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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5화 (23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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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왕의 군대는 어둠 속을 행군하며, 얼어붙어가는 세계를 목도했다. 남쪽으로 도망치는 셀 수 없이 많은 피난민들의 행렬이 보였고, 피난민들의 얼굴 속에서 본 말하기 힘든 공포와 절망감을 엿보았다. 피난민들의 초라하고 처참한 행색은 그들의 고향에 일어난 일을 짐작케 할 수 있게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포를 덜어내고자 보고 겪었던 끔찍한 일들을 토로했다. 집채만 한 크기의 곰이 사람들을 잡아먹고 날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모습들, 폭력적인 북구인들이 도시를 유린하고 파괴하며, 그들의 가족을 피에 굶주린 신들에게 산 채로 바치던 일들에 대해서 말이다.

“…….”

피난민들의 경험담은 병사들의 뼈마저 오싹하게 할 정도였지만 실제와 과장이 뒤섞인 일이었다. 아르투르는 제대로 된 정보를 얻기 위해 피난민 무리의 지도자나 유력 인사들을 찾아낼 것을 명했다. 머지않아 가장 큰 피난민 무리를 지도하던 초췌한 몰골의 남자가 왕들의 앞으로 불려나왔다.

“말해보게. 발렌시아 백작. 왜 자네가 거지꼴이 되어서 도망이나 치고 있는 지 말이야.”

초췌한 남작의 옷은 심각하게 헤져있었지만 원단만은 고급이어서 존귀한 계급 출신임을 알 수 있었다. 영양 상태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다른 피난민들보다는 비교적 잘 먹은 티가 나기도 했다. 백작은 침묵을 지켰다.

“나는 자네의 주군인 발루아누스 왕의 삼촌이자 연합군의 총사령관으로 자네가 영지와 주군을 버리고 도망치는 책임을 물을 권리가 있네. 말해보게. 무엇이 자네를 겁쟁이로 만들었는가?”

기사왕의 힐난 어린 시선이 창날이 되어 백작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는 계속 고개를 숙인 입만 뻐끔거렸다. 약간 동정심이 든 아르투르는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발렌시아 백작. 자네가 기억하는 걸 꼼꼼하게 보고해주게. 그게 봉신으로서의, 기사로서의, 무엇보다 인간으로서의 의무야.”

백작은 자신이 겪은 일을 떠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렇지만 귀족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부심이 그의 입을 열게 했다. 그가 전하는 진상은 이랬다.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모든 해안에 북구인의 함대가 나타났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마을을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했다. 청년왕 발루아누스는 그들에 맞서 군대를 소집했고 성공적으로 소탕해가고 있었으나 갑자기 거대한 눈보라가 몰아닥쳤다.

“그때부터는 학살극이었습니다. 온갖 종류의 맹수와 사람을 포식하는 날짐승들이 날아들었지요. 그들을 간신히 내쫓았지만 저희가 탈진하자마자 북구인들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청년왕께선 굴하지 않고 기사들을 이끌고 몇 차례나 돌격하셨죠. 그런데, 그런데…….”

백작은 당시의 생각을 떠올리다가 공포로 빠져들어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그의 시선이 힐데군드와 마주쳤다. 자신의 겁에 질린 표정을 흥미롭게 보는 북구인 전사의 눈을 본 백작은 의자에서 자빠져서 비명을 지르고 거품을 내뱉었다. 결국 기사왕이 힐데군드를 내보내고 나서야 그는 진정했고, 심문이 계속 되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짐승들이 나타나 우리 군을 짓밟았습니다. 가장 노련한 기사들마저 어떻게 대처할 지도 모른 채 짓밟혀 죽어갔지요. 털이 수북한 그 공포의 야수는 악마의 야수가 틀림없습니다! 기사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자 병사들은 모두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습니다. 저도 그 와중에 영지로 도망쳤고 처자식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중입니다. 제발, 제발. 기사왕 폐하께서는 그들과 맞서 싸우지 마십시오. 정면에선 어떤 승산도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되물었다.

“자네의 왕은 어찌 되었나? 내 조카 발루아누스 왕 말일세.”

“그, 그건 모릅니다. 송구합니다.”

아르투르는 노기를 띤 눈으로 백작을 내려다보았다.

“영주가 주군을 버리고 전장에서 탈주하다니, 반역이자 불명예인 건 아는가?”

백작은 다시 수치심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래. 수치인 건 아나보군. 일어나게. 마저 피난민들을 남쪽으로 내려가게. 짐의 왕국에 도착하면 짐의 백성들이 자네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줄 걸세. 가는 길에 가장 중요한건 온기를 보존하는 걸세. 명심하게.”

아르투르는 백작의 어깨를 몇 번 두들겨주곤 도로 일으켜 세웠다. 기사왕의 눈빛은 연민과 분노라는 상반된 감정으로 차 있었다. 아르투르는 백작의 눈빛에서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분명히 기사의 혼을 타고난 자는 아닐 지라도 자신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자였다. 평생 동안 맞지도 않는 옷을 입고 거기에 맞추느라 애쓴 흔적이 엿보였다.

“자네는 유약한 자일 순 있으나 최선을 다하긴 했네. 문제라면 이 시대가 너무 잔인하다는 거겠지. 남은 생을 최선을 다해서 살게.”

처벌은 각오하던 백작은 눈물을 찔끔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아르투르는 처벌할 생각은 없었다. 탈영병의 목을 베는 목적은 다른 자들의 탈영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지금은 백작의 목을 베더라도 공포심을 자아내는 것 외에는 어떤 효과도 없었다. 죽음을 향해서 진군하는 군대가 지휘관을 두려워한다면 그건 독이 되리라.

“……부끄럽지만, 만약 군대가 와해되는 경우 수도인 아헨으로 재집결해서 항전하도록 정해져있었습니다. 만약 국왕께서 살아 계시다면 그곳에 계실 겁니다.”

“알겠네. 부디 우리에게 신의 가호를 빌어주게.”

“발타리아께서 폐하를 보우하실 겁니다.”

백작의 행렬은 성호를 긋고 떠났고 여덟 왕의 군대는 다시 눈보라 속으로 행군했다. 그들은 얼어 죽은 피난민들의 시체를 쉼 없이 보았다. 곁에서 걷던 전우가 쓰러져선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경험을 누구나 겪었다. 더 이상 나아갈 힘이 없어서 그 자리에 멈춰선 전우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앞으로 향한다.

다행히 여덟 왕의 군대는 큰 항구 도시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곳에서라면 군대를 쉬게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곳은 이제 폐허였을 뿐이다. 침략자들은 성벽의 벽돌 하나까지 철저하게 파괴했으며 살던 이들은 모조리 창대에 꿰뚫어 죽였다. 오줌이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 덕분에 시체들은 하나도 썩지 않았고 덕분에 거주민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그들은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그들은 폐허 속에서 하루를 쉬며 분노에 떨었으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앞을 향해, 더 앞을 향해 전진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병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저 기사왕이 든 성검의 빛을 따라 행군할 뿐이었다. 다른 일곱 왕들은 침묵을 지킴으로서 아르투르를 지지했다. 지금은 작은 불만 표출이나 반론조차 군대의 와해로 이어질 수 있음을 모두가 알았다.

최후의 문명인 군대는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며 녹아갔다. 한 번의 전투도 겪지 않고 군대의 절반이 사라졌다. 오직 힐데군드를 따라온 북구인들만이 대부분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절망과 불신이 빠르게 군대로 퍼져나갔다.

‘이대로면 눈보라 속에서 우리 모두 얼어 죽고 말거야.’

‘눈더미 속에서 지치고 약해진 우리를 북구인들이 습격해서 종말의 신에게 산 제물로 바치겠군. 걸어서 용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어.’

‘저 북구인들을 보라고. 이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전력을 보존하잖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저놈들이 우리를 배신 할 거야.’

‘저 북구인들의 지도자와 기사왕이 연인이었다고 하지. 지금은 아니란 보장이 있나?’

‘잠깐만. 기사왕의 모친도 북구인이 아니던가? 추위를 거의 타지 않잖아. 게다가 전투만 벌어지면 그놈들처럼 미친 듯이 싸우고.’

‘에이. 설마. 그렇다면 성검의 빛은 어디서 나오는 거겠어?’

‘모르지. 기사왕의 곁에 있는 북구인 마녀가 피의 제물을 바쳐 기적을 흉내 내고 있는 걸지도.’

‘그렇지 않아도 내 동료 중에 두 사람이서 눈보라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어!’

이런 유언비어들은 퍼진 첫 날부터 기사왕의 귀에 들어왔다. 아르투르의 대답은 과하다 싶게 험한 일에 앞장 서는 일이었다. 기사왕은 대군이 눈길을 진군하는데 필요한 모든 공사에 앞장섰다. 얼어붙은 강으로 뛰어들어 부교를 세웠고 삽을 들고 눈 덮인 언덕을 치웠다. 힐데군드와 북구인들도 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자 불만은 일단은 잦아들었다.

이번에는 연합군 내에 있는 서로 다른 왕의 군대 사이에 불화와 불신이 퍼졌다. 세상의 종말이란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서로 싸우고 있었을 사람들이었다. 처음의 결의가 흐릿해지고 물자가 부족해지니 서로를 원망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덟 왕들은 각기 다른 방법으로 부하들의 의심을 잠재웠다. 목을 치건 세계의 위기를 전하며 단결을 촉구하건, 어쨌건 왕들은 각자의 일을 해냈다.

그러나 원정 초까지만 해도 모두를 단결시키던 비장한 결의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왕들 사이에서조차 서로 간의 말수가 적어졌으며 하루하루를 파먹는 자기 의심과 동료들에 대한 의구심을 이겨내야만 했다.

혹한의 눈 폭풍 속을 행군하는 모든 시간은 그들에게 시험이었다.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다른 시련이 다가왔다. 그들의 체력이 시험 받았고 의지가 시험 받았으며 믿음이 시험 받았다.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고 있는 건 단호한 여덟 갈래의 의지였으며, 거대한 의지의 가지들은 다시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기사왕의 빛이 그들을 이끌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절망을 넘고 혹한을 넘고 암흑을 넘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 한번 내지 못하고 사라져가지만 버티고 버텼다. 할 수 있는 것이 걷다가 죽는 뿐이라면 그렇게 하리라. 싸늘할 정도의 결의가 한번 자리 잡자 그들은 눈을 치켜뜨고 눈 속을 헤쳐 나갔다. 그들은 스스로가 뒤집어쓰고 있던 것들을 하나씩 집어던졌다.

원정대원들은 신분을 버렸다. 왕족도 노예도 목숨은 하나뿐이다.

원정대원들은 성별도 버렸다. 추위를 인내할 수 있는 자가 더 강하고 가치 있는 자일뿐이다.

원정대원들은 문화도 버렸다. 굶주림과 갈증 앞에서 통할 언어는 따뜻한 술 한 잔과 말린 고기면 충분했다.

원정대원들은 자신이란 개념도 버렸다. 자신들은 단지 운명을 향해 맞서기 위해 왔을 뿐이다. 여정의 끝은 죽음뿐이다.

이제 너와 나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에게 필요한 걸 아낌없이 내주었으며 서로의 어깨와 무릎을 빌려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능력이 한 가지 뿐인 사람이건, 여러 개인 사람이건 맡은 직분에 종사할 뿐이었다. 그들은 이번 원정의 부품에 불과했다. 여태껏 몰아치던 눈폭풍 중 가장 위험하고 거대한 것이 닥쳐왔다. 순식간에 횃불을 꺼졌고 추위는 살을 파고 들어왔다. 일행은 순간 행렬을 멈추었으나 그들의 우두머리, 기사왕은 꺾이지 않고 눈폭풍 안쪽을 향해 백마를 타고 들어갔다.

패왕이 기사왕의 뒤를 따랐다.

고왕이 패왕의 뒤를 따랐다.

현왕이 고왕의 뒤를 따랐다.

덕왕이 현왕의 뒤를 따랐다.

모든 군주들이 결국 기사왕의 뒤를 따랐다.

귀족들이 군주들의 뒤를 따랐다.

병사들은 귀족들의 뒤를 따랐다

원정대는 자신들의 최후를 향해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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