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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9화 (22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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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높은 창공의 한가운데 속. 두 신령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름 위에 서 있었다. 한 명은 북구인 전사의 형상을 취한 남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호수를 다스리는 마법사의 형상을 취한 여성이었다. 두 신령은 안광에서 푸른빛을 내뿜고 있었으나 서로가 보고 있는 것은 각각의 진신이었다. 잠에 빠져있는 검은 날개의 용과 이제는 시체조차 남지 않은 붉은 날개의 용.

- 형제여. 기어코 잠에서 깨어나려는 것인가. 이대로 잠들어 있을 수는 없는가. -

생명의 여신은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으나 종말의 신은 무심한 태도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자매여. 너는 언제나 우리들보다 저 모자란 자들을 더 사랑했었지. 죽고 나서도 변한 게 없구나. -

- 생명이 번성하고 퍼져나가는 걸 보는 게 내 기쁨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

생명의 여신의 목소리엔 슬픔이 담겨있었으나 종말의 신은 아주 냉담한 태도만을 유지할 뿐이었다.

- 아직 그들은 너와 발타리아를 섬기지만 머지않아 누가 그들의 문명을 구해주었는지도 잊을거다. 그들을 구원해준 자들이 누구인지도 잊어버린 채 성역이라곤 남겨두지 않고 모든 비밀을 파헤치겠지. 자신들이 세상의 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멸하려고 했던 이유가 아니더냐. -

-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안칼라타르. 우리가 세상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처럼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지. -

종말의 신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 자매여. 그들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의 뜻을 이을 수 있는 계승자들이 아니다. 대지를 내려다보라. 저 미물들이 어찌나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지 직시하란 말이다. -

발타리아의 사자가 진실을 전한 지상에서는 온갖 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굉장한 권세를 지닌 사막의 왕이 다스리던 대도시는 이제 썩어가는 시체와 부서진 해골만이 가득한 공동묘지가 되어있었다. 종말의 소식이 전해지자 왕은 통치를 포기하고 마지막 날까지 쾌락을 즐기려고 하렘에 틀어박혔다가 아끼던 애첩에게 난자를 당해 죽었고 시체는 개먹이가 되었다. 왕이 죽자 백성은 대규모 폭동을 일으켜 왕족들을 학살하고 공포로서 군림하던 귀족들을 모조리 붙잡아 온갖 모욕과 고통을 가했다. 그들이 섬기던 신의 제단은 오물로 더럽혀졌다.

피의 축제가 끝나자 민중은 남은 몫을 차지하려고 서로 간에 싸웠다. 덕분에 도시에 대한 식량 공급은 중단되었고 기아 속의 살육 잔치가 뒤따랐다. 백 만의 인구가 살던 곳에 아무도 남아있질 않았다. 그들이 야만인이라고 멸시하던 거친 부족들조차 소식에 몸을 떨었다.

이런 비슷한 일들이 수많은 문명 지역을 강타하고 있었다. 절망에 잡아먹힌 지역에선 문명인이 없었다. 그들 스스로 야만인보다 낫다고 자부하게 해주던 모든 법과 제도는 한순간에 공허한 말이 되어 흩어졌으며 남은 건 짐승들의 생존 투쟁 뿐이었다.

- 저걸 보고도 끝까지 인간들의 문명을 위해 네 목숨과 동족들의 번성을 포기할 셈이냐. 결국 인간들이 이룩한 문명이란 모두 거짓이다. 결국 약자는 희생당하고 강자는 특권을 누린다. 이건 변하지 않아. 다시 강조하지만 난 인간들을 모두 멸할 게 아니다. 우리가 살던 태초의 시대로 뒤돌리려고 할 뿐이지. 진실된 모습으로 말이야. -

- 죽음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생명이 얼마나 되더냐. 우리 가운데서도 다양한 자들이 있듯 인간들 역시 그런 것이다. 너 역시 느끼고 있겠지. -

엘라카르시스는 다른 왕국을 가리켰다. 성실한 농부들은 내년에 뿌릴 씨앗을 남겨두었고 여전히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갔다. 그들은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손을 잡고 수호신에게 기도를 올릴 뿐, 절망에 압도당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일 종말이 닥치더라도 가족들과 함께 한다는 점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용맹한 자들은 스스로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동족들을 격려했다. 미래를 내다보고 겨울과의 싸움을 준비해왔던 현명한 자들은 준비해둔 고대의 신비들을 모두 꺼내들었다. 교황청에선 역사 속에서 사라졌던 성물들이 나타났으며 동방의 마술사들은 피와 불꽃으로 불의 괴물들을 깨워냈다. 그 외 지역에서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오늘을 준비해온 자들이 있었다. 발타리아의 사자가 그들을 규합하고 있었다.

- 인상적이군. 하지만 의미 없는 일이다. -

깨어난 용의 힘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저항이었다. 토끼들이 나뭇가지로 사자를 사냥하는 것도 이보다는 승산이 있어보였다.

- 결국은 고귀한 방식이건 비열한 방식이건 죽기 싫어서 하는 발버둥의 일환일 뿐이다. 그들은 운명을 거부하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엘라카르시스. -

하지만 여신은 이제 웃고 있었다.

-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안칼라타르. -

- 무슨 소리냐? 나는 동족들의 부활을 바랄 뿐이다. 인간들의 문명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면 그들은 다시 무지 속에서 우리를 숭배할 것이다. 그런 역할이 저 미물들에겐 어울린다. 그들의 맹목적인 숭배 속에서 우리들은 다시 죽음으로 돌아올 힘을 얻을 것이다. 너와 발타리아 역시 다시 땅을 너희의 발로 거닐 수 있겠지. 그 시절이 그립지 않은가. -

- 아니야. 너 역시 죽음이 두려운 거야. 안칼라타르. 우리 용들이 되살아나봐야 아무런 변화가 없는 똑같은 세상만 유지될 뿐이다. 모든 게 고정된 채로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지. 생명이란 끝없이 진화해서 더 나은 모습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다. 변화가 멈춘 세상이란 죽음과 다를 바 없어. 우리 역할은 끝이 난 거야. 너도 그걸 알고 있잖아. 우리가 진정 창조주라면 이제 모든 걸 손에서 놓고 떠날 때가 된 거야. -

종말의 신은 침묵을 지켰다.

- 네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도 이해해. 네가 주관하는 영역은 종말. 그러니 죽음과 무로 돌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잘 알겠지. 우리 중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건 너뿐이니까. -

안칼라타르는 힘을 내뿜어 그녀의 형상을 지우는 것으로 답했다. 엘라카르시스는 이제 잔류한 정수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신이 마음먹고 힘을 기울이자 금세 그녀의 존재가 허물어져갔다. 여인의 모습이 조금씩 세상에서 사라져갔다. 생명의 여신은 그녀의 마지막 남은 동족에게 슬픈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 너만 없으면 나를 막을 자는 아무도 남지 않겠지. 이것으로 끝이다. -

- 그렇지 않아. 난 아르투르를 믿어. 그 아이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믿어. 그리고 홀로 남은 너도 동정해. 안칼라타르. -

세상에 남아있던 엘라카르시스의 마지막 정수가 지워졌다. 이제 그녀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으며 자신을 제외한 어떤 신도 산 자들의 세상에 간섭할 수 없음을 뜻했다. 엘라카르시스의 존재감이 사라지자 자신의 진신을 잠재우던 마지막 봉인이 풀려났다.

마침내 자신의 영혼과 진신이 연결되고 있었다. 수천 년의 기다림은 길고도 길었다. 종말의 신은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세상 북쪽에 있는 화산섬의 지하 동굴 속에서 거대한 흑룡이 눈을 떴다. 흑룡은 동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 화산섬은 자신의 권능으로 만든 요새였다. 종복들에게는 최후의 날을 준비하게 하면서,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누구도 자신의 몸에 접근할 수 없게 만든 요새 말이다.

이제 요새 따위는 필요 없다.

흑룡은 날개를 폈다. 지하 동굴은 그의 날개를 모두 필 수 있을 정도로 크지 않았기에 벽에 부딪쳐 걸리적거렸다. 흑룡이 짜증에 가득 찬 콧김을 내뿜자 연기가 솟아올랐다. 두 발에 힘을 준 흑룡이 발돋움을 하자 용의 육신이 천장이 박살내며 한 없이 부상했다. 동굴이 무너져 내리는 와중. 태고의 화산이 용암과 화산재를 토해냈다. 하늘은 순식간에 재로 뒤덮였고 섬을 지키던 고대의 야수들은 쇠사슬에서 풀려나 문명 세계를 향해 이빨을 드러냈다. 신들의 피를 이어 받은 모든 인간들은 먼 조상들이 자신들을 부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세계의 창조주들이 주권을 돌려받으러 온 것이다.

- 절망하라. 인간들아. 너희 세상에 파멸이 왔음을 깨달아라! -

비좁은 동굴에서 날아오른 종말의 용은 두 쌍의 날개를 가득 펼쳤다. 그것은 날아다니는 산처럼, 폭풍우처럼 보였으며 화산의 분출은 세계의 모든 곳에서 목격되었다. 몸을 한껏 부풀린 용은 억눌려왔던 포효를 내질렀다. 닿는 모든 것을 녹이는 암흑의 불길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제 흑룡의 권능이 담긴 날갯짓이 공기를 휘저었다.

시커먼 암운이 세상의 모든 하늘에 드리우기 시작했다. 지상에 번갈아서 빛을 내리던 태양과 달은 모습을 감추었으며 인간들에게 보이는 것은 화산재로 가득찬 하늘과 그 속에서 끝을 모르고 쏟아지는 눈폭풍 뿐이었다.

영원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

종말의 신이 엘라카르시스의 마지막 존재를 지워낸 순간, 성검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여신의 힘이 아르투르를 향해 흘러들었다. 수도로 돌아가고 있던 그는 여신의 소멸과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깨달았다.

최후의 용이 이제야 깨어난 것은 전적으로 그녀가 남은 힘을 쏟아 부었던 덕분이었다. 엘라카르시스는 자신이 충분히 성장하여 모든 이들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랬다. 갓 대관식을 마쳤던 시절의 자신은 영광스러운 승리만을 반복해온 자신감 넘치는 오만한 왕이었다. 젊은 자신은 세상은 무엇이든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가장 위대한 자조차 좌절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며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상실이 있었다. 기사와 왕들의 정점인 자신과 촌부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벽이 있어보였지만 신들이 지닌 영원의 시간에 비교하는 순간 한 없이 작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결국 둘은 본질적으로 다를 바가 없다.

‘어머니. 세상이 종국을 향해 나아가던 시점에 그런 가르침이 뭐가 중요했던 겁니까? 저는 이제야 남들의 희망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게 더 나은 삶과 희망이 있는 세상을 향한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드디어 어떻게 그것을 이뤄낼 수 있을지 알게 되었을 때 모든 걸 무로 돌리려는 종말의 신이 깨어났군요. 무엇을 원하셨던 겁니까?’

종말을 닥쳐오자 유서 깊은 왕국들이 혼란 속에서 자멸하는 와중에도 자신의 백성들은 순순히 왕가의 명령에 따르고 있었다. 백성들은 이번 위기도 그들의 경애하는 기사왕이 해결책을 제시해줄 거라고 굳건히 믿고 있었다. 이미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을 몇 번이고 해낸 분이 아닌가.

도로를 지나칠 때마다 근방에 사는 모든 이들이 몰려들어 자신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은 자신을 삶의 희망이자 구세주로 여겼다. 평소에는 자신에게 떼를 쓰며 반항하던 제후들조차 바짝 엎드린 채 자신만 바라보고 있었다. 위기의 순간이 닥치자 자신 앞에 평민과 귀족, 빈부나 직업의 차이는 없었다. 그녀가 벌어준 시간이 아니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지 않는가. 이제 우리를 수호해주던 여신은 없어. 우리 스스로 밖에 믿을 자가 없단 말이다.’

…………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그렇기에 자신은 더 이상 징징대며 신세를 한탄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제 인간이 믿고 기댈 것은 성검의 주인이자 기사들이 섬기는 대왕인 자신뿐이었다. 이제 여신의 의도가 어땠느니, 왜 이렇게 되었냐느니 따위의 일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게 있었다 한들 남은 것은 하나 뿐.

자신을 믿고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믿으며 나아갈 뿐이다. 이제 자신은 일개 무적의 기사나 흔히 있는 성군 따위가 아니었다. 자신의 등에는 인류의 마지막 희망이 걸려있었다. 그것이 정당하건 아니건 무게를 감당할 능력이 있건 없건 이미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것이다.

“에쿠잘루스! 달려라! 세상이 나를 필요로 하고 나는 너의 발을 필요로 한다! 질풍보다 빠르게 달려라! 최후의 결전이 우리를 기다린다!”

에쿠잘루스는 이미 은퇴한 나이를 지난 늙은이였지만 원체 의욕이 넘치고 강인한 말이었다. 그는 인류의 희망을 싣고 벌판을 달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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