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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는 성검의 빛을 선보인 후, 엘라카르시스가 자신에게 남겨준 생명의 힘을 보여주었다. 아르투르는 누구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을 아홉 왕들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그들은 종말의 용이 쓰러질 때까지 모든 힘을 다해 아르투르를 돕겠다고 맹세했다.
아홉 왕들은 곧 바로 군사 작전을 계획했다. 병력만 50만에 이르니 먹이고 재우고 이동하는 간단한 일조차 정밀한 계획과 노련한 지도자가 필요한 과업으로 변했다. 이렇게 많은 병력이 한 번에 진군할 수는 없으니 수 만 단위의 분견대로 나뉘어 떠나야만 했다. 각 군대에는 개별적인 군대의 지휘관을 임명하고 시간표에 맞춘 진격로를 설정했다. 아르투르가 사전에 미리 준비해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기사왕. 날씨가 계속 추워지고 있소. 가만히 주저앉아있다간 싸워보기도 전에 우리 군대의 마필들이 모두 얼어 죽을 거요.”
초원의 제왕의 말에 기사왕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아직 동원되지 못한 군대와 도착하지 않은 왕들이 많았다. 하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었다. 지금쯤이면 이미 북구인들의 군세가 데네토르를 침공하고 있을 터이다. 눈보라는 시간이 지날수록 거세지니 통행과 보급 모두 힘들어질 것이 뻔했다.
“모두에게 알리시오. 내일 아침에 진군을 시작하겠소.”
모든 병력들이 내일의 행군을 준비하고자 모여들고, 각자 방한 장비를 챙기거나 최후의 기도를 올리는 동안 아르투르는 마지막으로 모든 왕실 가족들과 봉신들을 소집했다. 이제 대부분의 영주와 주요 병력들이 회색 산맥을 넘어갈 것이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아마 자신도 그렇겠지.
“왕비. 당신은 테라일이 스무 살이 넘을 때까지 섭정으로서 나라를 다스리시오. 당신은 훌륭한 왕비였고 어머니였소. 잘 지내시오.”
샤를로트 왕비는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폐하의 업적이 영원토록 전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업적의 일부분이라도 남으면 다행이리라. 두 사람은 잠시 동안 서로 눈을 마주보았다. 여러 감정과 생각들이 전해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통해 단점을 보완해서 성공적인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공헌에 대한 고마움을 가지고 있었으며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었다는 동지 의식이 있었다. 더 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그들은 새로운 왕조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한 쪽이 죽어도 이어지리라. 그걸 확인한 것으로 족하다.
“케이. 너는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왕국을 지키라.”
“폐하. 그 명령은 부당하십니다! 마스터가 전장에 나가는데 종자가 따르지 않는 게 말이 됩니까?!”
아르투르는 문득 고개를 숙여 케이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 보았다. 둘은 강력한 친애와 신뢰의 감정으로 엮어있었고 서로를 세상의 누구보다 신뢰했다. 가족에게조차 털어놓지 못하는 일을 상담할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는가.
“케이. 나는 내 왕국과 가족을 맡길 사람이 필요한 거다. 아직 왕자들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샤를로트건 아델라이데건 군대를 이끌 줄은 모른다고. 나도 네 심정을 안다. 하지만 누군가는 돌아올 집을 지켜야 해.”
아르투르의 명을 잘 따라온 케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지면 돌아올 집조차 사라질 텐데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제가 함께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오. 제 운명이 결정될 전투에 저도 참여하고 싶습니다.”
아르투르는 절절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케이. 너는 전장에 나가지 않는 게 아니야. 내가 우리의 절망을 파괴하러 가는 동안, 너는 우리의 희망을 지키고 있는 거다. 나는 싸움에서 돌아와 왕국이 혼란과 무질서로 폐허가 되어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내가 믿을 만한 사람이 집을 지키고 있지 않다면 싸움에 집중할 수 없을 거야. 부탁한다. 집을 지켜다오. 희망을 지켜줘.”
케이는 왕의 말에 담긴 무게를 알았기에, 더 이상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못했다.
“맹세코 제 힘이 다 할 때까지 폐하의 왕국을 지키겠습니다. 이제 왕국은 저와 모두의 희망을 담은 것입니다. 또한 폐하 역시 더 이상 개인이 아니십니다. 모든 백성들의 염원을 받는 존재이지요. 그러니 반드시 돌아오십시오. 왕국은 언제까지고 폐하를 기다릴 겁니다.”
아르투르는 쓰디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 하겠다.”
아르투르는 궁정에 있는 왕실 가족들과 꽤 많은 시간을 보냈다. 왕국을 경영하고 남는 시간엔 자신의 삶을 살아가느라 후계자 교육 외에는 거의 신경 쓰지 못했던 아이들이었다. 아버지와 자녀들 간의 못 다한 정이 아쉬웠지만 이제 와선 돌이킬 수도 없다.
아니지. 당시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은 없다. 군대를 이끌고 행정망을 정비하며 외국의 군주들을 만나는 일정이 반복되는 삶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까지 해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돌아오실 건가요?”
딸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동자에 아르투르는 덤덤히 답했다.
“모르지. 어려울 거다.”
그의 대답을 듣고 울상이 된 아이도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덤덤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며 자신이 패배할 경우 그들이 모두 어떤 운명을 맞이할 지도 전했다. 아이들이지만 하나도 가감 없이, 오직 진실만을 전했다.
이 아이들은 왕조의 일원들이었다. 세상은 황금 관을 쓰고 태어난 아이들의 어리광 따위는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어려운 시기에 어려운 의무를 도맡았으나 그것 역시 이들의 운명이리라. 이제 당부의 말을 남기고 떠날 시간이었다.
“특히 테라일과 페르넬. 너희는 우리가 기사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너희의 명예와 가족이 위험에 처하거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한다. 너희 선조들이 그렇게 해왔고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너희도 그렇게 해야만 할 거고.”
“네. 아버님.”
왕세자는 당당하게 답했지만 아직 어린 페르넬 왕자는 섣불리 답하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공주들을 한번 씩 포옹한 뒤 왕궁을 떠났다. 울음소리가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진 않았다. 이 싸움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발걸음이 무거워져서는 안 된다.
다음으로는 정부인 엘로디와 아델라이데 후작 부인을 각각 방문했다. 그들과의 이야기는 더 가족적인 주제로 진행되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서슴없는 거짓말도 기분 좋게 남겼다. 사생아로 태어나서 같은 신분을 물려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마련해준 것으로 양심의 가책을 덜었다. 그들은 귀족 사회에 자리 잡고서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나갈 기회가 있을 터이다.
문명이 멸망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꼭 가셔야 하나요?”
떠나려는 아르투르를 붙잡은 건 아델라이데 후작이었다.
“이번 출정은 당신과 프리드리히를 위한 것이기도 하오.”
아델라이데의 눈동자가 물기로 촉촉해졌다. 그녀는 아르투르를 붙잡을 수 없음을 알았고 그래서도 안 되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보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어떤 억지를 써서라도 붙잡아두고 싶었다. 작위도, 세상도 필요 없었다. 아르투르와 함께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마음이 더 흔들리기 전에 그를 보내줘야 했다. 자신이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아르투르의 마음만 힘들어질 뿐이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았다.
“당신과 함께 했던 세월들은 진정으로 신의 축복이었답니다. 당신이 왕이거나 최강의 기사여서가 아니라 그냥 당신이 있었기에 행복했었어요. 아르투르.”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를 올려다보다가 이내 아르투르의 목을 감싸 안은 뒤 입맞춤을 했다. 길고, 격정적이며, 사랑에 찬 입맞춤이 길게 이어졌다.
“언제나 당신에게만 죄만 짓고 가는 것 같소. 아델라이데.”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늘 당신은 내가 베푼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베풀었지. 더 많은 양으로 보답해주지 못해서 미안하오.”
“저는 대가 따위는 바란 적이 없답니다. 그저 당신께서 제게 관심을, 호의를 베푸신 것에 신께 감사드릴 뿐이에요. 제 삶은 그것만으로도 행복했었습니다.”
***
기사왕은 행렬과 함께 궁성의 한 주택을 방문했다. 좋지도 않지만 나쁘지도 않은 정원이 딸린 평범한 주택이었다. 왕의 방문을 맞이한 주민들은 양 옆으로 갈라서서 황송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왕의 행렬과는 어울리지 않는 촌부들이었다.
“근위 기사들은 집으로 들어오지 말고 대기하라. 재상만 따라오도록.”
집으로 들어가자 쭈글쭈글한 노파가 그들을 맞이했다. 고개를 숙이려는 그녀를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어 제지했다.
“되었소. 동생은 어디 있소?”
“위층에서 폐하를 기다리고 있답니다.”
두 사람은 아이의 안내에 따라 나무 계단을 오른 후, 복도를 지나 끝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끼이이익 -
방에는 커다란 네모난 침대 위에 몸을 뉘인 노인이 있었다. 노인은 기형적일 정도로 발달되어있던 그의 등근육마저 쪼그라든 상태였다.
“카밀.”
기사왕의 무게감 있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셨군요.”
답하는 노인의 목소리에는 힘이 가득 빠져있었다. 아르투르와 케이는 병상으로 다가섰다. 카밀의 얼굴은 이미 새파래졌고 침상은 반복된 각혈로 핏빛으로 물들어있었다. 기사왕은 여신이 남겨준 생명의 권능을 통해 카밀을 엿보았다.
오래 전부터 앓아온 지병이 혹독한 겨울을 만나 터져 나오고 만 것이었다. 카밀도 알았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무에만 충실했다. 이제 와서는 권능을 사용하더라도 고통의 시간만 길어질 뿐,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리라.
세월에 지친 노병은 몸도 마음도 더 이상 죽음에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그는 완전히 마모된 것이다. 돌이킬 수 없게 닳아버린 그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다.
“긴 삶이었군요.”
노병은 긴 삶을 회고하며 표정을 찡그렸다. 고된 풀뿌리 같은 삶을 반복해온 그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농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고된 노동만을 반복하며 살았다.
운 좋게 마음이 맞는 동네 처자를 만나 함께 가정을 꾸렸으나 북구인들이 침공해 와서 끌려 나갔다. 피바다를 건넌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보니 가족은 영주의 망나니 아들에게 살해당해있었다.
“가족을 잃은 이후의 삶에는 쓰라린 고통만이 있었지요. 간혹 악인들을 처단하며 느끼는 비틀린 즐거움이 즐거움의 전부였을 뿐, 저는 이미 살아있는 시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하루, 세상과 신을 저주하며 살아갔을 뿐입니다.”
아르투르와 케이는 각각 카밀의 손을 붙잡은 채 그와 눈을 마주했다. 하지만 나는 새도 쏘아 맞추던 명사수는 이제 눈이 멀어 코앞도 볼 수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당신들과의 삶은 즐거웠습니다. 제 첫째 아들과 막내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두 사람과 비슷한 나이였겠지요. 그래서 당신들을 통해 제 아들들을 떠올리며 살아왔을 뿐입니다. 이제야 진실을 말할 수 있겠군요. 아르투르. 당신이 절 구해주신 건 고맙긴 했지만, 그저 목숨을 하나 빚졌을 뿐, 달라질 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제 삶에는 희망이 없었거든요.”
콜록. 콜록. 노병은 피를 토하며 괴로워했으나 두 사람은 침착히 그의 말을 기다려주었다.
“하지만 농노를 위해 같은 계급과 싸워주는 기사가 있다는 것이 제 삶의 희망을 새롭게 만들어냈습니다. 당신들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도 모른다고 기대한 거지요. 나의 기대에 부응해주어서 고맙습니다. 불충한 언행을 용서하십시오. 제 봉사는 여기까지니까요.”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아르투르가 입을 열었다.
“불충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왕국을 위해서도 헤아릴 수 없는 노고를 바쳤습니다. 범죄자들은 당신을 두려워하지만 선량한 평민들은 당신을 찬양하지요. 제게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귀를 여는 법을 가르쳐준 자가 당신입니다. 우리 모두는 같은 사람이지요. 죽음 앞에선 평등합니다.”
“당신에게 그런 말을 듣게 되니 진정으로 기쁩니다. 이제 저의 봉사가 끝났으니 도로 가져가십시오. 기사왕이여.”
카밀은 숨을 몰아쉬며 침대 곁에 있던 붉은 용의 문장이 새겨진 장검을 내밀었다. 케이는 그걸 조심스레 받아든다.
“당신은 여태껏 어느 전쟁에서도 패한 적이 없지요. 이번 전쟁에서도 그리 하십시오. 쿨럭. 당신은 그렇게 해낼 겁니다. 해내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가 만든 세상을 위해서요.”
카밀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괴로워하며 천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늘이 열립니다! 호수의 여신께서 제게 손을 내미시는군요. 그분의 곁에는 가족들이 절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멜다! 월리엄! 루퍼트! 오오! 여신이시여! 저를 거두소서!”
하늘을 향해 내뻗던 노병의 손이 땅을 향해 떨어졌다. 숨은 멎었고 적막만이 흘렀다. 아르투르는 성호를 그었고 케이는 곁에 있는 노파의 손을 잡고 함께 노병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생명의 여신이시여. 우리들의 어머니시여. 부디 망자의 안식을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