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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31화 (23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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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의 선언에 가장 먼저 응답한 자는 레오폴트 왕이었다. 그는 강철의 규율을 자랑하는 공포의 군대를 모두 데리고 왔다. 그와 협력 관계에 있던 동방의 마술사들도 함께였다.

“아르투르. 이번에도 내가 제일 먼저 도우러 왔군.”

레오폴트는 군마에서 세차게 뛰어내린 후 악수를 청했고 아르투르는 서슴없이 사촌의 손을 맞잡았다.

“널 믿고 있었다. 레오폴트.”

“헹. 믿기는 무슨. 어쨌든 우리 사이에 여러 불일치가 있었지만 말이야. 결국은 이렇게 손을 맞잡게 되는군.”

레오폴트와 그의 측근들은 특이하게도 모든 가족들을 대동하고 왔다. 그들은 난리가 끝날 때까지 아르투르의 궁정에서 머물게 되었다. 아르투르는 딱히 이유를 묻진 않았지만 이유는 잘 알 수 있었다. 레오폴트는 종말이 다쳐오자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들을 모두 잔인하게 쓸어버렸다. 그러니 가족을 뒤에 남겨두고 올 수는 없는 법이었겠다.

지원군을 기다리는 동안 아르투르는 기사로서의 초심을 되찾는데 집중했다. 지금은 자신의 모든 역량이 시험을 받을 시간이었고 이전의 날카로움을 반드시 되찾아야만 했다.

아르투르는 힐데군드를 비롯한 최강의 기사들과 하루도 쉬지 않고 싸움을 계속하며 감을 되찾았다. 실전을 방불케 하는 처절한 훈련과 대련이 이어졌다. 대련에서 정말 목숨이 오가는 경우도 생길 정도였지만 사고는 벌어지지 않았다. 모두가 극도로 긴장하고 있던 덕이었다.

한번 기사왕이 감을 되찾자 더 이상 힐데군드에게 밀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해나갔다. 몸의 군살이 사라지자 행동도 한층 민첩해졌다.

이제 아르투르는 새로운 경지로 올라선 걸 깨달았다. 젊은 시절의 상태를 되찾은 건 물론 오랜 경험이 더해진 덕이었다. 거기에 여신이 물려준 힘마저 흐르고 있었다.

다른 대륙의 왕들이 하나 둘 도착했다. 그들 가운데는 아르투르가 알고 지내던 자도, 풍문으로만 듣던 먼 나라의 군주도 있었다. 통역 없이는 대화가 불가능한 사이였지만 아홉 왕들은 서로에게 가족보다도 짙은 동질 의식을 느꼈다.

세상의 운명이 그들의 어깨에 걸려있었다.

이곳에 참가한 군주들은 종말이 멈추는 날까지 함께 하겠다며 자신과 모든 선조들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다. 다음으론 총사령관을 뽑기 위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종말의 군세에 맞서는 군대의 지도자로는 본인이 적합하오. 본인이 가장 강한 무력을 가졌을 뿐더러, 지휘관으로도 가장 명성이 높기 때문이오.”

아르투르는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서 당당하게 외쳤으나 다른 군주들도 자신이 적격자라고 주장했다. 아홉 명의 왕들은 모두 자신의 지역에선 가장 위대한 군주로서 존중 받는 자들이었기에 자신들의 정당성을 굳게 믿고 있었다. 레오폴트만은 기권하고 아르투르를 지지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합의가 이뤄지지 못했다.

서로 말 다툼이 끝나지 않자 지켜보던 교황 우르술라 2세가 방안을 제시했다. 무력, 용병술, 덕망, 신성함의 네 가지 분야에서 경합을 해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자를 총사령관이자 왕들의 왕으로 추대하자는 제안이었다. 우르술라 2세는 현명함과 공명정대함으로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기에 모두가 수긍했다.

첫 번째, 무력의 경합이 열렸다. 이곳에 모인 이들 중 용장으로 소문나지 않은 자가 없었다. 하지만 모두 아르투르의 일격에 기절해버렸고 그나마 합을 겨뤄볼 수 있는 건 패왕 레오폴트와 초원의 정복자인 마왕(Horse King)뿐이었다. 정작 두 사람은 아르투르의 실력을 보자마자 칼을 내던지며 경합은 끝이 났다.

두 번째, 용병술의 경합이 열렸고 각자의 전과와 체스 게임을 통해 용병술을 엿보기로 했다. 아르투르의 첫 상대는 노왕(Old king)이었다. 그는 신들의 피가 흐르는 고대왕들의 후손으로 200년이 넘는 삶을 살아온 기인이었다. 백성들은 그들의 왕을 파라오라고 부르며 신왕으로 숭배하였다.

“괜찮겠나? 젊은이. 이 늙은이가 체스 게임만큼은 너무 오래해서 말이지.”

살아 움직이는 게 신비할 정도로 삭은 노왕의 갈라진 목소리가 은근히 거슬렸지만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다.

“오래 했다고 잘하는 거면 체스 챔피언은 모두 백발이겠군. 나도 체스라면 자신 있지. 워낙 져본 적이 드물어서 말이오.”

“흠. 어디 보겠네.”

노왕은 사막에 고인 석유를 연상케 하는 실력으로 체스를 두었다. 모든 행보가 정석 그 자체였다. 판이 진행될수록 아르투르의 장기말이 적어져갔다. 노왕이 웃으며 현존하는 체스의 계보는 다 자기가 만든 거라며 의기양양하게 웃을 때, 아르투르는 남은 장기말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노왕은 껄껄 웃으며 받아쳤다.

“이제 어쩔건가? 자네에게 남은 장기말은 둘 뿐…….”

노왕의 표정이 굳었다. 기사왕은 자신의 모든 장기말을 내던져 왕을 칠 기회를 노린 것이었다. 노왕의 왕이 공격당했고 구석으로 피했으나 그곳에는 이미 아르투르의 기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체크메이트.”

노왕은 얼굴을 찌푸리며 왕을 쓰러뜨려 패배를 인정했다.

“노왕께선 현대 체스의 창시자일지는 모르나 정작 최신 기보를 익히시는 건 게을리 하셨군요.”

노왕의 표정은 매우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아르투르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다음 상대는 마왕이었는데 이전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아주 의욕적이었으나 5분 만에 책상을 뒤엎었다.

“기사왕! 게임 좆 같이 하지 마시오!”

“칭찬 고맙네. 마왕.”

마왕은 부정행위로 실격패를 당했다. 마지막 대결은 고산을 다스리는 현왕과의 게임이었다. 현왕은 아홉 왕 중 둘 뿐인 여왕으로 국력과 무력이 상대적으로 열세함에도 현명함과 아름다움으로 다른 군주들의 존중을 받는 자였다. 그녀의 지성은 비상하다 못해 비인간적인 수준이었기에 아르투르는 순식간에 궁지에 몰렸다.

‘이거 완전 테라일 녀석이랑 체스 두는 기분인데.’

현왕이 손만 움직이면 게임이 끝날 것이기에 아르투르가 기권하려는 순간 현왕이 먼저 자신의 왕을 쓰러뜨렸다.

“당신이 이기셨습니다. 기사왕.”

현왕의 자신에 대한 지지선언에 아르투르는 감사를 표했다. 덕망의 경쟁은 투표로 이뤄졌다. 평소에 신망이 높고 호혜적인 관계를 맺었던 왕들이 유리했다. 아르투르는 패왕과 현왕, 마왕이 자신을 지지했을 때 무난한 승리를 예상했다. 그런데 자신이 모르는 극동의 왕이 똑같이 3표를 받으며 경쟁자로 급부상했다.

덕왕은 후덕한 몸매를 지닌 노년의 사내였다. 모름지기 군왕이 갖춰야 할 전사다운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손에는 굳은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칼보다는 책을 가까이 했으며 평소에는 말을 타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가마를 타고 다니는 자였다. 용과 싸우기는커녕 뱀 한 마리나 잡을 수 있을 지 의아한 사내였다. 다른 왕들은 그를 동오의 덕왕이라고 불렀다.

“현왕. 대체 왜 덕왕이 동쪽 세계에서 인기가 좋은 것이오?”

아르투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극동 사람들은 군왕에게 성자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중원을 다스리는 엄씨 왕조는 그런 기대에 부응해온 유서 깊은 왕조고요. 동오의 덕왕은 3대에 이르는 동안 군대를 일으켜 타 국의 영토를 범한 적이 없었고 이웃나라에 환난과 기근이 들면 대가 없이 도움을 베풀었습니다. 무도한 야만의 무리가 침공해 와도 풍부한 물자와 인의예지로 교화하여 다스리니 덕으로는 어찌 비길 자가 있겠습니까?”

“호구 새끼네. 호구 새끼. 아주 그냥 용한테도 조공이나 바쳐서 돌려보내지 그러냐?”

패왕 레오폴트가 혀를 찼고 마왕도 고개를 강하게 끄덕여 동의했다.

“자기는 짐승새끼 한 마리 못 죽이면서 걸핏하면 성현의 도니 어쩌니 하면서 가르치려 드는 밥 맛 없는 새끼요. 차라리 확실한 강자인 기사왕이 낫소.”

결국 표는 동등한 4:4였다. 마지막 남은 왕인 노왕이 누구에게 투표할 건지로 모두 시선이 쏠렸다. 기사왕과 덕왕이 각자 자신이 왜 지도자가 되어야 하는지 그를 설득했다. 기사왕은 덕왕이 자신감이 없어서 군대를 이끌 수 없을 거라고 했고 덕왕은 기사왕이 오만하여 일을 그르칠 수 있다고 했다. 그 외에도 두 사람이 서로 상호 비방전을 벌이고 있을 때, 노왕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지지 선언을 했다.

“나, 노왕이야말로 가장 덕망을 가진 군주다. 신들의 피를 이었으니 그보다 더 큰 덕망이 어디 있겠느뇨? 짐은 왕 중의 왕이자 멤피스의 세습군주로서…….”

노왕의 장황한 선언을 들은 모든 왕들이 표정을 찌푸렸다. 주변 국가의 영토와 재물을 탐하기로 유명하던 고왕에게 무슨 덕이 있단 말인가?

“노왕은 섬기지 않는다! 노왕은 지배한다!”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이번 승부의 결과는 보류해둔 채 마지막 경합인 신성성의 승부로 넘어갔다. 어차피 3승을 획득하면 끝이 날 일이었다. 신성성의 시험이란 간단했다. 모든 왕권의 근거는 신성함이니 스스로의 혈통이나 작위가 얼마나 신성한 지 증명하면 될 일이었다.

가장 먼저 나선 자는 덕왕이었다. 그는 다색을 내뿜는 구슬을 꺼내며 자신이 천하를 다스릴 자격이 있다고 선언했다. 다색의 구슬에는 비를 내리고 강물을 잠잠하게 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질병을 물러가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모두가 덕왕의 기적에 큰 감명을 받았을 때, 현왕이 되물었다.

“그래서 덕왕의 힘은 종말의 군대와 맞서는 일에는 무슨 쓸모가 있습니까?”

“민심을 안정시키고 야만인들을 덕으로 교화시키면 사악한 이무기는 쉽게 잡을 수 있지 않겠느뇨?”

덕왕의 발언은 그를 지지하던 군주들마저 돌아서게 했다. 덕왕은 분명 존경해 마땅한 인물이었으나 전시 지도자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스스로 증명한 셈이었다. 모두가 아르투르를 왕 중의 왕으로 선출하려 할 때 노왕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 신성함이라면 누구도 노왕에게 맞설 수 없노라!”

그 뒤로 노왕은 실제로 대단한 기적들을 행했다. 조각상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움직이는 종복으로 만들고 자신의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으며 상처 입은 자를 치유했다. 그가 오랫동안 주문을 외우고 마력을 내뿜자 하늘에 몰아치던 눈보라마저 멎어버린 뒤 갑자기 모래바람이 불었다.

“보았는가! 종말의 용의 권능조차 짐의 권능에는 이르지 못한다! 숭배하라! 이제 짐이 여러분의 신이다!”

아르투르를 포함한 모든 군주들이 입을 크게 벌리며 경외의 시선을 보냈다. 신의 권능조차 압도할 수 있는 저 노인이 진정 우리의 지도자로 걸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노왕이 분노한 신에게서 문명을 구하는 것인가?

일 초.

이 초.

삼 초.

거센 눈 폭풍이 몰아닥쳤다. 아예 모래바람과 뒤섞인 눈폭풍을 지독할 정도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노왕이 받던 선망의 시선은 금세 원망의 눈길로 바뀌었다. 레오폴트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할배. 헛짓 하지 말고 틀니나 간수 잘하쇼.”

노왕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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