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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40화 (24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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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탄생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게 된 아르투르의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하나였다.

‘아버지는 왜 나를 죽이지 않았는가?’

깨어진 방벽을 어깨로 밀면서 앞을 향해 전진했다. 이따금 얼음 조각이 갑옷을 뚫고 들어왔지만, 두라노 인들이 모든 정성을 다해 만든 갑옷은 마법의 얼음조각조차 뚫어내지 못한 채 잔상처만 입혔다.

‘페르넬 대왕은 나를 왜 아들로 인정해주었는가?’

어린 시절의 기억이 아르투르를 스쳐지나갔다. 대영주들이 사생아를 두는 일은 아주 흔했지만 사생아를 친자식들과 함께 기르는 길은 관습에 어긋나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침략자의 자식이었기에 자신은 항상 대왕의 흠으로 남았다. 철없던 시절에는 그 점을 원망했지만 자신은 유례가 없는 특혜를 누린 것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왜 자신의 진짜 아들들과 함께 교육을 받게 해주었던 것인가?’

대제후의 자녀들과 비교해도 모자랄 것 없는 삶이었다. 왕족은 아닐지 언정 왕족들을 친족으로 두고 그들과 함께 음식과 놀이를 즐겼고 똑같은 교육을 제공받았으며 무엇보다 그들의 사고방식을 곁에서 배울 수 있었다. 물려받은 것 하나 없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빛나는 삶을 움켜쥘 기회는 대왕의 배려에서 나왔다.

‘북구인 포로가 남긴 아기에게 왕족의 삶을 제공해주려면 왕의 아들이라는 명분이 아니면 불가능했겠군.’

스벤도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 사내는 지금 각기 다른 이유로 분노하고 있었다. 일체의 양보나 타협은 있을 수 없었다. 단지 힘이 승자를 결정할 뿐이다. 그것이 북구인들의 방식이며 전사들의 방식이다.

‘그렇다면 페르넬 대왕은 왜 내게 왕족의 삶을 제공해주려고 했을까?’

두 사람의 칼날이 한 차례 부딪쳤다. 스벤이 자신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으나 전혀 들리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자신의 본능과 경험에 싸움을 맡겨둔 채 모든 사고를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 집중시켰다.

‘페르넬 대왕은 평생을 기사도에 근간한 평화를 꿈꾸던 이상주의자였다.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정복 전쟁을 시작했지만 그 길이 마냥 아름답지는 않았겠지. 젊은 시절의 무모한 확신은 사라지고 자신의 이상에 대한 의심이 찾아왔겠지.’

자신도 수없이 걸어왔던 피의 길이었다. 폭력성을 타고난 자신에게도 견디기 버거운 일이었다면 고고한 기사도를 쫓던 페르넬에게는 더욱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매번 승리할지언정 가슴은 공허해지고, 평화의 확립이라는 대의에서 이익 사업이 되어버린 전쟁을 보며 깊은 절망을 느꼈으리란 걸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런 감수성의 소유자라면 북구인들과의 전쟁은 가혹했을 거야. 서로 일말의 자비도 베풀지 않으며 극한의 폭력과 잔인함만을 내보였다고 배웠어. 견디기 힘들었겠지. 오히려 자신이 경멸하던 행동들을 하게 되면서 의문에 빠졌을 테지.’

스벤이 재차 자신의 얼굴에 대고 고함을 지르며 세찬 연격을 가해왔지만 아르투르의 반사 신경은 어렵지 않게 두 공격을 받아친 후 상대의 목을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스벤은 황급히 방패를 들었으나 성검은 간단히 방해물을 꿰뚫고 스벤의 목을 스쳐지나갔다.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에선 의문이 점차 풀려갔다.

‘명예로운 기사가 전쟁을 거쳐 단순한 학살자가 될 수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거지. 야수와 같은 북구인들을 문명인답게 키우면 어떻게 자라날 것인지 알고 싶었던 거야.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왕의 사생아라는 신분이 필요했겠지. 아니면 출생 때문에 차별을 받아 폭력적인 본성을 단숨에 드러냈을 테니까.’

스벤은 자신이 입은 상처에 더욱 분노를 끓어올랐고, 고함을 지르며 크게 검을 휘둘렀다. 평생을 전사로 살아온 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정교함이 부족한 허점투성이 공격이었다. 갓 서임 받은 기사나 할법한 투박한 공격이었다. 힐데군드도 맨 처음 문명지에 왔을 때 저런 모습이었다.

‘당연히 그분은 자신의 친자식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성검을 물려받을 수 있기를 바랬을 테지. 그건 아버지로서, 또 오’데르만 왕가의 수장으로서 당연한 바램이야. 하지만 그분의 세 아들들은 모두 어딘가에서 능력은 특출 났지만 성검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진 못했어. 그렇게 기회가 나한테 돌아온 것이군.’

생각에 빠진 사이 머리를 향해 냉기의 마검이 날아들었다. 생각에 빠져 반응이 늦어 간발의 차이로 막아냈다. 아르투르는 점차 머리가 상쾌해졌고 자신의 손에서 푸른빛을 발하는 성검을 바라보았다. 이것이 페르넬 대왕이 자신에게 물려준 유일한 유산이며, 그분이 가장 귀한 것이라고 칭한 것이다.

‘내가 물려받은 건 가문의 유산이나 혈연의 유대 같은 게 아니야. 나는 대의(Greater Good)를 물려받은 거야.”

주인이 가치를 깨닫자, 성검의 빛은 더욱 밝고 뚜렷한 색채로 변해갔다. 인간의 욕망이 담긴 황금빛에서 별이 담긴 푸른 빛으로 변했던 성검은, 이제 태양과도 같은 눈부신 빛을 내며 눈보라를 몰아내고 주변의 빛을 가득 밝혔다. 스스로의 사고에서 깨어난 아르투르는 스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는 -!”

스벤이 휘두른 냉기의 마검이 태양 빛을 발하는 성검을 짓눌렀다. 그는 조금만 더 힘을 주면 그대로 아르투르를 동강낼 수 있다고 믿으며 가득 내리눌렀지만 아르투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 아들이다 - !”

생각의 바다에서 깨어난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히 웃으며 재빠른 발걸음으로 뒤로 물러나 적의 일격을 흘렸다. 스벤은 공세를 강화했다. 힐데군드와 싸우며 수없이 반복했었던 방식의 태도였다.

“내 피와 살은 당신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오. 스벤.”

아르투르의 목을 냉기의 칼날이 미묘하게 스쳤다. 정확힌 그렇게 보이도록 해준 것이다. 스벤은 더욱 급해져서 칼날을 높이 들어올렸다. 놀랍도록 상체의 방어가 취약해진 건 신경 쓰지 못했다.

써겅 - !

“하지만 내 믿음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거라오. 진짜 아버지 말이오.”

성검은 정확한 각도로 노전사의 가슴을 가로로 베었고, 스벤은 심장을 기점으로 상하로 나뉘어 바닥으로 쓰러졌으며 냉기의 마검도 손에서 떨어졌다. 스벤은 혼란스런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자신을 죽이는 건 예상 내였으나 그 뒤에는 마땅히 유지를 이어 신들의 뜻을 받들어야만 했다.

“당신들은 내가 이걸 계승해야한다고 주장했지.”

아르투르는 냉기의 마검의 칼날 끝을 발로 짓밟아 고정시켰다.

“이게 내 대답이오.”

기사왕의 성검이 냉기의 마검을 내리쳤다. 서로 다른 신들의 힘을 부여받은 두 유물은 강렬히 충돌하며 기괴한 빛을 내었다. 다시 한 번 태양빛의 성검이 내리쳐지자, 마검은 수십 개의 조각으로 나뉘어 사방에 흩뿌려졌다. 태고 시대부터 내려온 신들의 유물이 파괴되는 모습을 본 북구인들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아르투르를 지탄했다.

“나는 기사왕 아르투르다. 기사란 맹세를 지키는 자이며 왕이란 백성들을 보호하는 자. 그러니 나는 맹세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할 뿐이다. 그 외의 다른 이름은 필요 없다.”

아르투르는 경악한 스벤의 머리통을 짓밟아 터뜨린 후, 생모를 올려다보았다. 타네르사는 스스로를 얼음과 냉기로 감싸 성검의 빛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었다.

“짐은 기사로 인정받을 때 약자들을 보호하고 명예를 무엇보다 귀히 여기겠노라 맹세했다. 또한 신을 대신해 지상을 통치할 통치권을 인정받으며 짐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불의를 일소하겠다고 맹세했다. 맹세 이전의 짐이 누구였는지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서약의 이행을 가로 막는 자가 있다면 베어 버릴 뿐이다.”

아르투르의 친척인 윈터본 혈족 사람들은 분노와 경악 속에서 그를 노려보았다. 이 세상에 자신의 조상과 혈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문명인들의 썩어빠진 생각이 골수까지 스며든 게 분명했다. 이대로라면 신들의 진노가 자신들의 피에 임하고 말 터였다.

“오너라. 금수의 삶을 살아가면서도 문제인지도 모르는 미개한 자들아. 대의가 너희를 불태울 것이다.”

대모 타네르사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당혹, 경악, 분노로 변했다가 이내 모든 사실을 수용한 표정이었다.

“네 뜻이 그렇다면야.”

타네르사는 차가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너는 이곳에서 홀로 죽게 될 거다. 안나타르.”

이제 아르투르의 북구인 혈족들은 무기를 들어 올린 채 대모의 명령만 기다렸다. 그녀가 손짓을 하자 북쪽의 시야를 가리던 눈보라가 걷히고, 눈보라 속에 대기하던 북방의 군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아있던 모든 전력을 결집시켰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숫자였으며 각양각색의 괴수들도 몰려와 있었다.

“기사왕께서는 혼자가 아니시오.”

그 때, 남쪽의 눈보라 속에서 장신의 왕실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이 내뿜는 태양빛은 남쪽의 눈보라도 몰아냈으며 그들은 붉은 용의 깃발을 선두로, 수많은 깃발이 휘날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북구인 전향자들의 인도를 받으며 눈폭풍 속을 걸어왔으나 정확히 위치를 찾지 못해 헤매다가, 성검의 빛을 보고 도달한 것이었다.

“배교도들과 배신자 신의 신도들이 이곳에 다 모였구나. 좋다. 오늘 신들께서 나약한 자들의 영혼을 포식하시겠군.”

얼어붙은 강가 위에 양측의 모든 군세가 모여 있었다. 이곳에 모인 자들은 모두 자신들에게도, 상대에게도 더 이상 여력이 없다는 걸 알았다. 세계의 운명을 건 최후의 싸움이었다. 첫 싸움은 아르투르가 타네르사를 향해 달려들며 시작되었다.

누구도 지시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돌격했다.

누구도 도망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다.

이곳에서 모든 것을 걸고 싸워야만 했다.

좋았던 옛날로 돌아가느냐.

새로운 시작을 향해 나아가느냐.

미래를 움켜쥐는 것은 하나의 의지뿐이리라.

기사왕이 공중에 있는 대제사장을 베기 위해 뛰어오를 때, 타네르사는 공기를 얼려 여러 발의 얼음창을 만들어 날려 보냈다. 아르투르는 날아드는 얼음창을 보호막을 쳐서 막아내긴 했으나 충격파에 맞고 몇 미터 날아가 나뒹굴었고 그 사이 타네르사의 친족들이 나서 아르투르를 봉쇄하고 협공을 가했다.

“붙잡고 있어라! 곧바로 끝을 내겠다!”

타네르사는 북구의 사제들에게 전해지는 주문을 외웠다. 그녀가 한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고 검붉은 기운이 그녀의 주변으로 뭉쳐들었다. 끔찍한 저주의 주문이 준비되어갔다. 겨울 여왕의 한과 분노가 서린 저주는 보통 사람은 닿자마자 재로 변해 사라질 정도의 힘이 담겨있었으나 주문 자체에는 큰 기대를 걸지 않았다.

‘놈도 두 명의 신의 가호를 받으니 이걸로 쓰러뜨리진 못할 거야. 하지만 움직임을 봉쇄할 수는 있겠지. 그 뒤에는 직접 나서서 처치하면 된다.’

그 사이 아르투르는 자신을 가로막던 사촌의 목을 베어버렸고 나머지도 아슬아슬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는 너무 손쉽게 북구 최강의 전사들을 쓰러뜨리고 있었다. 신의 가호나 성검 이전에 스스로의 강함이 정점에 선 까닭이었다.

“대모님! 도와주셔야 합니다!”

“약한 소리하지 말고 버텨라!”

타네르사는 주문의 진척이 이상하게 느려진 걸 깨달았다. 이미 완성되어서 아르투르를 제약하고 있어야 시간이었건만 첫 번째 주문조차 완성을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주문을 엮으면 누군가 풀어내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제사장. 나한테 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힐데군드가 깔깔대면서 정확히 주문을 역순으로 외우고 있었다. 둘의 마법에 대한 능숙함은 차이가 컸지만 무언가를 만드는 것 보다, 망치는 것이 훨씬 쉬웠다.

“-배교자 같으니라고! 너부터 뒈져라!”

타네르사는 만들다 만 저주를 힐데군드에게 쏘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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