.’

적발의 아르투르는 일찍 가서 친족들을 도울 수 있었음에도 설렁설렁 걸어갔다. 그가 도착했을 때 금발의 아르투르는 한 가녀린 소녀의 앞에 서있는 중이었다. 그녀의 발치에 떨어진 피 묻은 장검과 허리춤에 주렁주렁 달린 작은 해골들은 전혀 가녀려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위대한 오라버니. 살려주세요. 저는 오라버니한테 칼을 들이민 적도 없었어요. 저흰 가족이잖아요? 문명인들은 가족을 죽이지 않는다면서요. 제가 얼마나 탐나게 자랐는지 보세요. 건강하고 강한 아들을 여럿 낳아드릴 수 있어요. 제발.”

눈처럼 새하얗고 아름다운 북구인 소녀는 간절한 눈빛을 금발의 아르투르에게 보냈다. 노골적인 유혹이 담긴 시선과 순수해 보이는 눈물이 흘렀지만 아르투르는 초점을 흐리지 않은 채 그녀를 살펴보았다. 여러 정보가 엿보였다. 북구인 사제들이 쓰는 붉은 서클릿. 허리춤에 찬 의식용 단검. 무엇보다 성인의 것이라기엔 너무 조그마한 해골이 눈에 걸렸다.

“그 해골은 뭐지?”

“아. 이거요?”

여동생은 세상 물정 모르는 듯 밝게 웃어보였다.

“아, 이거요? 아버지랑 다른 오라버니들한테 받은 선물이에요. 저희 혈족 관습에선 아이를 낳아달라고 부탁할 때 자기가 죽인 강한 적들의 머리를 가져오거든요. 그러면 여자가 그들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머리를 많이 가져온 남자와 동침을 해서 강력한 전사를 낳죠. 그래야 혈족이 살아남으니까요. 저희 관습 같은 거에요.”

소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경험이 부족한 자라면 그저 무지한 야만인 부족 사이에서 자라며 무엇이 잘못인지도 배우지 못한 순수함으로 보일 수 있을 법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대국의 왕으로만 십 오년을 살았다. 수천 건의 재판을 진행했고 그 중 사형선고를 내린 경우만 백 건이 넘었다.

범인들은 늘 티가 났다.

“틀렸다. 너는 네 전리품으로 잡혀온 문명인 아이들을 할당받았을 거야. 그들을 어떻게 다룰지는 전적으로 네게 달린 일이었겠지. 먹여 키울 이유는 없고 그렇다고 굶어죽이긴 뭔가 아까웠겠지. 그래서 너는 그들을 너희의 신들에게 바치기로 했다.”

소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오, 오라버니. 제발. 몰라서 그런 거에요. 저를 동생으로 데려가서 문명인으로 교육시켜주시면 달라질 거에요. 아, 아니면 부인으로 데려가세요. 아니다. 당연히 오라버니 같은 위대한 전사면 부인이 있으시겠죠. 첩이 좋겠네요. 그것도 안돼요? 알았어요. 노예라도 좋으니 제발…….”

차례로 자신의 지위를 낮추어도 변하는 게 없자 소녀는 아예 싹싹 엎드려 목숨만 살려달라고 빌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잠시 마음이 흔들렸으나 어린 아이들의 해골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이는 열여섯에서 스물 사이. 이미 세상 물정을 알 만큼 알 나이였다. 저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줄 알 정도라면 심성을 바꾸는 건 불가능해 보이는 나이다.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죽인 아이들도 살고 싶었을거야.”

아르투르의 군홧발이 소녀의 목을 짓눌렀다.

“아. 안돼요!!!”

우드득 -

소녀의 비명이 멎자 적발의 아르투르가 인기척을 드러냈다.

“네 동생이 죽는 데 지켜보고만 있더군. 왜 그랬지?”

금발의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려 또 다른 상의 자신을 마주했다. 체모가 붉은색이고 차림새가 훨씬 지저분하며 흉터의 모양이 조금 다르다는 걸 빼면 자신의 분신과 같은 사내였다. 키, 체형, 연령, 얼굴 생김새가 판박이였다.

“오히려 내가 묻겠다. 왜 죽였나? 딱 봐도 미인으로 클 상에 엉덩이도 커서 아이도 잘 낳겠던데. 살려두는 편이 누가 이기든 좋았지 않겠나?”

아르투르는 거울 속에 비친 것과 같은 자신을 보며 끔찍한 혐오감이 들었다.

“안되겠다. 결심이 섰어.”

“뭐가 말이냐?”

“내 친족이란 놈들 말이야. 아이들만 남기고 세상에서 다 치워버려야겠다. 그렇게 너흴 잊어버려야 내가 좀 편히 잘 수 있을 것 같아.”

“흥. 가족끼리 뒹구는 짐승 같은 삶이라도 제 뿌리를 부정하는 근본 없는 삶보단 낫지.”

두 명의 아르투르가 서로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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