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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8화 (238/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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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 속에서는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그곳에 이끌리던 아르투르는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다.

“안녕~?”

바로 옆에서 팔짱을 낀 힐데군드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곁에는 그녀의 아들인 시구르드가 흉흉한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고.

“너희가 왜 여기 있지?”

“일단 네 아들은 너와 같아. 똑같이 피의 부름을 받고 이끌리고 있는 거야. 난 이 아이를 인도해주러 온 거고.”

아르투르는 무뚝뚝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만큼은 항상 태평한 힐데군드의 표정이 마음에 거슬렸다.

“피의 부름? 이 목소리가 무엇인지 안다면 말해라.”

지금도 눈보라 속에서 계속 북구어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만히 듣고 있자면 그건 마법을 영창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기도문을 외는 사제와 같은 경건한 목소리 같기도 했다. 힐데군드는 손가락으로 쿡쿡 자신의 귀를 가리킨다.

“집중하고 귀를 기울여봐. 그러면 들릴 거야.”

아르투르는 눈쌀을 찌푸렸지만 힐데군드의 조언대로 눈보라 속에서 말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북구어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갈수록 선명해졌다. 목소리의 주인은 여성이었으며 각 음절에는 마법적인 힘이 실려 있어 자신의 가슴을 향해 파고들었다. 마침내 의미가 다가왔다.

- 어서 오거라. 정말 오랫동안 너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족이 모일 시간이다. -

아르투르의 얼굴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무뚝뚝함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변해갔다. 저 목소리는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고 정확히 자신을 지목해서 부르고 있는 중이었다.

“저 목소리의 주인에 대해 아는 게 있다면 말해라.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전부 말해! 당장!”

휘몰아치는 바람이 두 사람이 쓰고 있는 가죽 후드를 휘날리게 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았고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이를 드러내며 웃는 힐데군드.

“나는 네게 어떤 의도도 숨긴 적이 없어. 아르투르. 그건 앞으로도 그럴 거야.”

아르투르는 못미더운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힐데군드는 웃음기를 거두지 않은 채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내 스승이야. 내 삶의 거의 모든 걸 그녀한테 배웠지. 싸우는 법, 신들의 목소리를 듣는 법, 고대의 지식들에서 삶의 방식까지. 나한텐 사실상 어머니 같은 사람이라고나 할까.”

“그런 걸 물은 게 아니란 걸 알잖아.”

아르투르는 다그치며 되물었다.

“또한 몇 남지 않은 순수 북구 혈통의 여자답게 고대신들의 은총을 한 몸에 받았지. 이름은 겨울의 여왕 타네레사. 문명 세계를 멸하라는 예언을 전한 자이자 침략을 총지휘하고 있는 자야.”

아르투르는 여전히 상대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것뿐인가?”

“내 장남, 시구르드의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야. 윈터본 혈족의 대모로서 말이지.”

“너와 혈연 관계가 있나?”

“피가 섞이지 않은 북구인은 없으니까 위로 몇 세대 올라가면 섞여있겠지. 하지만 나와의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하지만 시구르드의 할머니이긴 해.”

“그런가.”

아르투르는 눈보라를 꿰뚫고 자신을 바라보는 대제사장의 시선을 느꼈다. 아르투르는 그녀의 시선에서 일말의 애정을 느꼈으며 자신의 가슴도 부인할 수 없는 그리움과 호기심으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내 생모라는 소리를 길게도 하는군.”

“어머니란 소리는 안하는구나?”

“내가 어머니로 모시는 분은 따로 있으니까.”

아르투르는 허리춤에 찬 성검을 바라봤다. 여전히 성검이 빛을 내는 모습을 본 아르투르는 당당하게 대제사장을 만나기 위해 눈보라 속으로 걸어갔다. 그의 길을 축복하듯이, 쌓여있던 눈더미들이 양 옆으로 갈라지며 수월하게 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었다. 힐데군드는 조용히 시구르드를 바라봤다.

“너도 가족 모임에 가볼래?”

“왜 그래야 할 까요? 저 꼰대는 날 아주 못마땅하게만 보던데요. 평소였으면 턱에 주먹을 쑤셔 넣었을 겁니다.”

시구르드는 반항기 있는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 나이에 흔히 있는 일이기는 했다.

“네 행동이 자신의 본능을 상기시키니까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힘으로 강탈하고, 부수고, 죽이는 게 우리지만 놈은 거기서 벗어나있으니까. 네 아버지랑 친해지고 싶으면 식사 때 동생들 식사 뺏어먹는 일부터 그만둬야지?”

정작 힐데군드의 목소리는 별로 아들의 행동을 기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기사도니 명예니 전부 위선입니다. 폭력, 압도적인 폭력만이 힘이고 정의죠. 어머님이 가르쳐주신 거 아닙니까?”

“맞는데, 넌 그런 걸 주장하기에 너무 약해. 하늘 아래 최강의 인간이 되기 전까지는 위선이나 떠는 게 나을지도?”

“에이. 뒈지면 뒈졌지 그딴 일은 못합니다.”

시구르드는 혀를 차며 손사래를 내저었다. 그렇지만 떠나간 아르투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호기심에 빠지긴 했다. 자신의 생부는 몇 달 사이 극적으로 강해져있었다. 자신보다 한 두 단계 앞서있던 수준에서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을 최강자의 자리를 순식간에 되찾았다. 이제는 정말로 압도적인 무력과 카리스마를 가진 왕 중의 왕다운 남자였다. 지금 도전했다간 일격도 버티지 못하고 두 동강이 날지도 모르리라.

“그래서 따라갈 거야? 안 갈거야?”

“지상 최강의 사나이가 무슨 행동을 하는 지 봐둘 필요는 있을 것 같군요.”

시구르드가 발을 내딛자 힐데군드가 기꺼이 아들의 길을 인도해주었다. 시구르드는 힐데군드의 다섯 자식 중 특별한 애정을 한 몸에 누리는 자였다.

“그래야 내 아들답지. 가자.”

그녀의 다른 자녀들도 전사로서 훌륭하게 성장하고 있음에도 시구르드의 자질에는 비할 바가 못 되었다. 호전성과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시구르드는 전사가 되는 자질에서 모든 동생들을 혹은 다른 모든 인간들을 압도하는 젊은이였다.

-어서 오너라. 겨울의 아이들아. 신들의 자손들아. 우리의 향연에 함께 하자. -

***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하염없이 걷던 아르투르는 문득 자신이 빙판길 위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땅바닥을 바라보니 얼어붙은 강줄기 위였다. 어린 시절 동네 꼬마들과 함께 물장구를 쳤던 곳이었고 아낙네들이 빨래를 하러 나오던 강 말이다. 이제 이곳은 꽁꽁 얼어붙어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 되어있었고 그 위로는 새하얀 눈이 쌓여있었다.

점차 눈보라가 걷히며 모습이 주변의 모습이 드러났다. 얼어붙은 강가 위에서 서른이 넘는 북구인들이 한 곳에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으며 늙은이도 젊은이도, 심지어 아이도 있었지만, 모두 뛰어난 전사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이들은 뿔로 만들어진 술잔과 커다란 맘모스의 고기를 뜯는 중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아르투르가 나타나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아르투르는 한번 살펴본 것만으로도 이들이 북구인치고도 유난히 기골이 장대했으며 생긴 것도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눈동자는 푸른색이나 녹색이었으며 모발은 금발과 적발이었다. 얼굴선은 굉장히 굵은 편이었으며 억센 인상을 주었다.

아르투르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내려 얼음강을 쳐다보았다.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되새긴다. 골격도 무척 굵고 왕가 내에서도 장신이었으며 풍성한 금발머리와 푸른 눈동자, 저들과 다를 바 없는 얼굴상.

그렇다면 저들은,

“어서 와라. 아들아.”

북구 억양이 짙은 공용어를 내뱉는 여성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젊은 것 같지도, 늙은 것 같지도 않은 기묘한 외형과 큰 키를 가진 여성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귀신처럼 새하얗고 눈동자는 아주 새파랬다.

“나는 겨울을 다스리는 타네레사다. 신성한 혈통을 이어받은 자이고, 사제들 중 제일이지. 나약한 문명인들의 말로 옮기자면 교황 정도 되겠군. 너는 어미가 이 순간을 얼마나 간곡히 바래왔는 지 모를테지. 명심하거라. 아들아. 모든 신들께서 오늘의 만남을 지켜보고 계신다.”

타네레사는 눈처럼 새하얀 옷을 입고 있었으나 그녀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뛰고 있는 심장이 들려있었고 거기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몸을 가득 적셨다. 대제사장은 얼음으로 만들어진 제단 위에 서 있었는데,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숨이 붙어있던 여러 문명인 포로들이 뉘여 있었다. 그들의 장기는 모두 잔인하게 뽑혀있었으며 피는 가득 흘러나와 주변을 뒤덮을 정도였다. 아르투르는 극심한 혐오감과 분노를 느꼈으나 동시에 짜릿해지는 기분도 느꼈다. 자신에게 적대하는 자들을 저렇게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이제서야 온 것이냐? 이전부터 목 놓아 너를 불렀건만 네 어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게냐?”

타네르사는 얼음 제단 위에서 한 발자국씩 내려왔다. 그녀를 수장으로 하는 혈족 전체가 일제히 무릎을 꿇어 그들의 대모에게 경의를 표했다. 자식이나 조손, 사위나 남편들 모두 철저히 그녀에게 복종하고 있었다. 타네르사가 지상에 발을 내릴 때, 아르투르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곳이건 네가 자란 곳이건 어머니와 아들 간의 법도에는 다를 바가 없다. 네가 위대한 전사로 자라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너는 짐작하기 어려울 게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모르오. 앞으로도 알 기회는 없겠군. 북구인들의 여왕이여.”

아르투르는 황금의 성검을 뽑아들었다. 진동하던 성검은 검집에서 뽑혀 나오자 별빛처럼 강렬한 푸른 빛을 내뿜으며 어둠을 밝혔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윈터본 혈족, 즉 아르투르의 친척들은 기겁한 표정으로 자신들의 말로 아르투르에게 뭐라고 소리쳤다. 내뱉는 음절을 들어보니 그만두라고 다그치거나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당신은 나의 적일뿐이오. 나 역시 당신의 적일 뿐이지.”

아르투르는 별빛을 내뿜는 성검을 타네르사에게 겨누었다. 그녀는 분노로 손을 꾹 쥘 뿐, 가시적인 적대 행위는 하지 않았다.

단지 노기가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되물을 뿐이었다.

“어찌하여 너를 낳은 어미를 해치려고 드느냐? 그것이 배신자 신 발타리아의 가르침인가? 아니면 여신을 어머니로 섬기게 되었으니 인간 어머니 따위는 필요가 없다는 게냐? 내 아들을 뺏긴 셈이군. 도시들이 눈보라 속에 파묻히면 발타리아건 엘라카르시스건 사원이라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파괴해버려야겠다.”

아르투르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내 핏줄의 절반은 당신에게 받은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머지 절반의 피는 페르넬 대왕에게서 받은 것이오. 우리 문명인들은 모계 혈통보다는 부계 혈통을 앞세우지. 나는 대제사장 타네르사의 아들이기 전에 정복왕 페르넬의 아들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의지를 잇는 것이 합당하오.”

타네르사는 그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호. 아들이니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따르겠다. 좋다. 반쪽짜리 패륜아로구나. 후레자식치고는 일리 있는 말이야.”

“그러니 목이나 씻고 기다리시면 되겠소. 아니면 이 겨울을 멈추던가.”

“기다려봐라. 네 아버지에게 물어보도록 하자.”

아르투르는 타네르사의 말을 들은 순간 극심한 모욕감에 휩싸여 곧장 바닥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너 같은 자가 함부로 입에 담을 분이 아니다!”

단숨에 타네르사에게 접근한 아르투르가 성검을 내리치어 단번에 그녀를 베어낼 때.

카아앙 - !

빙하의 한기가 가득 묻어나오는 저주 받은 마검이 그를 막아 세웠다.

“네놈은 부모도 못 알아보느냐? 이 후레자식아. 네 어머니께 경의를 표해라. 대모께선 신들의 총애를 받으시는 선택받은 분이시다.”

부딪치는 검을 너머로 두 사내가 눈을 마주했다. 백발의 노전사는 머리가 젊은 노년이 아닌, 검을 쥐고 서 있는 것조차 신기한 나이였다. 아버지나 마스터가 지금까지 살아있었으면 이 노인 정도로 나이가 들어 보이겠다 싶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자신과 힘으로 검을 맞댈 정도로 정정했다.

아르투르는 노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녹색 눈동자였다.

……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상대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이 삼사십년 정도 나이가 든다면 저 노인이 될 것이고 저 노인이 그만큼 젊어진다면 자신이 되리라.

노전사는 히죽 웃어보였다.

“이제 신들의 섭리를 알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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