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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1화 (24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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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의 기운이 가득 담긴 저주가 검붉은 빛으로 변해 힐데군드에게 날아갔다. 저주를 피할 수는 없었으나 힐데군드 역시 한때는 사제였기에 나름대로 파훼법을 준비해두었다. 그녀는 의기양양하게 품속에서 장식물이 주렁주렁 담긴 목걸이를 내밀었다.

“뭐, 뭐냐, 저 근본 없는 물건은?”

목걸이를 본 대제사장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발타리아의 상징인 십자가나 엘라카르시스의 붉은 용 상징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종교적 상징물들이 걸려있었다. 각 장신구는 형태도, 묘사하는 것도 다 달랐다. 개, 말, 소, 닭과 같은 짐승류도 있었고 세모, 네모, 동그라미, 피라미드 같은 기하학적 문양도 있었고 인간의 형태를 띠고 특정 신을 묘사하고 있는 장신구들도 있었다. 단 하나, 그녀가 섬기던 옛 신들의 대한 상징물만 없었다.

신의 상징물을 몸에 지니는 것은 당신을 섬길 테니 나를 지켜달라는 일종의 청원이었다. 즉, 지금 그녀가 내민 목걸이의 의미는 신학적으로 해석해보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 아무 신들이나 해악으로부터 날 좀 보호해주시오! 그러면 섬기겠소! -

물론 이 따위 불경한 기도를 들어주는 신령은 하나도 없다. 용의 형상을 가졌던 주신들은 물론이고 조그마한 지역 사회의 수호령조차 저런 성의 없는 청원에는 답하지 않는다.

태에엥 -!

그런데 목걸이가 힘을 내뿜었다. 타네르사의 저주가 닿았어도 힐데군드는 상처 한 점 입지 않은 채 멀뚱히 서 있었다. 수십 종의 신령들이 소량의 힘을 보내주었고 그것이 합쳐지자 강한 가호가 내려진 것이다. 정말 성의 없는 기도에 그들이 응한 것이다.

“어라. 이게 진짜 통하네.

타네르사는 기가 막혀 힐데군드를 바라봤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나도 통할 줄은 몰랐는데…… 문명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는 신들이 다급해진 게 맞나봐. 하긴 평소에 제사밥 받아먹은 몫이 얼만데 이 정도 일은 해줘야 염치가 있는 거지.”

대제사장은 이를 빠득 갈며 증오에 찬 시선으로 힐데군드를 노려봤다.

“힐데군드. 정말 불경한 말만 하는군. 너는 쉽게 죽지 못할 거다. 배교자여. 너는 신들의 은총을 받으며 태어났다. 내가 너를 기르고 가르치고 보호해주었지. 그런데 감히 신들과 나를 배신하고 발타리아의 편에 서? 배신자 같으니라고!”

힐데군드는 머쓱한 태도로 볼을 긁적였다.

“그건 미안하게 되었지만…… 나는 당신이 가르친 대로 내 편에 섰을 뿐인걸. 원하는 대로 살면서 방해하는 자가 나오면 대가리를 쪼개라면서. 이젠 당신과 신들이 내 삶에 방해가 되더라고. 그러니 좀 죽어줘.”

타네르사가 입김을 내뱉자 주변 공기의 온도가 급속히 내려가며 얼음 조각들이 만들어졌다. 대제사장의 손짓에 얼음조각들이 한군데 뭉쳐서 매서운 양날검을 만들어냈고 그녀의 손에 딱 맞게 쥐어졌다.

“배신자에게 어울리는 최후는 하나지. 너를 산 채로 포를 뜬 다음 네 비명을 신들께서 들으실 수 있도록 해주겠다. 네 영혼은 명계로 끌려가서 영원히 불타오를 것이고 조각난 시체는 짐승들의 먹잇감이 될 테지. 신성한 직분을 저버린 자에 대한 최후가 될 거다.”

타네르사는 자신의 말을 상상하며 짜릿한 흥분에 몸을 떨었고, 힐데군드는 살짝 노한 어조였지만 아직까진 참고 있었다.

“잠깐만. 타네르사. 이 문제를 그렇게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좀 억울하지. 당신 아들도 반대편에 섰잖아. 싸울 땐 좀 싸우더라도 악감정 만들 필요는 없잖아. 내가 당신 손자도 낳아줬는데 그냥 깔끔하게 목만 쳐내고 끝내자고.”

힐데군드의 말은 타네르사의 화를 더욱 돋군 듯 했다. 그녀가 얼음검을 휘두르자 수십 조각의 파편들이 힐데군드에게 쏟아졌다.

“감히 나와 말장난을 하겠다고?! 너는 내 아들에게 스스로가 누구이고 옳은 길이 어디인지 인도해주라고 보냈다! 네놈이 의무를 내팽개치는 바람에 저 꼴이 된 거 아니냐! 네 생간을 산채로 씹어 먹어주마!”

힐데군드는 자신이 들고 있는 대검에 담긴 화산의 힘을 방출시켰고 불의 장막이 나타나 날아드는 얼음 조각들을 모조리 녹여버렸다. 장막이 걷히자 힐데군드의 험악하게 일그러진 표정이 드러났다.

“하. 아들 뺏긴 느낌이라 기분 더럽다는 건 알아서 좀 봐줬는데. 이젠 더 이상 못 참겠다. 시어머니. 당신을 토막 내서 죽여 드릴게.”

힐데군드가 쥔 대검이 화염을 내뿜었다.

***

“노왕은 섬기지 않는다! 노왕은 지배한다!”

“물러서는 놈은 내게 죽는다! 돌격!”

기사왕이 가족 문제를 해결하러 간 사이, 문명인들의 군대를 지휘하는 왕은 노왕(Old king)과 패왕 레오폴트였다. 두 사람은 일신의 무용과 지휘력, 친위군단 모두 연합군의 중핵을 맡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각각 우측과 좌측을 도맡아 적들의 중부를 강타했다. 낫전차와 기사 전력을 앞세운 두 사람의 공세는 성공적으로 북부인들을 분단시켰다. 두 사람은 적진의 한 가운데에서 만났다.

“짐은 지금까지 오백하고 마흔 넷을 죽였다네.

노왕은 미라 기수가 미라 말을 모는 미라 전차를 탄 채 계속 창과 활로 번갈아 공격하며, 전차의 바퀴에 달린 낫으로 북구인 보병대를 쓸어담았다.

“할배. 양심적으로 전차에 달린 낫은 빼고 셉시다.”

미라처럼 삭아버린 노왕은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턱뼈가 흔들려 보는 이로 하여금 불안감을 주는 웃음이었다.

“으하하하! 억울하면 자네도 좀 좋은 걸 타게. 저기 젊은 친구 덕왕은 호랑이를 타고, 현왕은 히포그리프를 타잖나. 남은 왕 중에서 말 탄 찐따는 자네 밖에 없어!”

레오폴트는 기분이 나빠져 자신의 군마를 움직여 쓰러진 북구인의 머리를 짓밟아버렸다. 육중한 군마의 발굽에 두개골이 박살나며 그로테스크한 광경이 펼쳐진다.

“에이씨. 당신들 가운데 혈통이 고대의 누군가로 이어지지 않는 사람이 없잖소. 나도 금수저가 아니라 신수저를 물고 태어났어야 되는데. 평범한 인간 집안에 태어나서 문제라니까.”

노왕은 창을 들어 날아다니는 짐승들을 모조리 쏘아 맞추었다. 맞으면 반드시 급소를 맞추어서 일격에 절명을 시키는 치명적인 공격이었다. 기사왕의 활약에 가려진 면이 있지만 아르투르의 부름에 응했던 아홉 왕들은 모두 서사시의 주인공이 될 만한 초인적인 영웅들이었다.

“이제 자네와 나의 -격- 차이를 알겠는가? 애송이. 그걸 받아들였다면 무릎을 꿇고 노왕의 지배를 인정하게. 그리 한다면 내 자네에게만 이 노왕의 진정한 이름을 가르쳐주도록 하지.”

레오폴트는 무심히 피를 머금은 마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세모꼴의 핏빛 파동이 일어나 달려오던 다이어 울프들을 한꺼번에 찢어버렸다.

“관심 없수다. 할배. 틀니나 잘 끼고 다니쇼.”

“알겠다. 드디어 그대도 짐의 위대함을 인정하는군! 노왕의 진짜 이름은 위대하신 대왕이며 왕중왕인 세마수트라 1세일세. 그분의 이름을 알게 된 외국의 제왕은 그대가 처음이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네.”

레오폴트는 혀를 찼다.

“카마수트라 1세요? 노땅이 이름만 야해서 뭐합니까?”

“아아-니. 이런 고오얀-”

두 제왕은 농담 같은 진담을 주고받으며 북구인들을 쓸어버렸다. 다른 제왕들도 적들을 휩쓸었기에 승기는 명확해보였다. 이미 아직까지 살아남은 최후의 전사들은 일당백이라는 칭호를 실현할 수 있는 최강의 군단이었다. 평생 싸움을 반복해온 북구인들이었지만 그들이 배운 전술과 전투 경험은 한정적이었다. 반면 원정대는 이미 온갖 전술전략에 능통한 진정한 프로 전사들이었다.

그나마 지금껏 싸움을 대등하게 유지해온 것은 눈보라의 존재 덕이었는데 겨울의 힘이 약해진 지금은 일방적인 학살극이 벌어질 뿐이었다. 모두가 승리를 확신하며 몰아붙이던 순간, 지상에 거대한 그림자들이 나타나며 지축이 울렸다. 발루아누스는 황급히 레오폴트의 곁으로 말을 몰아왔다.

“레오폴트 숙부! 저놈, 저놈입니다! 우리 군대를 일격에 와해시킨 놈들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지평선으로 향했다. 집채만한, 아니 평범한 성벽만한 네 발 짐승들이었다. 야수들의 생김새는 코끼리와 비슷했으나 더욱 크고 흉폭했다. 가장 차가운 극지에서만 산다는 생물체, 맘모스인 모양이었다. 저 극지의 거체들이 나타나자 북구인들은 승리의 함성을 질렀다.

“새어 보죠. 사십 마리정도 되는군요. 저 거체들이 돌격해오면 평범한 칼이나 창으론 상처도 못 낼 테죠. 화살로 죽이는 건 농담도 못 되겠네요. 공성 병기로 쏘아 맞추거나 눈가를 노려야하겠는데. 공성 병기는 없고, 바람은 거세서 원하는 곳을 맞추긴 힘들 겁니다. 저희들이 어떻게 해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한 자리 수일 때 이야기죠.”

레오폴트는 짧은 순간에 적들을 쓱 살펴본 후 판단을 마쳤다.

“이건 못 버팁니다. 퇴각이 답이네요.”

어느 사이 레오폴트를 주변으로 모여든 왕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병력을 추스러 후퇴하기엔 싸움이 너무 격화된 상태였다. 물론 레오폴트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답이 없다는 말을 돌려한 것이리라.

“흠.”

파라오가 남지도 않은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노왕에게 방법이 있기는 하다네. 그는 고대 영웅들의 후계자이고 많은 비밀스런 지식들을 알고 있지. 그는 대사막의 지배자이자…….”

레오폴트가 중간에 말을 끊고 들어왔다.

“할배. 지금은 똑바로 말합시다.”

“끄응. 간단히 말해 그에겐 삶과 죽음을 넘나들 수 있는 권능이 조금 있다네. 지금 기사왕의 몸에 생명의 여신의 정수가 깃들어있는 것처럼 죽음의 신의 정수가 흐르거든. 그의 가계도를 26대를 올라가면 죽음의 신이 나오기 때문일세. 이제 얼마나 그의 혈통이 위대한 것인지 알겠나?”

“뭬요? 그렇게 좋은 게 있으면 왜 여태 안 쓴거요?”

이번에 레오폴트의 질문에 답한 건 현왕이었다.

“종말의 신을 상대하기 위해서 남겨두신 거지요. 인간이 한번 신의 힘을 사용하면 다시 채울 수 없을테니까요. 게다가 200살이 넘은 노왕의 연세를 생각하면 신의 권능이 빠져나가면 더 이상 살 수 없을 겁니다.”

노왕은 웃는다.

“이래서 눈치가 빠른 아이는 싫다니까. 권능을 방출하는 순간 이미 한참 전에 수명이 지난 나는 잿가루가 되어 사라질걸세. 내 마지막 일격이 되는 거지.”

레오폴트는 재빨리 상황을 이해했다. 아르투르를 제외하면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건 노왕뿐. 그리고 신을 상대할 수 있는 건 같은 신의 힘뿐이다.

“……잔챙이들 잡느라 우리의 최종적인 적을 잊고 있었군요. 그놈이 자기 수하들이 개박살이 나도록 나타나지 않은 건 이유가 있겠지요. 할배가 지닌 힘 때문일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사용하지 마십시오. 우리 전부가 죽더라도 당신과 아르투르만 살면 승산은 있습니다.”

노왕은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닐세. 정말로 그렇게 두 사람만 남는다면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의미가 없어. 돌아가서 문명을 재건할 사람이 남지 않을 거거든. 우리가 서로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온 것은 문명의 보존이라는 사명과 기사왕의 빛이 보여준 일말의 희망 때문일세. 희망 없이 우리는 버틸 수 없어. 그러니 나의 권능을 지금 사용하겠네.”

레오폴트의 냉철하던 가슴에 뭉클함이 전해져왔다. 아. 이것이 연륜인가. 살아 돌아가면 반드시 노왕을 기리고 모셔야겠다.

“자. 그러니 전원 돌격해서 저놈들을 막게.”

“네? 권능을 사용하신다면서요?”

노왕은 큼, 큼. 하고 목청을 가다듬었다.

“자네 기사도 소설도 안 읽어봤나? 강력한 주문은 사용 시간이 오래 걸린다네. 등장인물 간의 형평성을 맞추기 위한 조치지.”

“뭐요? 그럼 처음이랑 변한 게 하나도 없잖소?!”

노왕은 껄껄 웃었다.

“아니지. 그 전에는 돌격하고 죽는 결말 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특정 시간을 버티면 살아남는 걸세. 힘내게. 레오폴트 군!”

레오폴트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씨발. 연륜은 개뿔. 돌아가면 저 나라는 침공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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