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케이는 아르투르의 오른발을 붙잡고 강철 장화를 신겨주었다. 아르투르는 오른쪽 무릎까지 와 닿는 차가운 강철의 감촉이 느껴졌다. 다음은 왼발의 장화였다. 눈처럼 새하얀 백색 흉갑을 착용하자 케이가 이음새를 잠궜다.
어깨 보호대와 팔 보호대, 건틀렛을 차례로 착용한다. 그 때마다 얼음처럼 차가워진 강철이 자신을 괴롭게 했지만 지금은 그저 자신의 의식을 뚜렷하게 해줄 뿐이었다. 어깨부터 발목까지 강철로 보호 받게 된 기사왕은 케이와 눈을 마주쳤다.
당돌한 양치기 소년이던 케이는 이제 허리에 찬 장검과 호화로운 의복이 제법 잘 어울리는 귀족 청년이 되어있었다. 겉모습만 그런 게 아니었다. 케이 백작은 여러 제후들 가운데서도 가장 입김이 센 그룹에 속했었고 3천만에 이르는 수많은 사람이 사는 왕국을 통치할 능력을 갖춘 재상이었다. 기사왕은 대견한 눈빛으로 옛 종자를 바라보았다.
“네게 뒤를 맡기고 갈 수 있어 다행이다. 케이.”
케이는 씩씩한 태도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스터 덕에 이렇게 출세했는데 빵값은 해야죠. 돌아오실 날까지 왕국을 안전하게 지키고 있겠습니다.”
“이미 빵값 이상은 하고도 남은 것 같구나. 이 뒤로 네가 왕실을 위해 하는 공헌은 빚으로 달아두어라.”
아르투르는 케이의 손아귀에서 투구를 낚아챘다. 왕관을 걸기 위한 홈이 파여있는 이 뿔투구는 붉은 용의 형상을 본따 만들어져 무척 눈에 띄었다. 어디서나 왕의 병사들은 기사왕이 선두에서 싸우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리라.
“마음에 드십니까? 마스터 에렌이 투구에 유난히 신경을 썼다고 하더군요.”
아르투르는 투구의 장식을 보면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두라노 인들은 나를 실망시키는 법이 없군.”
왕은 세심히 투구의 장식을 매만지다가 머리에 썼다. 자신의 머리 크기에 딱 맞게 제작된 투구답게 조금의 거슬림도 없이 매끄럽게 들어갔다. 아르투르는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마음에 들었다. 아르투르는 이제 왕궁의 문을 향해 걸어갔다. 두라노 출신의 근위병들이 장창을 높이 들어 올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왕이 나타나자 창으로 땅을 치며 환호했다.
“기사왕! 기사왕! 기사왕!”
“하하하하하! 자네들, 지금 죽으러 가는 건 알고 있나?”
경쾌한 웃음소리를 낸 아르투르를 보며 근위병들을 이끄는 조레스 대장이 히죽 웃었다.
“폐하와 함께라면 지옥으로 가는 길도 환영입니다.”
“우린 천국으로 갈 걸세. 조레스. 내 어머니가 거기 계시거든.”
“그렇다면 더 두려워할 게 없지 않겠습니까?!”
조레스의 우렁찬 목소리를 들은 기사왕은 기분이 좋아져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왕성을 나섰다. 케이가 계속 뒤를 따르자 기사왕이 뒤를 돈다.
“돌아가지 않고 뭐하느냐? 케이. 군통수권자는 항상 왕성에 대기하고 있어야한다.”
“도시 바깥까지라도 환송하고 싶은데요.”
“부끄러움 많은 소녀처럼 굴지 말고 돌아가라. 네 자리를 지켜라. 케이. 감정을 억누르는 것도 전쟁의 일부라고 내가 가르쳤잖느냐.”
능청스런 아르투르의 말에 울컥하는 감정이 케이의 가슴을 때렸다.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려는 감정을 강제로 절제했다. 자신은 기사왕의 종자였다. 그러니 의무를 행하며 감정을 노출하는 나약함 따위는 보여서는 안 된다. 마스터를 보아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차오르는 감정은 쏟아낼 곳이 없다.
“폐하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셨습니다.”
“너 역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즐거웠다. 케이.”
케이는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고 아르투르는 결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기사란 싸우는 자. 남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드넓은 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따위는 보여줄 필요 없다.
에쿠잘루스에 탄 기사왕의 뒤로 왕실 기사들과 근위병들이 행군했다. 피오렌치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시내로 나와 기사왕을 맞이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백합이 융단처럼 뿌려졌다. 이따금 가족이 있는 병사들이 행렬에서 이탈해 가족들과 포옹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장교들은 이탈자들이 행렬로 돌아올 것을 강요하지 않았으나 모든 병사들은 결국 자신의 부대로 돌아왔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따뜻한 난로 곁에서 빵을 먹으며 버티기 위해선
누군가는 저 혹독한 눈보라 속으로 진군해야만 했다.
누군가가 종말이 빗겨나가기를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 기도가 실현될 수 있도록 종말과 싸우러 가야만 했다.
자신들은 그런 사명을 짊어진 자들이었다.
“마르코 대장님. 신을 상대로 인간이 싸워서 이긴다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일까요?”
정말 평범하지만 용기 있게 살아온 한 병사가 자신의 고향을 바라보았다. 죽어야한다면 고향에 뼈를 묻고 싶었다.
“안토니오. 우리 중 누가 신을 만나보았겠는가? 그저 눈앞에서 마주할 뿐이지. 가만히 앉아 있다가 죽는 것보다는 낫잖아. 자식들을 위해 뭔가를 하려고 가는 것일 뿐이야.”
“헤. 그러네요. 역시 대장님은 똑똑하십니다. 토끼 같은 아내와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죠. 갑시다! 가요! 저기 폐하도 맨 앞에 계시네!”
수도의 도개교를 건넌 아르투르는 자신을 기다리던 군세를 마주했다. 아르투르가 나선 것을 확인한 힐데군드는 진격의 뿔나팔을 불었다. 최후의 순간 자신들이 믿는 신을 배신하기로 결정한 북구인들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아르투르의 편에 선 북구인들의 동기는 다양했다. 문명을 선망하는 자, 자신의 운명을 신들이 정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도끼라도 한번 던져 보려는 자, 단지 최후의 전쟁에서 더 어려운 편에서 싸워보고 싶은 자들이 대표적이었다.
힐데군드의 경우는 세 가지 모두였다. 아르투르가 피오렌치아를 보며 회한에 잠겼을 때 그녀의 유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보다 늦게 왔네. 막상 떠나려니 두려웠나보지?”
“그래. 두렵긴 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다. 단지 내가 이룩한 모든 것이 사라질까 두렵더군.”
모두가 장례식에 온 것처럼 숙연한 분위기지만, 이 북구의 여전사만은 여전히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 네가 이룬 모든 것도 먼지 속으로 사라질 거야. 그러니 사후 따윈 생각하지 말고 지금을 즐기라고. 그런 똥 씹은 표정을 짓는 대신 눈보라에 귀를 기울여봐. 안칼라타르의 포효가 들려온다. 신들의 울부짖음과 저주가 들릴 거라고. 그들은 문명을 파괴하고 이 세계로 돌아오고 싶어 하고 있어.”
아르투르는 성검의 환시를 통해 그녀가 말한 걸 모두 듣고 있었지만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자신의 감정은 평생을 떠돌며 원하는 대로 살아온 그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일 터. 이야기를 해봐야 기력 낭비일 뿐이었다. 기사왕은 옛 연인을 내버려둔 채 행렬의 선두로 에쿠잘루스를 몰아갔다.
등 뒤에서 올리는 발걸음 소리가 워낙 웅장해서 고개를 돌아보니 어마어마한 수의 군세가 자신을 따르고 있었다. 수만 많은 게 아니었다. 사막의 전차들과 초원의 기마전사들, 불의 마술사, 재규어 가죽을 뒤집어쓴 원시전사들, 머리를 민 전투 수도승, 십자가의 기치를 내건 광신도들과 열대 지역에서 온 강골을 자랑하는 검은 피부의 전사들, 그 외에도 모두 열거하기에 너무나 많은 무리가 자신의 깃발을 따르고 있었다.
이렇게도 거대하고 다양성이 넘치는 무리를 지휘할 자는 이전에는 물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은 아르투르를 자랑스럽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분히 긴장하게 만들었다. 자신이 할 줄 아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누구보다 앞으로. 모두가 자신의 등을 따를 수 있게끔 하는 것뿐이었다. 에쿠잘루스의 발걸음이 빨라질수록 군대의 행군 속도도 빨라졌다. 어느 사이 레오폴트는 자신의 곁으로 말을 몰아왔다. 아르투르는 응대해줄 기분이 아니었기에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여어. 아르투르.”
기사왕은 고개를 무심히 돌려 사촌을 바라보았다.
“?”
“우리 이제 할배야.”
“시답지 않은 소리나 할 거면 썩 뒤로 가라.”
아르투르는 표정을 찌푸리며 대충 손짓을 했지만 레오폴트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보였다.
“오늘 출정하기 전에 딸아이와 만나고 왔어. 임신했다고 하더군.”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깨만 무거워지는 기분이군.”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이지. 웃을 땐 웃으면서 하자고.”
레오폴트는 아르투르에게 유리잔에 얼큰한 럼주를 담아서 건네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럼주를 단숨에 목구멍으로 넘겼다. 몸에 취기가 돌면서 추위가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나아진 아르투르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러게.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두 왕조의 경사가 되었을 테지.”
레오폴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되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돌아가서 손자손녀들 앞에서 옛날이야기나 들려주면서 늙어가자고.”
두 왕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제는 할아버지가 된 사람들이었지만 두 사람은 서로가 조그마한 꼬마 아이에 불과했던 시절도 기억했다. 두 사람의 기억은 함께 시작한다. 왕궁의 놀이터에서 흙덩이를 집어던지던 것이 두 사람의 인생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두 사람은 나이가 같았기에 정확히 같은 해에 마스터 나이트의 종자로 들어갔다.
그들은 함께 죽도록 고생하면서 협력을 배웠다. 그 다음에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동갑에 비슷한 혈통이었기에 한 명이 조금이라도 모자란 모습을 보이면 주변의 손쉬운 비교 대상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육체 능력은 대체로 아르투르가 앞섰다. 그러나 사람을 대하고 머리를 쓰는 능력은 레오폴트가 대체로 앞섰다. 두 사람은 각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상대의 장점을 압도하기 위해 격렬한 경쟁을 벌여왔다.
“아. 공개 대련에서 너한테 죽도록 깨지고 마스터한테 엄청 혼났었지. 그 뒤로 검술의 기예만큼은 따라잡겠다고 손에 피가 날 때까지 휘두르던 게 생각나네. 그 때가 열두 살이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너무 불공평한 경쟁 아니냐?”
“이놈아. 넌 그때부터 정치 감각이 남다르단 평가를 들었잖아. 난 돌대가리란 이야기만 들었다고. 너 따라하겠다고 밤새도록 고대어 사전을 뒤적여가며 옛 영웅들의 일대기를 읽었다고.”
두 사람은 그 뒤에도 평생에 걸쳐서 경쟁해온 이야기를 했다. 소년 시절에는 기사로서 더 뛰어난 자질을 보인 아르투르의 우세였다. 그런데 청년이 되고나니 레오폴트는 어머니를 닮아 대단한 미남이 되었고 가슴을 졸이는 쪽은 아르투르가 되었다. 아르투르가 좋아했던 여인들은 모두 레오폴트와 친해지길 바랐고 그 덕에 아르투르는 수련에만 전념해야 했다.
“아, 지금 생각하니까 빡치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뭐래냐. 가정만 세 개인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는 건 억울하다.”
한 여자를 두고 죽일 듯이 싸우던 것도, 서로의 신분을 부러워하며 술로 밤을 지새우던 것도, 서로의 정의가 달라 전쟁을 벌였던 일도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가 되었다. 두 사람의 운명은 마침내 맞닿았으며 완벽히 일치되는 공동의 목표와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하게 되었다. 두 자신만만한 군주들은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누군가 이에 도전한다면 분쇄할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말이다.
아르투르와 레오폴트는 고삐를 거세게 잡아당기며 북쪽을 향해 질주했다.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