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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9화 (23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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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전사 스벤은 크게 웃으며 저주받은 검을 세차게 휘둘렀다. 아르투르는 그 때마다 한 발자국씩 물러나며 검을 받아치고 회피하는데 집중했다.

“내 아들아. 나는 네가 잘 커서 부모의 품으로 돌아온 게 기쁘다. 이제 네 운명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

아르투르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방어 자세를 굳혔다. 아르투르는 거슬리는 기분을 최대한 억눌렀으나 눈썹이 떨리며 목소리에 혼란과 분노가 묻어나오는 것은 숨기지 못했다.

“당신이 내 아버지라고?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 당신을 토막 내서 짐승들의 먹이로 던져주겠다.”

아르투르의 표정이 분노로 구겨지는 모습을 본 스벤은 마음속으로 깊은 만족감을 느꼈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막강한 전사는 거대한 분노로 들끓고 있었으며 저런 성격과 외모는 분명히 자신의 피와 본성을 물려받은 것이었다. 사십년 전, 자신이 이끌었던 남부에 대한 대침공은 페르넬과 그의 기사들로 인해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아들이 페르넬의 아들들을 꺾은 뒤 아버지를 찾아왔으니 승자는 자신이었다.

“으하하하하! 으하하하! 내가 이겼다! 내가 이겼다고! 페르넬!”

아르투르는 스벤의 웃음소리가 너무 거슬렸다. 가까스로 분출을 참아내던 극한의 분노가 아르투르의 입가를 비틀리게 했다.

“바로 찢어죽여야겠군.”

스벤 역시 아르투르의 목소리에 회까닥 눈이 돌아버렸다. 그는 광전사 중의 광전사였다.

“나약한 놈들 사이에서 자라다보니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나보구나! 네 애비가 처음부터 새롭게 가르쳐주마!”

두 사람이 다시 서로를 공격하기 위해 나아갈 때, 중간에 위치하던 빙판이 솟구쳤다. 두 사람은 황급히 반대편으로 몸을 움직여야했고 방금까지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드높은 얼음 방벽이 나타났다. 닿기만 해도 갑옷을 뚫고 중상을 입힐 수 있을 날카로운 얼음 가시들이 가득 돋아있었다.

“스벤. 닥치고 물러나라.”

성난 타네르사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들려오자 광전사 스벤의 얼굴에 두려움이 생겨나 황급히 물러났다. 대제사장은 신들과 가장 밀접한 자로서 망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녀는 전투에서 죽기를 바라는 광전사들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내가 설명해주마. 안나타르.”

문자 그대로 공중에 떠 있던 타네르사는 얼음 방벽 위에 사뿐히 착지했다. 아르투르는 의구심과 두려움이 동시에 들었다. 자신의 생모라면 분명히 나이가 아주 많아야 할 텐데, 어떻게 중년인 자신보다 젊어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사악한 피의 마술이 분명했다.

“안나타르? 그게 당신들이 날 부르는 이름이오?”

타네르사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선물이란 의미다. 네가 태어났을 때 널 위해 지었던 이름이다. 아들아. 나는 네가 태어났을 때 느낄 수 있었단다. 너는 내 자식 중 누구보다 강한 피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걸 말이야. 살아남는다면 누구보다 위대한 것을 이뤄낼 거라고 믿었지. 그런데 정말로 그걸 해냈구나. 자랑스럽다.”

“나는 페르넬의 아들 아르투르요.”

타네르사는 여전히 관용적인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필요하겠지. 네가 나약한 자들 가운데 우뚝 섰으며 그들을 데리고 이곳까지 와주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신들께서 흡족하게 느끼실 피의 대향연을 벌일 수 있도록 희생 제물까지 데려와줄 줄이야.”

“시간 낭비군. 목이나 씻고 기다리시오.”

아르투르가 성검을 겨누자 주변으로 눈보라와 강풍이 몰아닥치며 아르투르를 휘감싸 행동을 방해했다. 대제사장은 능청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 지 아르투르는 제 자리에 버티고 서 있는 것이 전부였다.

“기다려라. 네 아버지는 광전사 스벤이다. 그러니 네가 섬겨야 할 조상도, 신도, 진짜 가족도 따로 있는 거지. 이곳에 모인 모든 북구인들은 네 형제자매들이여 친척들이고 네 탄생과 성장을 같이 기뻐해주던 자들이다. 네가 나약한 자들 사이에서 핍박 받으며 자랄 때도 우리는 네가 신들의 선물임을 잊지 않았다. 너를 위해 산 제물을 바치며 신들의 은총과 행운을 빌어주었지. 덕분에 네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타네르사의 의지에 따라 빙판 위로 거센 눈보라가 몰아쳤고 성검이 내뿜는 푸른 별빛은 점차 힘을 잃어갔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무릎 꿇리려는 강풍에 맞서기 성검을 바닥에 꽃아 넣은 후 손잡이를 잡아 버티고 섰다.

“당신이 답해야 할 건 그딴 게 아니오.”

아르투르는 눈을 치켜뜨고 타네르사를 노려보았다.

“우리 아버지가 당신께서 친부가 아니시라는 걸 알고 계셨는지에 대한 것이지.”

타네르사는 시시하단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진짜 혈통이 밝혀진 마당에 어째서 가짜 가족 따위에게 신경을 쓰는 건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명인들과 너무 오래 살아서 중요하지 않은 것에 집착하게 됐구나. 이래서 일찍 데려오려고 했건만, 좋다. 내 실수이니 이해해줘야겠지. 간단하게 말하마. 페르넬은 내게서 너를 뺏어갔다.”

아르투르는 처음으로 타네르사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들었다. 지금까지 그녀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아무래도 좋은 옛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의 생모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사십년 전, 당시의 지도자들은 페르넬의 정복 전쟁으로 문명인들이 취약해졌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침공을 시작했다. 길고도 잔인했던 전쟁 끝에 결국 북구인들은 패퇴했으며 타네르사를 대모로 하는 윈터본 혈족도 크게 패하고 고향으로 도망쳤다.

“모두가 도망쳤지만 난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다. 적병을 백 명 째 베어 넘겼을 때, 화살들이 날아와 내 가슴을 꿰뚫었다. 당연히 명계로 떠날 줄 알았는데 일어나보니 감옥이더군. 그건 이례적인 일이었어. 우린 모두 그 전쟁에서 포로를 잡지 않았거든.”

타네르사는 옛 이야기를 회상했다.

“간수가 그들의 왕의 명령으로 내가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더군. 날 노예로 삼으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했다. 젊은 시절의 나는 모든 남자들이 탐낼만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지하 감옥에서 수갑을 부숴서 날카롭게 갈아 놨다. 남의 장난감으로 사느니 죽는 게 낫지.”

타네르사는 옛 향수에 빠진 듯 쿡쿡 웃었다.

“어느 날 페르넬이 내 감옥을 찾아왔다. 그래서 그놈을 죽일 날이 되었나 싶었는데, 이해도 못할 헛소리만 하고 갔다. 내가 아이를 배고 있으니 죽일 수 없다고 하던가. 그 날 하루 종일 어이가 없어 웃고 다녔다. 날 취할 배짱도 없고 태어나지도 않은 아기의 피가 자기 손에 묻는 게 두려웠던 놈에게 우리의 공세가 좌절될 줄 누가 알았겠느냐?”

아르투르는 잠자코 생모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에 담긴 맥락과 의미를 빠짐없이 읽어냈다. 그럴수록 아르투르의 마음은 무거워져갔다.

“전쟁이 끝날 때쯤 되자 나는 아기를 낳았고 그 뒤로 형장으로 끌려가던 중 페르넬의 사촌이 포로로 잡히면서 인질로서 교환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위 “문명인”들은 내 아기를 데려가는 건 허용하지 않겠다고 했다. 어머니와 아들을 떼어놓다니 정말 야만적인 일이다. 신들께서 노하실 일이야. 차라리 같이 불태워죽이면 몰라. 그렇게 나는 너를 잃었다.”

타네르사는 깊은 애정과 그리움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르투르의 눈동자는 닫히고 열리기를 빠르게 반복했다.

“나라고 너를 그곳에 내버려두고 싶었겠느냐? 나는 계속 너를 지켜보고 있었고 언제건 너를 데려오려고 노력했다. 그렇지만 페르넬은 너를 항상 왕궁 깊은 곳에 감금했지. 네가 왕궁에서 탈출한 이후에는 내가 가장 아끼는 사도를 문명으로 내보냈지. 너를 데려오려고 말이다.”

대제사장은 아르투르의 뒤편으로 고개를 돌려 힐데군드와 시선이 마주했다. 힐데군드를 바라보는 타네르사의 표정은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힐데군드는 조금은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할 말이 아주 많아보였다. 그렇지만 힐데군드는 곧장 입을 여는 대신 아르투르에게 눈짓을 했다. 자기 볼 일을 봐야하니 서둘러 둘 사이의 일을 끝내라는 뜻이었다.

타네르사는 간곡한 표정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안나투르. 나는 어미로서 최선을 다했다. 페르넬과 그의 가문은 네 혈족들을 죽인 원수들이야. 그들에게 은혜를 입은 게 있더라도 신경 쓰지 말거라. 너는 네 친족들의 복수를 해야만 한다. 네 혈통과 의무를 받아들여라.”

아르투르는 계속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네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검과 지위를 물려받아라. 그리하면 스벤을 감싸던 신들의 축복이 네게로 옮겨갈 테지. 예언된 종말을 실현시킬 때가 왔다. 모든 문명을 무너뜨리고 네가 가지고 싶던 것들을 모두 빼앗아라. 너는 아주 오랜 시간 살면서 수많은 여인에게서 자손들을 얻겠지. 결국엔 모든 위대한 전사들의 아버지가 될 거다. 그러다 네가 늙고 쇠약해지면 네 아들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나타나 너를 죽이고 우두머리의 자리를 빼앗을 것이다.”

타네르사는 기대감에 가득 찬 눈빛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녀가 평생토록 기다려온 순간이었다. 거짓 세계에 종언을 가져다두고 태초의 모습으로 되돌리며 그 뒤에는 자신의 자손들이 번성하는 일 말이다. 스벤은 이제 자신도 죽음을 받아들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침을 꿀꺽 삼켰다.

“배신자 신 발타리아가 만든 거짓 질서를 파괴하고 자연에서 정해진 태초의 순환으로 돌아가게 하는 일이지. 언젠가 명계에서 신들께서 돌아오실 것이고, 그 때가 되면 우리 혈족은 축복받은 혈통으로서 조상들을 모시며 진정한 강자로서 살아갈 것이다. 네 혈통을 받아들이거라. 아르투르.”

“음.”

아르투르가 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이제야 알겠어. 왜 당신네 북구인들이 그토록 잔인하고 무례한지. 당신들이 말하는 삶이란 야생 동물과 다를 바가 없군.”

타네르사는 눈을 크게 치켜뜨며 소리쳤다.

“안나타르! 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오르는 걸 느껴보란 말이다. 문명인들의 말은 단지 널 제약하기 위해 만든 수갑에 불과하다! 진정한 너를 깨우란 말이다!”

“이보시오. 북구의 여왕. 당신이 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어서 정말 고맙소.”

아르투르는 시원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반응에 친족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르투르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고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신이 진실을 이야기해준 건 내가 당신들 쪽으로 돌아서길 바라며 이야기했겠지. 그야 당연하지. 당신들은 내가 당연히 평생토록 핍박받고 천대받으면서 자랐을 거라고 기대했을 테니까. 당신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에 간직해왔을 거라고 믿었을 거요. 그건 사실이었소. 난 늘 나를 낳아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나를 두고 갔는지 궁금했소.”

아르투르의 호쾌한 목소리에 맞추어, 그의 몸을 타고 흐르던 생명의 정수가 내면의 힘을 이끌어냈다. 아르투르를 억누르던 얼어붙은 바람이 모조리 몰아내졌다.

“허나 더 이상은 아니오.”

성검의 별빛은 더욱 세찬 빛을 내뿜었다. 어둠과 폭풍은 사라지고 푸른빛의 성검이 빙벽을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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