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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오렌치아의 왕궁. 기사왕은 데네토르에서 온 사신인 요제프 공작의 알현을 받고 있었다.
“내 조카가 보낸 정보가 확실한가? 잘못된 정보라면 돌이킬 수 없으니 다시 묻는 것일세.”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 요제프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저희 국왕 폐하께서 직접 눈으로 토르스탄을 확인했다고 전하셨습니다.”
공작의 이야기를 들은 북구인 기사들이 눈을 꿈틀거렸다. 그들의 신화에는 전사한 북구인은 종말의 날이 올 때까지 신들의 전당에 머무르다가 최후의 군세에 함께 한다는 전승이 있었다. 토르스탄은 분명히 자신들이 죽였다. 그가 돌아왔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이미 그런 징조가 너무 많아서 놀라울 것도 없었지만 말이다.
“또한 북구에서는 끝을 셀 수 없는 어마어마한 대군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척박한 땅과 형편없는 단합력을 생각하면 통상적이라면 불가능할 일이지요. 조만간 침공이 시작될 겁니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을지도 모르지요. 발루아누스 국왕 폐하께서는 동맹 서약의 준수를 긴급히 요청하셨습니다.”
형님인 루이스가 술독에 빠져 요절하고 젊은 왕세자가 즉위한 후, 발루아누스는 대왕의 칭호를 아르투르에게 넘기며 관계 개선을 시도해왔었다. 아르투르는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이제 양국 간의 관계는 적대는 커녕 긴밀한 우호국으로 거듭난 상태였다. 그런데 지금은 원수 국가라고 해도 도와야 할 상황이었다.
해야 할 일은 분명했다.
“발루아누스는 필요한 시기에 필요한 지원군을 받을 걸세. 데네토르의 백성들을 남쪽으로 피난시키게. 우리 레무리아 인들에게 물자는 충분하니 따뜻하게 맞아들이겠네. 우리가 갈 때까지 버텨주길 바라네.”
요제프는 다소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알겠습니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용병공 만프레드가 정병 5만을 이끌고 오늘 자네와 함께 출발할 거야. 또한 지금 전 세계에서 왕들의 군세가 모여들고 있네. 일찍이 유래가 없던 규모의 군대가 북상할 걸세. 그 때까지만 버티게.”
여전히 요제프의 목소리는 공포로 가득했다.
“문명인이 세 명은 있어야 북구야만인 한 명을 당해낼 수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들은 지금 우리 군세보다 숫자가 많습니다. 대체 어찌 해야 버틸 수 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제프 공작. 자네는 아르길락 가문의 수장이자 왕의 오른팔이 아닌가?”
“그, 그렇습니다.”
자신감 없는 대답에 아르투르가 호통을 쳤다.
“정신 차려! 자네는 데네토르의 2인자야! 자네 등 뒤를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에게 형편없는 모습이나 보여 사기나 떨어뜨릴 셈인가? 스물을 조금 넘은 자네 주군이 용감히 전장에 나설 생각을 하는데 베테랑인 자네가 이렇게 꼴사나울 셈인가?!”
“그, 그렇지만. 도 도저히 승산이 없는 전쟁입니다.”
아르투르는 요제프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마주보며 고함을 질렀다.
“그만 닥치게! 요제프 공! 자네가 내 신하면 목을 쳤을거야! 자넨 평소에 공작 전하니 위대한 가문의 가주니 하면서 남들이 떠받들어주는 자리에 있었지. 그러면 이제 의무를 이행할 때야! 자네 선조인 장엄한 로베르토 공도 이렇게 형편없는 사내였나?! 자네 부친도 그러더니 아르길락 가문의 사내들은 다 겁쟁이인가!”
요제프의 눈동자에 순간 투기가 감돌았다. 귀족들에게 결코 참을 수 없는 건 조상을 모욕하는 일이었다.
“아, 아닙니다! 그분은 가장 위대한 전사십니다! 그런 모욕을 받으실 분이 아닙니다!”
곧장 아르투르의 따귀가 날아들었다. 요제프의 세찬 강타에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는 굴욕감과 분노 속에서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그러나 아르투르는 머리끝까지 화가 올라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손가락질을 했다.
“조상 욕에 분노할 깡은 남았나보군! 그럼 정신 차리고 네 시조의 반이라도 해라! 지금의 굴욕을 기억해라! 네 분노를 적들에게 쏟아라! 진심으로 경고하건데 이 따위 한심한 모습을 또 보이면 네 목을 베어버리겠다! 멍청아! 우리가 지면 다 끝이야! 네놈이 끌려나온 동네 청년이냐?! 군대를 이끌어야 할 놈이 그 따위면 어쩌잔거냐! 이딴 놈이 무슨 기사고 공작이야!”
요제프는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점차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바닥의 먼지를 털고 일어난 후 냉철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노려보았다.
“대왕 폐하. 정신 차리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상님들에 대한 모욕만큼은 거둬주셨으면 합니다.”
아르투르 역시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그를 노려본다.
“자네가 아르길락 가문의 사내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보이면 무릎이라도 꿇겠네.”
“그 약속 기억하셔야 반드시 지키셔야 할겁니다.”
“기사왕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지.”
요제프 공작은 아르투르에게 고개를 숙인 후 성큼성큼 걸어서 알현실을 빠져나갔고 아르투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수많은 이들이 싸우기도 전에 무너지고 있었다. 종말의 신의 가장 위협적인 무기는 절망이었다. 자신도 처음에는 그로부터 압도되었기에 남들을 질타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중요한 건 그들이 다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것이었다. 희망을 사용하건 위협을 사용하건 사람들의 전의를 북돋아야만 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북쪽으로 에쿠잘루스와 함께 달려가고 싶었지만 왕국에는 아직 해야 할 일이 가득 남아있었다. 자국에서 대규모 구원군을 편성하면서 해외에서 도착하는 외국 왕들의 군대를 규합시켜야 했다. 무엇보다 북방으로 떠난 사이 왕국을 안정시킬 사람들도 필요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끝없이 내리고 있었으며 하늘은 화산재로 가득해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창공의 빛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 확신했다. 화산재가 더욱 두터워질 것이다. 인간은 빛을 잃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리라.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던 태양이 사라졌으니 어떤 작물도 자라지 못할 것이다.
‘종말과의 전쟁은 시간 싸움이었다. 절망이 우리 모두의 마음을 갉아먹거나 혹독해진 자연이 우리 문명의 토대를 갉아먹으면 모든 게 끝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아르투르는 곧장 측근들을 소집했다. 샤를로트 왕비와 재상인 케이, 타에라트 백작과 힐데군드, 그리고 테라일 왕세자였다. 만프레드는 이미 구원군을 이끌고 떠난 뒤였다. 원래라면 논란이 되었을 힐데군드의 참석이었지만 지금은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지금은 유능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욱 필요했다.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각 부처는 상황을 보고해라. 잠깐. 카밀은 어디 갔지?”
케이는 한숨을 쉬었다.
“사흘 전에 유언비어를 단속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지금은 혼수상태에 빠져있고요. 업무는 왕세자님이 인수하셨습니다.”
아르투르는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보다 카밀의 단호함과 노련함이 필요한 시간에 이렇게 무너져버리다니.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카밀은 평생을 휴식도 없이, 세상과의 타협도 거부하며 고되게 살아온 사내였다. 환갑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몸이 다가온 겨울을 견디지 못한 것일테다.
하지만 감상에 빠질 때가 아니다.
“알겠다. 마저 보고 하도록.”
다행히 왕국은 그동안 누린 태평성대 덕분에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입장이었다. 온 국민들이 수년간 농사를 짓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있었으며 병기고는 가득 차 있었으며,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어 사회 질서가 유지되었다.
“제 명의로 전국에 계엄령과 동원령을 선포해둔 상황입니다. 위급 상황인만큼 범죄를 저지르거나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들은 엄벌에 처하고 있습니다.”
아르투르는 별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썩 내키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한편으론 바다를 통해 수많은 난민들이 유입되고 있었다. 무너진 왕국들에서 이곳이 아직 질서를 유지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몰려든 것이다. 자문회는 그들을 추방할 것을 강하게 권유했지만, 아르투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식량창고를 열어 그들을 구휼해라. 어차피 1년 치 이상의 식량은 필요 없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도중에 왕비의 말을 끊었다.
“왕비. 문명은 다 함께 몰락하거나 다 함께 살아남거나. 두 가지 결과만 남게 될 거요. 우린 지금 일개 국가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게 아니오. 우리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자 등불이지. 그러니 난민은 모두 받아들이시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희망이야. 희망을 찾으러 온 이들을 군대를 동원해 바다로 쓸어 넣는다면 우리 마음속에 먼저 절망이 자리 잡을 거요. 그건 종말로 가는 길이지. 공포에 잡아먹히지 말고 사실을 똑바로 보시오.자원을 아낀다고 해결될 건 아무것도 없소. 어차피 용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결국 다 죽는 거요.”
소름끼치도록 불편한 진실이었기에 모든 신하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만은 꿋꿋이 말을 이어갔다.
“왕비. 비용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 행정 체제로 보급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얼마나 되오?”
“20만 정도입니다. 폐하.”
“그러면 40만 정도의 원정군을 꾸리면 되겠군. 어차피 대부분은 돌아오지 못 할테니 돌아오는 보급은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거요. 동원령은 어떻게 되어가지?”
이번엔 케이가 거들었다.
“이 주일 내로 10만 이상의 병력이 준비될 겁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저었다.
“모자라. 예비 병력 명부에만 있는 사람만 동원하지 말고 건강한 장정이라면 모두 소집해라. 평생 농사만 지었던 사람도 상관없다. 이들 가운데 가족을 부양할 자가 없거나 가계의 대를 이을 사람이 없는 자들만 빼고 모두 군인으로 편성해라. 40만의 원정군을 꾸린 뒤 나머지는 전부 수비군으로 각지에 배치하도록. 케이. 네가 담당해라. 얼마나 걸리겠나?”
“……그 정도 동원 규모면 반년은 주셔야합니다.”
“두 달, 아니 한 달 반 뒤에는 반드시 구원군이 출발해야한다. 그보다 늦으면 회색 산맥이 눈으로 막혀서 데네토르를 지키러 갈 수 없게 될 거야. 그때까지 가능한 병력 모두 긁어내. 교회의 도움을 받으면 어느 정도 해낼 수 있을 거다.”
평소라면 생각도 못할 미친 짓이었다. 평소에 병력 수를 마구 늘리지 않는 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아무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원정은 보급도, 비용 추계도, 인명손실에 따른 국력의 저하나 민심은 고려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런 모든 건 부차적이었다. 모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아서라도 이겨야했다.
다른 대륙에서도 생각을 하고 있는 자들은 해로와 육로를 통해 지원군을 보내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정신 나간 국력 탕진이나 폭정이라고 불릴 조치들이 서슴없이 행해졌으며 수백 년에 걸친 원한조차 잊혀졌다.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생존보다 중요한 우선순위는 없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종말의 군대를 물리쳐야 했으며 종국에는 용을 쓰러뜨려야만 했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모두가 진실을 외면해오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기사왕 아르투르라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던 대왕이라면 반드시 방법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 믿음이, 혹은 그렇게까지 믿고 싶은 절박함이 문명 세계를 움직이는 마지막 희망이었다.
이번 시도가 실패한다면 모든 문명은 망각 속으로 떨어지리라는 위기감이 모두를 내리누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