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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라. 두 번 설명 안한다. 너, 옛날에 아르투르랑 다닐 때 말야. 무너진 성채에서 불 뿜는 악마랑 싸운 적 있지? 그 때 성검의 힘을 빌린 아르투르조차 죽었다가 살아날 정도로 고전했던거 기억나냐?”
“어떻게 그 광경을 잊겠어요? 그런데요?”
“그때 해치운 악마는 죽은 신의 일부분이야. 정수가 조금 남아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살아있는 신과 죽은 신 사이에는 너와 나 사이의 벽보다도 더 큰 차이가 있어. 비유하자면 뒈지기 직전의 노인네와 한창 때의 전사 정도? 아르투르의 성검이나 거기 붙어있는 여자 귀신도 본질은 같아. 죽은 신들의 남은 정수일 뿐이지. 살아생전에 힘이나 의지를 남겨두었을 뿐, 본신의 힘에 비하면 작은 부분에 불과해. 하지만 우리 인간들에겐 대적불가능 한 힘이잖아?”
케이는 그녀의 뒷말에서 불길함을 느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이제 살아있는 신이 우리들의 세상을 멸하러 오는 거야. 그 힘에 대항해서 승리는 없어. 영원한 겨울과 죽음뿐이지. 지난 시대에 인간들을 구원해주었던 발타리아는 죽었으니 맞설 방법은 없어. 우리가 뭘 열심히 해도 방법이 없다고. 그러니 남은 삶은 즐기면서 보내려고 온 거야. 그게 전부라고.”
“……그렇다면 당신의 아이들에겐 왜 교육을 시키고 있는 거죠?”
“영원한 겨울이 와도 살 사람은 살아남을 거야. 신들이 바라는 건 모든 문명이 사라지는 거지, 인간 자체가 멸종하는 게 아니거든. 누군가는 살아남아 그들을 숭배해 줘야하거든. 하여간 까다로운 놈들이라니까. 그 때가 와도 내 자식들은 살아남을 거야. 약한 놈들은 금방 죽겠지만 그게 문명이 사라진 세상에선 당연한 일이겠지.”
케이는 대답 없이 자리를 떠서 아르투르에게 돌아갔다. 종말의 예언에 대한 내용은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모든 종교에서 전하는 사건이란 말은 다시 말하면, 신을 믿는 게 당연한 사람들에겐 의심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뜻이다. 마스터와 함께 다니며 수많은 이상 현상을 보아왔지 않은가. 스스로도 이미 느끼고 있었다.
‘영원한 겨울이 우리 세대에 닥쳐올지도.’
단지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아니길 바랬을 뿐이다. 미루고 미루다보면 언젠가 시시한 옛 예언 따위로 전락하기를 기대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다. 우리들의 삶, 우리들이 쌓아올린 것, 우리를 계승할 자들이 모두 망각 속으로 사라져야한다는 사실을 누가 믿고 싶은가?
기사왕은 바위에 홀로 앉아 먼 북쪽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고 케이는 그에게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멈춰 세웠다.
“폐하. 마스터. 힐데군드의 말을 믿으시는 건가요?”
케이가 낮고 우울한 어조로 물어올 때도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 사실을 백성들에게 뭐라 말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악귀 같은 북구인들이 무언가를 두려워한 나머지 우리의 땅까지 도망쳐온 걸 사실대로 알게 되면 다들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차라리 기사왕이 실성해서 옛 연인에게 휘둘린다는 식의 헛소문이 낫다. 세상의 종말이 코앞에 왔다고 전하면 모든 질서가 그대로 무너질 거다. 이걸 사실대로 전할 순 없어.”
케이는 아르투르의 떨리는 목소리에서 공포를 읽어냈다.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케이. 나는 지금 두렵다. 젊은 시절이었다면 눈 하나 까딱 않고 싸우러 가자는 이야기나 했을거야. 신들이 우릴 죽이러 온다면 맞받아칠 뿐이고 설령 패배한다고 한들 나는 당당하게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겠지. 그런데 이젠 모든 게 두렵다. 케이. 겁쟁이가 된 거지.”
아르투르는 자신을 약하게 만든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고귀한 싸움에서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 그것은 승패와 상관없이 한 명의 기사로선 더 할 나위 없는 인생의 마무리일 것이다. 자신의 스승도, 자신이 베어 넘겼던 무수한 기사들도 그렇게 쓰러졌다. 하지만 상대를 원망할 일은 아니었다. 기사란 수호하는 자, 무언가를 지키다가 죽는 건 당연한 일이며 기사의 의지는 죽음을 넘어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진다.
“난 이제 지켜야 할 게 너무 많아졌다. 케이. 기대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아……. 우리가 새로운 세상을 일구고자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아왔느냐? 우리의 피와 의지를 잇는 자들이 더 훌륭한 세상에서 발을 디디고 살아가기를 원했잖느냐. 난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갈 게 두렵단 말이다. 우리가 이뤄온 게 이제 약점이 된 거야.”
“…………이교도 사제 한 명의 말일뿐이잖아요. 저런 이야길 주장했던 사람이 어디 한 둘이에요?”
애써 불길함을 밀어내려는 케이의 말에.
“케이. 내게 흐르는 북구인의 피가 끓고 있다. 최후의 신의 포효가 들려. 옛 신들의 종복이 돌아오고 세상의 남쪽 바다 끝까지를 뒤덮을 거대한 눈폭풍이 몰려오고 있어. 인간들의 힘으론 맞설 수 없는 권능이야. 십 만이 몰려가고, 백 만이 몰려가도 겨울 그 자체에 어떻게 맞설 수 있단 말이냐? 싸워보기도 전에 눈보라에 다 파묻혀 죽고 말거다.”
아르투르가 종지부를 찍었다. 케이는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애써 외면하고 싶던 진실을 더 이상은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아르투르는 북쪽으로, 케이는 바닥만을 바라보며 긴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다가오는 위험을 알았다. 하지만 그 힘에 맞서서는 어떤 희망도 없다는 점도 이해했다.
…………
아르투르는 석고상처럼 서서 북쪽만을 바라보았다. 기사왕의 표정은 워낙 섬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마스터.”
불러도 대답이 없다.
“당장 모든 문명들에게 경고를 전하고 왕국에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게 하시죠.”
“세상의 종말의 눈앞에 놓였다는 걸 모두에게 경고하자고?”
케이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만 해요. 모두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아야 합니다. 희망을 얻으려면 모두를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겐 자살 행위 이상으로 보이지 않는다만.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혼란을 불러일으킬 거야. 이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나?”
아르투르는 고개를 돌리고 장탄식을 내뱉었다.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한번 해볼 만한 일이죠. 폐하의 백성을 믿고 나아가시는 겁니다. 이제 마스터 혼자는 감당할 수 없는 적을 만났으니 모두의 힘을 빌려 달라 요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는 희망이고 빛이 될 겁니다. 신들이 우리의 편이 아니라면 각자가 서로를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가 먼저 그들을 이끄시지요.”
이제 왕의 옛 종자는 고개를 들어 아르투르를 뚜렷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선 자신감이 담긴 열기가 피어올랐다. 아르투르의 꺼져가던 희망의 화로에 믿음의 불씨가 옮겨 붙었다. 얼어붙어있던 왕의 표정에 생기가 돌고 그를 움직이게 하던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기사왕이 결심을 굳히자 주인의 의지에 응답한 성검이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아르투르는 성검을 뽑아들었다.
‘어머니. 이곳까지 저를 이끌어주신 분이 당신이지요. 지금도 당신만을 믿고 나아가겠습니다.’
여신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
세상의 군주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점성술사들은 모두 다 입을 모아 거대한 재앙이 다가오고 있노라고 소리쳤으며 옛 신의 사제들은 부정한 이 세상이 얼어붙고 새로운 싹이 다음 세상에서 피어날 거라고 속삭였다. 오지에 살던 야생 동물들은 남쪽으로, 남쪽으로 무리를 이동시켰다. 불타는 혜성들이 떨어지고 달이 핏빛으로 물드는 징조까지 보였지만 사람들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한 태도를 유지한 채, 추수한 것을 기념하는 가을 축제를 즐겼다.
누구도 믿고 싶지 않던 것이다. 자신들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압도적인 절망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자 모두 진실에서 눈을 돌려버렸다. 대담한 점성술사와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해석한 바를 계속 경고했지만, 분노한 군주들은 혹세무민을 한다며 지하 감옥에 가두거나 목을 베었고 군중들의 돌팔매질이 잇따랐다.
문명인 군주의 첩자들과 정찰병들은 옛 신을 섬기는 야만인들이 결집한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옛 신들의 사제들은 모든 세상을 불태우고 태초로 돌아갈 성전을 선언했다는 소식이었다.
문명인 군주들의 대응은 연거푸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우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즐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란 말인가. 전승에 따르면 최후의 용의 날개는 하늘을 덮을 정도로 거대하고 몸은 산맥보다 단단하며, 입김은 용암보다 뜨겁다고 한다. 그는 세상에 종말을 고하러 오는 자이며 신들 가운데 가장 강력한 자이다.
이 시대에는 인간의 몸으로 강림한 신도, 마법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고대의 영웅들도 없다.
방법이 없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밖에.
절망과 무기력이 싸워보기도 전에 모든 문명 세계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그 때, 기사왕의 우렁찬 선언이 만방에 전해졌다. 그것은 군주들이 기필코 대중들에게 섬기고자 노력하던 진실이었다.
『만국의 군주들이여. 기나긴 겨울이 닥쳐오니 식량과 땔감을 비축하시오. 쇠붙이를 손에 쥘 수 있는 모든 자에게 무기를 나눠주시오. 옛 신들은 우리를 저버렸으니 그들에 대한 숭배를 그만 두고 새로운 신을 믿거나 우리 자신을 믿으시오.
아직 살아있는 자라면 절망에서 깨어나 다가오는 적을 직시하시오! 일어나시오! 모든 문명 세계의 인간들이여! 멸망이 다가오고 있지만 언제나 그랬듯 우리 인간들은 시련을 이겨낼 것이고 실패한다면 사람으로서 죽을 것이오.
우리가 쌓아온 것이, 믿어온 것이, 지켜온 것이 시련에 처한 시간이오! 기사왕이 그대들을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끌겠소!』
아르투르의 선언은 극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모두가 합의하고 있던 거짓말이 까발려지자 문명인들은 비명을 질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포자기해서 스스로의 목숨을 내던졌으며 멸망을 받아들이고 미쳐 날뛰는 자들이 속출했다. 특히 억눌려있던 자들의 분노가 문명 세계를 휩쓸었다.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죽기 전에 울분을 해소하고자 하는 이들이 가득했다.
평소에 원한 관계가 있던 이들은 서로를 찾아가서 죽고 죽였다. 억압 받던 자들은 죽기 전에 억압 하던 자들의 자리를 뺏어오겠다며 들고 일어났다. 머잖아 고귀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은 증오의 화살을 정통으로 얻어맞았다. 군주들이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어차피 세상이 멸망할 거라면 손에 쥔 권력이나마 누려보자며 미친 듯한 폭정을 시작하는 자들도 즐비했다.
아르투르의 선언이 전달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문명 세계의 절반이 넘는 지역이 완전히 붕괴했으며 나머지 지역도 혼란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스스로 사람으로 죽기를 바라는 자들과 아직 희망을 꿈꾸는 우둔한 자들이 있었다. 용감한 자들이 붉은 용의 깃발 아래로 모여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