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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몰아친 눈 폭풍은 아주 거세어 길을 험난하게 만들었다. 도무지 끝이 나지 않을 것 세기였지만, 한번 들어온 이상 나갈 길은 없었다. 어찌나 눈보라의 힘이 거센 지 원정대를 온기로 감싸주던 불의 마법조차 힘을 잃었다. 곁에서 걷던 자들이 사라지고 쓰러지고 얼어붙었다. 이제 마음마저 꽁꽁 얼어버린 원정대원들은 절망할 여력조차 잃어갔다.
몇 날 며칠을 헤맨 건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눈보라가 잦아들었다. 기사왕은 자신의 늙은 군마를 멈춰 세웠다. 눈보라가 걷힌 시야로 벌판 너머에서 연기와 불길에 휩싸인 대도시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헨.
자신의 고향이자 데네토르 왕국의 수도였다. 까마득히 많은 약탈자들이 도시에 대한 공세를 퍼붓고 있었다. 탐스럽기 그지없는 먹잇감이리라.
- 어서 오라. 오만에 찌든 인간들아. 너희의 문명의 마지막을 보아라. -
장엄하고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르투르는 목소리가 하늘에서 들린다고 생각하고 올려다보았지만 오직 바람과 진눈개비만이 있었다. 지금 종말의 용은 자신들의 마음속에 속삭이고 있었다.
- 너희를 응대하기 위한 준비해두었지. 잘 즐기도록 하여라. -
안개가 완전히 걷히자 원정대를 기다리던 용의 수많은 종들이 보였다. 원정대는 출발할 때의 인원의 반의반으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겨울 속에서 진이 빠지고 지친 상태였다.
반면 눈보라 너머에서 쉬고 있던 북구인들은 느긋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가 무기를 들어올렸다. 옛 전설에서나 나오던 괴수들도 그들과 함께했다. 지상에서는 수많은 다이어 울프들이 하울링을 내지르며 피에 젖은 이빨을 드러냈고 창공에는 만티코어와 하피들이 날아다녔다. 그 외에도 수십 종에 달하는 괴수들이 모여 인간의 고기를 먹을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 세상의 온갖 괴물이란 놈들은 모두 모인 모양인데.”
아르투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어느새 그의 곁에 선 레오폴트는 호기롭게 웃으면서 마검을 뽑아들었다.
“드디어 적들을 만나서 기분이 좋군. 변변찮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죽나 했거든. 얼마 뒤면 식량이 떨어져서 군마들을 삶아먹을 판이었어.”
레오폴트가 탄 흑마는 주인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주인을 떨어뜨리고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패왕은 허벅지에 가득 힘을 주면서 고삐를 잡아당겨 놈을 통제했다.
반면 에쿠잘루스는 침착한 태도로 적들을 노려본 채 주인의 명령만을 기다렸다. 늙은 군마는 눈보라 속에서도 기세를 잃지 않았다.
괴수 무리 사이에서 한 무리의 거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평범한 인간보다 두세 배는 컸지만 등이 구부정하게 굽었으며 얼굴이 흉측하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근육은 비할 데 없이 두터웠으며 피부는 돌처럼 딱딱했다. 그들은 원정군을 바라보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트롤이라.”
아르투르는 면밀하게 적진을 살폈다. 트롤 가운데 유난히 덩치가 크고 피부가 새하얀 자가 있었다. 하얀 트롤은 미지의 푸른 금속으로 자신을 감싸고 있었고 아르투르의 키보다 큰 삼지창을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있었다. 그는 빙하의 제왕이었다. 모든 동족과 생물체로부터 존경과 공포를 이끌어내는 자 말이다. 즉, 저 자가 자신의 적수였다.
두 제왕의 시선이 마주했다.
“■■□□□□! ■■■!”
빙하의 제왕은 폭력적인 언어로 자신을 저주하며, 냉기가 서린 삼지창을 높이 들어올렸다. 수많은 야수 무리가 제왕의 행동에 응답해 울부짖고, 함성을 내지르며, 피가 가득 묻은 이빨을 드러냈다. 그들의 몸에 묻은 피와 이빨에 묻은 살점은 무엇을 포식 했는지 쉬이 알려주고 있었다.
백색 트롤이 성큼, 성큼, 발걸음을 내딛자 야수의 군세가 그의 뒤를 따랐다. 그들은 인간을 증오했고 문명을 증오했으며, 무엇보다 굶주려있었다. 반면 원정대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흐릿하게 그들을 바라볼 뿐, 어떤 열의도 내보이지 않고 있었다.
동물적 감각을 지닌 빙하의 군대는 먹잇감의 상태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삶에 대한 의지에 가득 찬 먹이는 시간을 두고 조심히 사냥해야하지만 공포에 질린 먹이는 재빨리 목을 물어뜯고 피를 뽑아내면 그만일 뿐이다.
빙하의 제왕은 승리의 확신에 가득 차, 굶주림에 광분하며 눈앞의 군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사왕은 그들을 비웃었다. 왕들이 따라 웃었다. 비웃음은 전군으로 번져나간다.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들이 열의를 내보이지 않는 까닭이 무엇인지.
“나의 형제자매들아. 저 오만한 적들을 보라. 우리가 공포에 떨고 있다고 믿는 저 우둔함을 봐라!”
푸하하하하 -
원정을 시작한 이래 좀처럼 웃을 일 없던 대원들이 모두 다 함께 웃었다.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의 옆구리를 걷어차 앞으로 나아가게 시켰다.
“우리가 혹한 속에 무엇을 두고 왔는지 보여주자.”
아르투르가 성검을 들어 올리자 전군도 자신들의 무기를 흔들며 호응했다. 함성은 내지르지 않았다. 지금은 기운을 아낄 때였다. 눈밭을 달려 나가는 에쿠잘루스를 따라 모든 기병들이 질주했다. 왕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앞장서기 위해 돌격했다. 그렇지만 에쿠잘루스는 누구보다 빠르게 달려 나가며 선두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다.
아르투르의 뜻에 따라 성검은 넓이가 얕아지고 길이가 늘어났다. 성물은 장창의 모습으로 변해 적을 찌를 준비를 마쳤다. 성물은 아르투르의 의지를 담았다. 눈보라 속에서 얼어버린 모든 감정들을 담아냈다. 분노와 원망이 모여 끝을 날카롭게 갈았고 공포와 희망이 모여 손끝에 쥔 단단한 지지대가 되었다.
격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기사왕을 보며 빙하의 제왕은 혼란에 빠졌다. 어찌 저럴 수가 있는가? 저 자에겐 실로 두려움이란 없었단 말인가? 불길함을 느낀 빙하의 제왕은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우두머리의 공포는 추종자들에게 빠르게 전염되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지금 자신들에게 달려드는 적들은 체념한 먹잇감 따위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지 얼어붙어있어 아무런 감정을 내비추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증오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동방의 마술사들이 때를 맞추어 적진 한 가운데 마법의 항아리를 내던졌다.
쨍그랑 -!
오랫동안 항아리에 갇혀있던 불의 정령들이 뛰쳐나와 화염을 들불처럼 번져나가게 했다. 빙하에서 살아온 야수들은 화염을 처음 보았던지라 공포에 질려 달아났다. 빙하의 제왕과 북구인들이 어찌 대처해야 할 지 몰라 주춤거리는 사이, 마술사들은 자신의 피를 매개로 정령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한 후, 수인을 맺어 불을 뒤틀었다. 이제 들불처럼 번져나간 불의 정령들은 경로에 있는 모든 물질을 불태우는 불의 소용돌이가 되었다.
“갸아아아아아아악!”
불길에 휩쓸린 자들은 눈밭에 뒹굴고 얼어붙은 강물로 자신의 몸을 내던지곤 했지만 그럼에도 불은 꺼지지 않았다. 마법의 불은 희생자를 새까만 재로 만들자마자 새로운 희생양을 찾아 옮겨 붙었다. 수많은 마수들과 죽음에서 돌아온 북구인 전사들이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처참히 불타 죽어갔다.
눈앞에선 불타오르는 동료가 보였고, 귀로는 벌판을 가득 메우며 비명이 들려왔다. 여기에 곳곳에서 살점이 타오르는 냄새까지 풍기자 누구도 버틸 수 없었다. 무수히 많던 빙하의 군대는 혼돈에 빠진 채 제 살길을 찾아서, 적어도 싸우다 죽을 수 있는 순간을 위해서 도망쳤다.
“■■■■■■ ■■■!”
백색 트롤은 창을 꼬나 쥐고, 일격에 도망치던 동료 트롤의 심장을 꿰뚫어 죽였다. 그러나 그건 패주 행렬을 가속화했을 뿐이었다.
“■□■□■□!”
빙하의 제왕은 도망치는 병사들에게 일갈했지만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빙하의 제왕은 공포스러운 존재였지만 불꽃 기둥보다는 덜 무서운 상대였다. 백색 트롤은 계속 부하들을 다그쳤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때,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은 제왕은 서둘러 뒤를 돌았다.
- 그와 동시에.
빛의 창이 제왕의 머리를 꿰뚫었다. 에쿠잘루스는 곧장 쓰러지는 백색 트롤의 몸뚱이 위로 올라타서 그를 마구 짓밟고 내리눌렀다.
“히히히히히힝!”
“■■■■□□□!”
백색 트롤은 머리가 꿰뚫리고도 살아남았다. 그는 끈질긴 생명을 유지하며 자신의 삼지창을 잡으려고 했지만 아르투르의 성창은 다시 트롤의 심장을 꿰뚫었다. 기사왕은 재차 창을 뽑아들어 찌르고, 또 찔렀다. 트롤의 몸이 완전히 행동을 멈출 때까지 말이다.
“와아아아아아!”
불꽃의 사나움이 사그라드는 시점을 맞추어 원정군의 돌진이 적진을 강타했다. 이제 북구인들은 일방적으로 학살당했고, 야수들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하나씩 구석으로 몰려 사냥을 당했다. 아홉 왕의 원정대는 더 이상 평범한 문명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알던 모든 것을 눈폭풍 속에 두고 온 자들이었으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공포를 견뎌낸 자들이었다. 그들은 겨울에 대한 증오심과 자신들이 최후의 수호자라는 사명감만을 믿고 달려드는 불나방들이었다.
“전군! 동부의 샌님들에게 우리 서부인들의 싸움 방식을 보여줘라! 우리는 진정한 전사의 후예들이다! 돌격!”
레오폴트가 이끄는 기사대는 적진을 마구잡이로 휘젓고 다니며 피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이 야만인들의 피를 동료들의 제사상에 바쳐라!”
살이 쪽 빠진 동오의 덕왕은 하얀 호랑이에 올라 극동의 군대를 맹렬히 지휘했다. 눈폭풍 속에서 덕왕은 포동포동 살이 올라있던 후덕한 노인에서 흉흉한 눈을 빛내며 적의 피를 갈구하는 노익장이 되어 있던 것이다.
“노왕께서 나가신다!”
노왕이 끌고 온 낫전차들은 설원을 달리며 눈에 보이는 보병들을 모조리 싹둑 싹둑 베어버렸다. 다른 왕들이 버리라고 온갖 잔소리를 늘어놔도 기어코 끌고 온 보람이 있는 무기였다. 현왕과 그녀의 수행자들이 치른 의식은 아군을 향해 불던 바람의 방향을 반대로 비틀었으며 화살들이 더욱 멀리, 힘차게 날아갔다.
마지막으로, 전향한 북구인들이 쌩쌩한 모습으로 전장 한 가운데로 치고 들어갔다. 힐데군드는 눈에 띄는 모든 지휘관을 차례로 갈라 죽임으로써 그녀가 옛 신들을 저버렸음을 증명했다. 그녀를 따르는 부족민들도 맹렬히 싸운 결과 불신은 완전히 사라졌다.
원정대원들은 감격으로 벅차올랐다.
마침내, 자신들의 고통이 보상 받고 있었다.
마침내, 자신들이 인내해온 보람이 느껴졌다.
그들은 얼어 죽는 것보다는 적들과 싸우다가 죽게 되기를 바랐다! 원초적인 복수의 감정과 투쟁심이 그들을 앞으로, 앞으로 향하게 했다.
북구인들은 적들의 눈빛을 보며 깨달았다. 그들은 이전까지 보아온 문약한 문명인 따위가 아니었다. 이들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서는 뭐든지 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전군 - 진격!”
아홉 왕의 원정대는 북부군에 대한 총공세를 가했다. 지휘관을 잃은 겨울의 군대는 차례로 허물어졌고 새하얗던 들판은 북구인들의 피와 살점으로 물들었다. 결국 빙하의 군대는 엄청난 손실을 입고 아헨에 대한 공성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빙하의 제왕과 그 수하 트롤들은 모조리 머리가 잘려 성벽에 내걸렸다.
기사왕은 마침내 원정대를 이끌고 아헨으로 진입했다. 그의 조카, 데네토르 왕 발루아누스는 열렬히 구원 부대를 맞이해주었다. 아르투르는 눈에 파묻혀가는 고향을 바라보며 깊은 슬픔에 빠졌다.
아버지의 치세에는 그토록 번영하며 문명의 정점으로 불리던 대도시가 이제는 처량한 모습이 된 모습을 바라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럼에도 아르투르는 자신이 모험을 시작했던 땅으로 돌아왔다. 그는 도망자의 신분으로 떠났으나 구원자로서 돌아왔다. 성(Family name)도 없던 왕의 사생아는 왕 중 왕이 되었다. 감격에 빠져 마땅한 일이었으나 여전히 겨울은 길고 밤은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