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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7화 (23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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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헨으로 들어온 연합군은 근 한 달 만에 제대로 휴식을 취했다. 바람을 막아주는 벽과 천장 아래서 고깃국물이 들어간 스프를 먹으며 지쳐버린 심신을 달랬다. 병사들은 곯아 떨어졌으나 왕들은 상황을 전달 받고 새롭게 전황을 구상하느라 긴 시간을 보내야했다.

이미 세상은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는 마경이었기에 졸리면 그 때가 밤이고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이었다. 오랫동안 햇빛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심신이 지쳐가고 있는 걸 느꼈다.

회의가 끝나고 기사왕은 레오폴트, 발루아누스 왕과 함께 대성당의 지하 무덤을 방문했다. 그는 석관에 안치된 오’데르만 왕가의 왕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자신의 왕가는 아닐지언정 분명 핏줄은 이어져있는 선조들에게 인사를 올리고 싶다는 욕구였다.

‘아버지. 이제는 저를 당신의 아들이라고 불러주시렵니까?’

지상에서는 피난민들이 부르는 성가와 그들의 기도가 지하 무덤까지 들려왔다. 방대한 영역에서 번영을 누리던 데네토르의 영토는 이제 몇몇 대도시로 줄어든 상황이었다.

많은 인구가 피난에 성공했지만 그나마도 언제까지 버틸 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사람들이 기댈 곳은 신앙뿐이었다. 그들은 창조주 발타리아에게 구원을 청하며 제발 돌아와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이제 오’데르만 혈통의 운명은 우리 세 사람에게 달려있군.”

레오폴트는 페르넬의 석관을 보며 한탄 속에서 중얼거렸다. 강철의 대공 페르디난트는 평화 협정이 체결되고 몇 년 후 세상을 떠났으며 페르넬의 뒤를 이었던 루이스는 술독에 빠져 일찍 세상을 떠났다.

“우리 세 사람의 아버지들이 모두 천국에서 우릴 내려다보고 있겠어. 정말 내세가 존재한다면 말이다.”

발루아누스는 자신의 십자가 목걸이를 매만졌다. 기사왕의 조카인 이 젊은 군주 역시 걸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는 기사로서 아주 빠르게 성장했으며 무엇보다 경건한 신앙심에 기반한 통치로 명성을 떨쳤다. 아직까지 데네토르 왕국이 버티고 있던 것은 전적으로 군주의 능력과 미덕 덕분이었다.

“어둠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빛에 의지해야하는 법입니다. 레오폴트 왕.”

격식 있는 칭호에 서운함을 느낀 레오폴트가 툭하고 발루아누스의 어깨를 쳤다.

“당숙 어른이라고 불러. 인마. 너희 아버지랑 우린 엄청 친했다고. 페르넬 작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다시 뭉칠 때가 온 거야.”

“글쎄요. 우리 집안이 도로 뭉친 것은 혈연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 세상은 빛과 어둠의 싸움 중에 있으며 종말과 새로운 탄생을 앞두고 싸우고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적인 한계를 벗어나 더 큰 그림을 봐야합니다.”

레오폴트는 혀를 찼다.

“아. 그러냐? 어른이 기껏 친한 척했는데 꼬박꼬박 말대답이나 하다니, 요즘 젊은 것들은 웃어른을 숭상하는 법을 몰라요. 예의가 없어. 예의가.”

아르투르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레오폴트에겐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구태여 보태지는 않았다. 레오폴트가 실없는 소리를 할 때는 할 말이 없거나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지금은 둘 다이겠지.

“올라가자. 쉬어야 다음 전투도 대비하지.”

기사왕의 말에 다른 두 왕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투르는 지하 묘지를 나오며 아버지의 무덤을, 그리고 자신의 성검을 다시 돌아보았다. 기사왕은 목례로 아버지의 무덤에 재차 감사와 존경을 표했다.

아버지의 유산 덕분에 엘라카르시스를 만날 수 있었으며 그 덕분에 오늘의 자신이 있었다. 사생아인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물려준 아버지에 대한 뭉클한 감정이 솟아올랐다.

그분의 의지에 부응하고야 말리라. 반드시.

***

지난번 공세로 북방의 군세는 눈에 띄게 줄었들었으나, 여전히 적들의 군세는 지상과 하늘을 덮을 정도로 많고 강력했다. 한때 아홉 왕의 원정대도 저만한 숫자를 거느렸으나 지금은 반의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북구인들은 겨울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타고나길 다른 인간들보다 강인했으며 혹한에 대한 저항력이 남달랐다.

기사왕도 점차 자신의 몸에 흐르는 극지의 혈통을 느꼈다. 휘하 병사들이 단지 보초를 서기만 해도 동상으로 발목이 얼고 중병에 걸려 쓰러졌지만 자신은 두터운 가죽만 두르고 있으면 하루 종일 바깥에 있어도 충분히 견딜 만 했다. 오히려 이전처럼 힘이 남아돌아서 힐데군드와 대련을 하며 몸을 풀거나 부상 입은 병사들을 치유하러 다녔다.

“적들이 온다!”

군대가 혹독한 겨울로 줄어드는 와중에도 북구인들의 공세는 끝이 없었다. 저승에서 돌아온 최강의 북구인 전사들은 상대하기 버거운 자들이었고 고대의 야수들은 공성병기들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며 성벽을 점차 무너뜨렸다. 그 때마다 아르투르와 북구인 전향자들이 중심이 된 부대가 출격해서 그들을 내몰았고 도시에선 불화살과 기름, 대포로 응전했다.

이러한 싸움은 여러 주 동안 쉬지 않고 이어졌다. 하늘에는 날짐승들이 날아다녔으며 야수는 성벽을 부수고 들어와 눈에 보이는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었다. 피에 굶주린 북구인 광전사들은 홀로 서넛의 군인을 상대하며 싸웠다. 그나마 풍요로운 물자가 없었다면 진즉에 도시는 무너졌을 것이다.

엘라카르시스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이번 가을에 유례없는 풍작을 가져다주지 않았다면 이미 모두 굶어죽었으리라.

‘안타깝군요. 어머니. 당신은 항상 저희들에게 진심이셨는데 저희가 미쳐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살아서 돌아갈 사람이 남는다면 당신의 이름을 모두가 알 수 있게 전하겠습니다.’

북구의 군대가 신화적인 것처럼 원정대도 마찬가지였다. 서부의 기사들은 북구인들마저 기가 질릴 광신적인 돌격을 선보였고 초원의 전사들은 적에게 흉폭하고 잔인하기로는 북구인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았다.

노왕을 따라온 사막의 전사들은 그의 말 한 마디에 목숨을 잡초처럼 내던졌다. 덕왕을 따르는 호랑이 무사들도 아주 맹렬했으며 오랜 신비를 간직한 마술사들과 사도들이 신비를 잔뜩 퍼뜨리며 겨울에 맞섰다.

혹독한 겨울과 함께 적들이 총공세를 가했던 어느 날,

“문명인들이여! 우리 스스로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서 싸웠는지. 똑똑히 기억하시오! 우리는 우리들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온 것이오!”

남방의 마술왕은 스스로를 타오르는 제단에 내던지며 최후의 주문을 외웠다. 수천 년이 넘도록 비밀 전승을 이어오던 고대의 지식들과 힘들이 불기둥 속에서 모두 타올랐다.

그의 신념은 신성한 불꽃의 기둥이 되고 피와 생명은 영원히 타오를 장작이 되었다. 아헨의 광장 한가운데 나타난 불기둥은 하늘까지 뻗어 올라갔으며 문명인들을 서서히 동사시키던 한기는 모두 도시 바깥으로 쫓겨났다.

겨울이 모습을 감추자 문명인들은 제 상태를 되찾았고 맹렬한 항전을 벌이자 북구인들의 대공세는 좌절되었다. 모든 왕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선 대영웅으로 추앙 받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그에 걸맞는 활약을 선보였다. 그들 가운데 가장 환하게 빛나며 승리를 인도한 것은 기사왕의 활약이었다.

아르투르의 몸에는 용을 선조로 둔 북구인들의 피가 흐르고 있어 누구보다 탁월한 신체 능력을 타고 났지만, 그는 힐데군드를 통해 문명인들이 만들어낸 모든 전투의 기예를 익힐 수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성검은 주신 발타리아의 정수가 담긴 무기요, 몸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기운은 엘라카르시스의 마지막 정수였다.

그는 이제 신들과 싸우던 고대의 영웅들과 비견해도 모자랄 것 하나 없는 신화적인 힘을 지닌 존재였다. 그의 빛나는 성검 앞에 숱한 야수들이 쓰러졌다. 만티코어, 가고일, 늑대인간, 심지어 히드라와 저승을 지킨다는 머리 셋 달린 사냥개까지 모두 온전한 상태인 기사왕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목이 잘려 창대에 내걸렸다.

결국 북구인들은 성벽에서 멀찍이 물러나 군세를 재정비하며 그들의 신을 불렀다. 그러나 응답은 없었고 전쟁은 계속 되었다. 이 뒤로는 아주 처절하고 소모적인 싸움이 이어졌다. 이름 난 수많은 영웅들이 쓰러졌으며 새롭게 용맹을 떨치는 전사들이 나타났지만 그들마저 쓰러졌다. 양 측이 모두 엄청난 소모를 겪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도시 밖의 눈폭풍이 굉장히 강해졌습니다. 기사왕.”

현왕은 기침을 하며 아르투르에게 바깥의 상황을 전했다. 아홉 왕의 군대는 이제 다섯 왕의 군대에 불과했다. 기사왕. 패왕, 현왕과 고왕, 덕왕 만이 남았다.

겨울의 군세가 피해를 입은 만큼 문명의 군세도 피해를 입었다. 아르투르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건 더 강력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나 당장은 직면한 과제에 집중해야 할 터이다.

“북구인들이 눈보라 속에서 옛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힘을 빌려 달라 청하는 것이지요.”

“이 혹독한 겨울 자체가 이미 옛 신들이 내린 재앙이 아니오?”

“추측컨데, 북구인들은 원래 우리가 도시 안에서 모두 얼어 죽기를 기다릴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마술왕이 남긴 불꽃이 한기를 내몰아 그들의 계획을 무력화했습니다. 정면 공격이 실패했으니 이제 그걸 무력화할 방법을 찾고 있겠지요.”

기사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헌데 말이오. 오래 전부터 현왕에게 묻고 싶었던 게 있소.”

“말씀하시지요.”

“종말의 신이 어째서 나타나지 않는 거요? 여러 강력한 적들이 있었지만 모두 용의 힘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피조물에 불과하오. 결국 우리가 쓰러뜨려야 하는 건 단 한 명, 영원한 겨울을 몰고 온 용뿐이오. 그를 죽이지 못하면 종말은 끝나지 않을 것이오.”

현왕도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두려움이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었다.

“그 점은 제가 영원한 겨울이 닥친 이후 계속 생각해본 바이지만 제가 전승 받은 지식과 사고력 내에서는 신빙성 있는 추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경우의 수는 눈보라 속에 숨어 우리가 약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경우라고 봅니다. 아무리 강력한 용이지만 인간의 모든 영웅들을 한 번에 상대하는 일은 위험을 부담하겠지요. 그러니 추종자들을 보내 먼저 공멸시키고 있는 거겠지요.”

“신빙성 있는 추론이오. 그러니 큰 손실을 보지 않고 이겨야만 할 텐데 쉽진 않군. 앞으로도 적의 마술은 계속 현왕이 감시해주시오. 부탁드리오.”

“물론입니다. 그대는 전선을 계속해서 지켜주시길.”

두 사람은 각자의 할 일을 위해 헤어졌다. 그 날도 습격이 있었다. 레오폴트와 사막의 고왕은 어느덧 사이가 꽤 좋아져서 적의 머리를 얼마나 베어오느냐를 가지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레오폴트의 피를 머금은 마검은 북구인들에게도 저주받은 무기였고, 죽음의 권능을 사용하는 고왕의 존재는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신과 같았다. 그가 불현듯 나타나 낫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어떤 용맹한 자도 일격에 쓰러졌다.

그러던 중 아르투르가 보초를 서던 어느 날, 기사왕은 도시 밖에 몰아치는 눈폭풍 속에서 노랫소리를 들었다. 피의 잔향이 짙게 풍기는 장송곡이 들려왔다. 신들에 대한 제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문득 저곳에 참여하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다. 보초를 서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열망은 충동으로 변해갔다.

겨울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그것은 굉장히 오래된, 거역할 수 없는 피의 부름이었다. 아르투르는 무언가에 홀린 듯 곧장 성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라.”

경비병들은 화들짝 놀라 답했다.

“폐, 폐하?! 성문을 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귀가 먹었느냐? 어서 명령에 따라라.”

합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명령이었지만 아르투르의 노기가 서린 눈동자에 경비병들은 조금의 항의도 제기하지 못한 채 결국 성문을 열었다. 기사왕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눈보라 속으로 홀로 걸어갔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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