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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4화 (234/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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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색 산맥의 협곡을 오르는 아르투르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산 아래로 방대한 레무리아의 평원이 보였다. 농부들이 바쁘게 일하며 수북하게 자란 곡식을 수확하던 그곳은 이제 눈과 서리로 뒤덮인 백색 들판이 되어있었다. 수많은 도시와 성채, 마을들도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처음으로 레무리아에 도착했을 때 이곳은 전쟁으로 상처 입고 황폐화된 땅이었다. 자신이 평화와 질서를 이루었건만 모든 것이 사라질 위기였다.

‘잘 있어라. 나의 왕국아. 내가 없이도 너만은 살아남아야 할 지어다.’

아르투르는 어느 때보다 깊은 비통에 빠진 채 고개를 돌렸다.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기사왕의 망토자락을 향해 끝이 보이지 않는 군인들의 행렬이 뒤따랐다. 각양각색의 깃발을 내건 이 군인들이야말로 종말의 신에게 맞서는 마지막 인간들의 의지였으며 모든 문명인들의 저항이었다. 문명인들은 눈보라와 혹한의 바람을 뚫으며 전진했다.

군대의 대다수는 이런 추위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두터운 짐승 가죽을 걸치고도 몸을 떨었고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을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군세가 회색 산맥을 지나고 있을 때, 경주마를 탄 전령이 급히 군세를 가로질러 급히 기사왕을 찾았다.

“폐하! 폐하!”

아르투르는 자신을 찾아온 전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젊다 못해 어린 사내였다. 경험 있는 유능한 사내들이 모두 원정군에 차출된 까닭에 이런 어린 아이를 전령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그는 허둥지둥 말에서 내려 무릎을 꿇으려 했으나, 아르투르가 아직 안장 위에 있는 그를 멈추어 세웠다.

“젊은이. 그냥 말 위에서 보고하게.”

“하지만 폐하를 뵐 때는 반드시 예법을 지켜야한다고….”

아르투르는 자신이 쓴 왕관을 벗어 땅으로 내던졌다. 이제 왕관은 머리를 무겁게 할 뿐인 쓸모없는 금덩이에 불과했다.

“지금은 아무 소용없는 것일세. 본론을 말하게.”

“어마어마한 북구인들의 함대가 지평선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이 우리 왕국을 침공하러 왔습니다. 돌아와 주셔야 합니다!”

아르투르는 가슴이 철렁거렸다. 모든 정예병과 기사들이 차출된 상황이었다. 본국에 남은 군대는 수는 많지만 경험이 부족한 자들뿐이었다. 기사왕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벌써 겨울이 깊어지고 있었다. 군대를 되돌린다면 다시 출정할 때는 훨씬 더 힘들어질 터이다.

“자네를 누가 보냈나?”

“케이 백작이십니다.”

“정확히 그가 뭐라고 했지?”

전령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적들이 몰려왔으니 원군을 보내주실 수 있는가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아르투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북구인들은 포로도 잡지 않고 전쟁의 관습도 지키지 않았다. 하물며 종말이 선포된 상황이라면 눈에 보이는 모든 걸 파괴하고 학살할 터이다. 전쟁에서 승리하고도 왕국이 남지 않을지도. 망설이는 기사왕은 다른 여덟 왕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들 역시 자신의 왕국과 가족들을 뒤에 두고 온 자들이었다. 그들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케이에게 내가 그를 믿고 있다고 전해라.”

기사왕의 말을 들은 전령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 하지만 이렇게 군대가 많습니다! 십만 명이라도 보내주십시오! 이대로라면 폐하께서 돌아오실 왕국이 남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폐하의 백성들이 폐하의 보호를 원하고 있단 말입니다!”

아르투르는 전령의 어깨를 꽉 잡고 시선을 마주보았다. 기사왕의 날선 시선에 소년이 위압되어 눈을 질끈 감았다.

“날 봐라. 소년. 이름이 뭐지?”

소년은 어렵사리 눈을 떴다.

“지스카르입니다.”

“지스카르. 지금 네가 직면한 시련이 감당하기 어려운 걸 안다. 하지만 견뎌야 한다. 견딜 수 없다면 견디다가 죽어라. 네 동료가 대신 견딜 것이다. 네 동료도 죽으면 네 남동생이 대신 견디겠지. 네 남동생마저 죽으면 네 어머니와 여동생이 대신 견딜 것이다. 끝까지 온 힘을 다해 싸워라. 내가 전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남들이 네 운명을 정해주었다는 걸 믿지 말아라! 싸워! 싸워! 끝까지 싸워라! 우리는 지금 존재의 증명을 위해 싸우고 있다! 우리가 살아왔다는 것을 남기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란 말이다!”

지스카르는 두려운 얼굴로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자, 돌아가라! 네 주군과 네가 알고 있는 모든 이에게 전해라! 이것이 너희들의 왕의 마지막 명령이다! 너희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견뎌라!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오! 삶을 움켜쥐려는 의지다!”

전령은 울먹일 듯한 표정으로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쾌속으로 질주하는 전령을 보며 아르투르의 가슴은 근심에 빠져들었지만 이내 그것을 지웠다. 자신이 이 자리까지 있기 위해 많은 희생이 있었다. 지금 와서 말고삐를 돌리는 일은 그들의 희생을 무의미하게 하는 일이 될 터이다.

“전군. 나를 따르라!”

아홉 나라의 군대는 비장하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앞으로 전진 했다. 군대가 북쪽으로 향할 때마다 겨울의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바람은 더욱 차가워지고 수북하게 쌓인 눈길을 치우면서 전진해야만 했다. 몸이 허약하거나 추위에 약한 이들이 가장 먼저 쓰러졌는데 특히 열대 지방에서 온 검은 피부의 주술사 왕과 그의 전사들이 그러했다.

“주술사 왕! 당신은 위대한 전사이지 않소! 적과 싸워보지도 않고 쓰러질 순 없소!”

주술사 왕은 자신을 급히 찾아온 아르투르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미 온 몸 가득 열이 오른 상태였고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몸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기사왕이 질병을 내몰고자 성검을 뽑아들었으나 열대의 왕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만 두시오. 기사왕. 아직 군대가 가야 할 길이 먼데 당신의 힘을 낭비하게 할 수는 없소. 지금 쓰러진 자들은 치유해봐야 며칠 가지 않아 다시 쓰러질 거요. 영원한 겨울의 힘이 너무나 강해 우리들의 주술은 통하질 않는군. 조상들의 곁으로 갈 때가 된 것 같소.”

아르투르는 이를 질끈 깨물었다. 주술사왕의 말은 타당했으나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우린 모두 소중히 여기는 것을 뒤에 남기고 왔소. 당신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하나도 원망하지 않소. 우리를 불쌍히 여긴다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이 자리에 묘비나 세워주시오. 용을 보지도 못하고 쓰러지는 게 안타깝군. 조상님들의 명예에 큰 먹칠이야.”

다른 왕들은 먼저 주술사왕에게 목례를 하고 마저 군대를 이끌기 위해 돌아갔다. 아르투르도 사실을 받아들였다. 자신은 그를 구할 수 없다.

“잔존한 병력은 내 동생이 이끌 것이오. 이제 그만 가보시오. 기사왕. 선두에서 눈폭풍을 헤치며 전진하는 당신이 없다면 아홉 왕의 군대는 나아갈 수 없소.”

기사왕도 목례를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주술사 왕은 그의 두터운 팔뚝으로 아르투르의 어깨를 탁-하고 붙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간절한 기원이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사왕. 부디 우리 세상에 승리를.”

아르투르는 결연한 눈빛으로 주술사 왕의 바람에 답했다.

“황천에서 봅시다.”

주술사 왕은 손목을 쥔 팔을 스르르 풀어냈고 기사왕은 막사를 떠났다. 아홉 왕의 군대는 여덟 왕의 군대가 되었지만 계속 전진했다. 며칠 지나지 않아 탈진과 동상으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자들이 속출했다. 그들은 눈폭풍 속에 버려두지 말라고 간청했다. 기사왕은 그들에게 의무병 대신 종군 사제들과 호위병들을 보냈다.

“형제님.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여정의 시작이지요.”

“지, 지금 우리를 버리고 가시는 겁니까?! 그러지 마십시오! 나을 수, 나을 수 있습니다!”

병자는 힘겹게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지만 이미 오른발이 동상에 걸린 바로 자빠져버렸다. 사제들은 당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그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이 평탄하길 빌었으며 구세주의 은총을 청했다. 그들을 위한 기도가 끝나자 사제들은 단검 하나만을 남긴 채 떠나갔다. 그들을 지나치는 병사들도 안쓰러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아니, 해줄 것이 없었다.

“가지 마십시오! 제발 저희를 거둬주십시오! 폐하! 저희가 당신을 섬겼건만 눈보라 속에 버려지는 것이 대답입니까아아아아아 -!”

아르투르는 버려진 자들의 저주와 절규를 들으며 겨울 속을 헤쳐 나갔다. 섬뜩한 분위기가 군대에 맴돌았다. 이미 여정을 시작할 때부터 모두가 느끼던 것이었다. 이 세상은 끝이 났고 그들은 더욱 고통스러운 죽음을 향해 걷고 있었다. 지금 도망친다면 편안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터이다. 처음에는 기사왕의 뒷모습을 보며 죽음까지 따르겠노라 맹세했던 의지는 버려지는 전우들을 보며 깨져나갔다.

수많은 병사들의 탈영이 이어졌으나 기사왕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그럴 인원도, 여력도 없었다. 불침번을 서는 병사들에겐 떠나는 자들을 그냥 내버려두란 지시가 내려졌다. 탈영을 해도 처벌이 없는 걸 알자 이번에는 더 많은 병력이 떠났다. 다음 날이 밝자 아르투르는 비어있는 막사들을 보며 분함으로 이를 갈았고 병사들을 향해 일갈했다.

“운명에 맞설 용기가 없는 자들은 떠나라고 해라!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내고야 말 것이다! 나의 형제자매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러면 어떤 살아있는 인간도 해내지 못했던 위업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남은 이들은 더욱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굳히며 기사왕의 행렬을 뒤따랐다. 그러나 결의가 겨울의 한기를 막아주지는 못했다. 전진하는 병사들은 바닥에 몸을 뉘인 채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는 전우들을 수없이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전우에게 베풀 수 있는 건 따뜻한 술 한 모금을 건넨 후, 자살의 죄를 피할 수 있도록 삶을 끝내주는 일이 전부였다.

그들은 전진한다. 산처럼 쌓인 눈더미를 가로지르며.

그들은 전진한다. 전우들의 시체를 밟고 넘어서.

그들은 전진한다. 오직 저 너머에 있는 운명을 목격하기 위해.

여덟 왕의 군대는 전진한다. 그들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영원한 겨울도 그들의 행군을 막지 못했다. 하지만 시련은 아직 가득했다.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하늘은 어두워졌으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어둠이 내려앉았다. 낮과 밤의 차이가 사라지고 눈보라는 더욱 거세어졌다. 수많은 병사들이 쫓아갈 방향을 잃고 혼돈에 빠졌다. 혼돈에 빠지자 결의가 흐릿해지고 절망이 엄습해왔다.

어둠 속에서 황금의 빛이 번쩍였다. 찬란하게 빛나는 기사왕의 성검이 어둠을 내몰고 빛을 밝혔다. 절망은 사라지고 결의가 되돌아왔다. 모두는 기사왕이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기사왕은 세상의 종말이 눈앞에 있더라도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그를 저버려도 혼자서 어둠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숨이 쉬어지는 순간까지 최후의 적을 향해 돌격할 것이다.

기사왕의 명예가 그들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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