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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7화 (22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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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의 막사 속. 아르투르와 재상이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폐하가 결투에서 패배하셨으니까 공국 하나는 세울 크기의 땅을 그냥 줘야한다고요?”

케이는 넋이 나간 채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그렇다!”

반면, 아르투르는 굉장히 당당한 태도로 외쳤다.

“그게 무슨 개소리에요! 마스터!”

케이는 세차게 고함을 질렀다.

“무엄하긴! 그대는 지금 왕에게 말하고 있노라!”

“영토가 애들 딱지치기 상품입니까! 결투에서 한번 졌다고 그냥 내주게요! 그것도 싸우면 그냥 우리가 이긴단 말입니다! 백성들이 이걸 받아들이겠어요?!”

재상은 피를 토하는 심정을 담아 주군의 눈길을 바라봤지만 그는 매우 진지했다. 저래서야 설득할 방법도 없었다. 마스터는 자기가 옳다고 믿은 채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물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뭐가 문제냐? 기사가 명예롭고 정당한 결투를 벌여서 그 결과에 승복한다는데. 명예로운 결과가 아닌가? 지금껏 내 영도에 따랐다면 이것도 받아들여야지!”

“…………그-으-게 말이 됩니까아아!!”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왕.

“돼!”

케이는 끙. 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결국 수긍했다. 아니, 수긍은 안했지만 현실을 받아들였다. 아르투르는 늘 남들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었다. 기사왕은 그의 세계를 현실에 구현시키는 자이지, 정해진 세계를 체화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래. 어차피 레무리아 왕국은 공작령 하나 따위 없어도 충분히 강력하고 부유한 나라였다. 그깟 공작령 한 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일 리가 없지! 나도 백작인데!

“안됩니다! 공작령이 뉘집 개 이름입니까! 용병공 외엔 아직 국내에 공작이 한 사람도 없어요! 제가 백작인데 충성 맹세도 안하는 사람이 공작령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립니까! 이건 사적인 목적을 위한 권력 남용입니다!”

아르투르는 싱긋 웃으면서 케이를 바라봤다.

“왕국의 주인은 나니까 법에만 따른다면 뭘 하든 정당한 권리 행사다. 남용이 아니지.”

케이는 도로 화를 냈다.

“결투에서 졌다고 땅을 내어주는 게 어떻게 법이냐고요! 마음대로 권력 남용하시는 그런 분 아니었잖아요! 말해봐요! 이거 솔직히 그냥 옛 연인을 만나서 갑자기 그리움이 샘솟은 거죠? 부인이랑은 사이 별로지. 요즘 같이 지내는 정부들은 질린 거고요. 와. 기사왕이 이렇게 사리분별 못하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면 백성들이 뭐라고 할까! 제후들이 어떻게 실망할까!”

“케이야.”

아르투르는 느긋한 표정으로 옛 종자를 바라봤다.

“불만 있으면 결투를 주선해 줄테니 싸워서 이겨라. 나도 공작령 주기 아까워죽겠다. 니가 나 대신 나가서 좀 이겨줘라. 참. 결투 중에 죽어도 어쩔 수 없는 거 알지?”

“………….”

“수만 명이 죽는 전쟁 대신 두 사람의 싸움으로 결판을 내는 정당한 결투. 그게 우리가 분쟁을 명예롭게 정리해온 방식이잖아. 서로 원하는 게 다른데 타협할 수가 없으면 싸울 수밖에 없잖아. 그걸 대신하는 게 지도자끼리의 싸움이고. 우리가 이겼을 때만 받아들이자고 할 순 없다.”

케이는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전 마스터가 졌다는 게 이해가 안 갑니다. 바로 몇 달 전에 레오폴트 국왕님을 박살냈잖아요. 그분도 한창 이름이 높던 기산데 폐하가 어렵지 않게 이겼다고요. 그런데 폐하가 이걸 이렇게 져요? 일부러 져준 거죠?”

“레오폴트는 이제야 날 좀 따라온 입장이고. 하지만 내가 왕좌에서 편히 앉아있는 동안 힐데군드는 세상의 동쪽 끝까지 항해하고 돌아온 거야.전투에 관해서라면 당연히 이젠 나보다 경험도 많고 배움도 깊겠지. 아, 나도 모험이나 떠났어야 되는데. 의무에 얽매여서 이게 뭐냐…….”

한숨을 내쉬는 아르투르를 보며 케이는 도로 따졌다.

“세상의 동쪽 끝이요? 어떻게 생겼데요?”

“말 그대로 세상 끝의 바다가 있다는군. 섬 하나 없는 끝이 없는 망망대해가 이어지고 그곳으로 인간이 나아갈 길은 없다고 하더구나. 하여간 가본 사람의 말이니 믿을 만하겠지. 아. 나도 직접 보고 오고 싶다. 세상 끝의 바다. 가보고 싶다.”

“말한다고 그걸 다 믿습니까. 어디 구석진데서 대충 살다가 돌아왔을 수도 있죠! 그리고 마스터! 당신은 이제 왕이라고요. 스스로의 성과에 자부심을 좀 가져요. 방랑기사 한 명이 최대로 업적을 남겨봐야 괴물이나 처치해서 나라 하나 잠깐 구해주는 거지만, 마스터는 지금 문명권 전체에 평화를 가져왔다고요. 이게 얼마나 대단한 지 자각을 해봐요!”

케이는 답답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아르투르는 알 수 없는 향수에 빠져있었다.

“몰라. 아무튼 쉬지 않고 달리는 걸 멈췄기에 최강자의 자리에서 내려온 거잖아. 아무튼 져준 거 아니야. 직접 싸워봐라. 도무지 빈 틈 없는 검술을 사용하니까 방법이 없다. 본인 말에 따르면 검술 여러 개를 습득한 뒤에 뒤섞어서 사용한다는 모양이야. 무엇보다 내가 그럴 성격 아닌 거 알잖아.”

“음.”

케이는 결국 납득해버렸다. 기사왕은 이견의 여지없이 훌륭한 통치자였다. 관대하고 공명정대했으며 때로는 지혜롭기까지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르다고 믿는 일을 처단하고 무기를 다루는 데 있어서는 말이 거의 통하지 않았다. 아니, 알아 듣긴 하는데 단 한 번도 양보를 한 적이 없었다. 기사왕은 스스로의 무예에 대한 애착이 아주 심해서 아들들에게 무술을 가르칠 때도 조금도 봐주질 않았다.

‘덕분에 천재인 왕세자를 빼면 모두 아버지에게서 무술을 배우는 걸 포기했지.’

하여간 케이는 아르투르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실감했다. 문제는 왕국이 그의 결정을 받아들이게 하는 일이 되리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결정에 반발해올지 예상하니 머리가 아득해졌다. 백성들은 자신이 의문을 가진 것보다 더 크게 가질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어떻게 납득시키죠? 무적의 기사왕이 듣도 보도 못한 이교도 여전사에게 패배해서 영토를 내줘야한다는 이야기를요.”

“이미 벌어진 일인데 납득하고 말고가 뭐 있나. 그냥 그런 거지.”

“아, 쫌. 진지하게 방안 좀 말해봐요오오…….”

“모르겠는데? 아무튼 난 할 거다. 나도 그동안 열심히 다스렸으니까 몇 개 정도는 내 멋대로 해도 되지? 이 나이 먹도록 나를 위한 건 하나도 없었다! 의무와 대의! 가족만이 있었지! 내 삶은 어디갔냔 말이다! 열심히 일한 기사왕! 이제는 쉬어라!”

“아. 쫌!”

케이가 만류하려는 사이 아르투르는 잽싸게 깃펜을 들어 북구인들에게 남부 해안가의 절반을 내어준다는 칙령에 서명했다. 이미 힐데군드의 서명은 있으니 조약은 성립 된 것이다. 왕국이 받는 건? 동등한 입장에서의 동맹이었다.

“으아악! 폐하! 발표라도 늦추시죠!”

“몰라! 그건 니가 알아서 해!”

케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뒷수습을 고민했다. 무적의 기사왕이 공작령을 걸고 결투를 벌였다가 패배해서 통째로 북구 이교도들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아이씨. 이걸 대체 뭐라고 정당화하지? 우리 국교랑도 안 맞고 마스터 이미지랑도 안 맞고 무엇보다 하필 북구인은 이미지가 정말 나쁜데.

기사왕의 치세는 문자 그대로 이상적인 평화 시대였지만 행정 실무자들은 굉장한 고생을 했었다. 아르투르는 대단한 카리스마와 앞선 시각으로 웅대한 꿈을 제시했다. 그런데 웅대한 꿈을 정책으로 현실화시키자 웅대한 부작용이 몰려들었다. 노예제의 사슬을 단번에 끊어버리니 거상들이 일제히 파산 선고를 해서 교역이 멈추며 재정이 파탄난 적도 있었고 철저히 농노가 공평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니 지역 영주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이교도도 우리의 관습을 존중하는 한 동등한 권리를 약속하겠다고 하자 사제들이 왕의 통치에 비난을 퍼부어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아주 많았다. 자신과 왕비는 늘 모든 걸 박살내서 해결하겠다는 아르투르에게 차분한 설명을 내어주며 현실에 맞춘 조율 과정을 거쳐나갔다. 이번에도 똑같이 잘 할 수 있으리라. 그래야 되는데.

‘이건 대체 어떻게 조율하지? 이전의 칙령들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과격한 정책이었을지언정 지향점만큼은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논리에서 시작되었어. 하지만 폭력을 삶의 일부로 여기며 인신공양을 하는 이교도들을 이웃으로 받아들이라는 건 도대체 설명을 할 수가 없어. 맹세에 미친 기사도 광신자들이나 이해하겠지.’

마스터가 이걸 몰랐을 리는 없다. 성격이 급하고 과격해서 그렇지, 정치적인 감각은 탁월한 분이다. 요즘 심적으로 힘들어하신다 한들 정말로 맛이 갔을 리도 없다.

‘마스터는 모두에게 목숨보다 명예를 귀하게 여기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어. 대신 목숨을 걸지 않고도 명예를 지킬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데 주력했지. 그래서 그분의 치세가 칭송받고 있는 거라고.’

어떤 직감이 케이를 스쳐지나갔다. 힐데군드가 답을 알리라.

***

케이는 힐데군드의 야영지를 방문했다. 야영지에는 북부인들이 너저분히 앉아 술을 마시거나 싸우거나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세련된 귀족인 케이가 보기엔 야만의 도가니 그 자체였으나 이들에겐 너무나 자연스런 삶의 일부분으로 보였다. 힐데군드의 막사 앞에서도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크누트. 이번에도 저녁은 굶겠구나. 넌 빌어먹기엔 자존심도 세니까.”

힐데군드와 몇몇 북구 전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 자라지 않은 소년소녀들이 서로 잡아온 사냥감을 두고 경쟁 중이었다. 모두 어딘가 힐데군드를 닮은 걸 보니 그녀의 자녀들이었다. 그녀의 자녀들은 나이도 발육 상태도 달랐지만 똑같은 환경에서 힘으로 식사를 쟁취해야했다. 가장 덩치 큰 장남은 이미 배불리 고기를 뜯고 누워서 자는 중이었고 나머지는 경쟁해서 적당히 먹거나, 형제자매에게 빌고 빌어서 고기 몇 점을 얻어먹을 뿐이었다. 강자와 약자는 항상 불공평한 입장에 있는 법이었다.

“힐데군드 대족장님?”

“응?”

한참 싸움을 지켜보던 힐데군드가 뒤를 돌아본다.

“아니면 여왕 폐하라고 불러야 될까요?”

그녀는 깔깔 웃었다.

“힐더 누나면 충분하지. 늘 하던대로. 넌 좀 의젓해졌구나. 멸치인 건 여전하다만.”

“기사 작위도 받았거든요?!”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오래 전의 인연이었지만 서로에게 많은 걸 배운 입장이었다. 충분히 분위기가 녹아들자 케이는 힐데군드의 저의를 물었다. 영토를 요구한 까닭이 뭐냐고. 이제 세상 돌아가는 방법을 좀 아시지 않냐고 말이다.

“이곳에 북구인들이 정착하겠다고 해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폐하께서 승하하시고 나면 두 세력 간의 약속이란 게 지켜질 리가 없잖아요?”

힐데군드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도로 지어 보인다.

“지금 그걸 걱정할 때가 아니야.”

“잠깐만요. 전 지금 아주 진지한 이야깁니다. 북구인들과 우리 발타리아 교도들 사이에 내려온 원한은 수 세대를 넘어요. 이제 우리는 곧 서로를 죽이려 들 겁니다. 정착하시는 건 환영입니다. 하지만 이곳에 오셨다면 이곳의 방식에 맞춰야 되지 않을까요?”

힐데군드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지만 케이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기분은 굉장히 나빴지만 자기감정을 표정으로 나타내는 자는 외교관이라고 할 수 없는 법이다.

“그 때까지 너네 왕국이나 내 부족이 남아있질 않을거야.”

“……그게 무슨 해괴한 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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