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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너는 날 이해할 수 있어. 우린 진짜 투사니까. 죽음과 상실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투사 말이야!”
“………….”
아르투르는 침묵을 지켰다.
“나는 땅 따위엔 관심도 없어. 하지만 날 따라온 놈들은 희망을 원하지. 이처럼 따뜻한 남쪽 지방이라면 겨울이 닥쳐오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거야. 그냥 줘 버리자고. 어차피 이제는 아무도 땅에서 씨를 뿌리지 못할 거야. 우리의 세상은 멸망할 거라고.”
가만히 듣던 아르투르가 무거운 목소리로 답했다.
“영토의 양도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힐데군드는 계속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다.
“복잡하게 보지 마. 아르투르. 내 말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야.”
“네 말을 믿는다. 힐데군드. 나도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봤어.”
도로 장난기가 가득해진 힐데군드의 표정에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그러면 뭐가 문제야?”
“하지만 내 백성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하다. 신들이 우릴 시험하러 온다면 그들에게도 버텨낼 수 있는 희망이 필요하다고. 너희 북구인들이 어떻게 우리의 뒤를 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겠나? 나는 믿어도 내 백성들은 믿지 않을 거다.”
“우두머리가 믿으면 끝난 거지. 네 말대로 방법이 없다면 우리끼리 결판을 내야할 텐데 정말로 그걸 원하는 거야?”
힐데군드는 짊어지고 있던 대검을 들어올렸다.
“잠깐 기다려봐라. 성질 급한 건 여전하군. 백성들을 납득시킬 조건이 필요하단 거다. 너희가 옛 신앙을 버리고 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땅과 작위를 내어주겠다.”
힐데군드는 검을 들어 올리던 동작을 멈추었다.
“흐음.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에게 충성하는 사람을 경멸하는데.”
“그럼 변할 때가 온 거지.”
“너희 신은 약하잖아. 자비와 관용 따위가 무슨 쓸모라고.”
“어차피 망해가는 세상이라면 새로운 걸 좀 배워보는 건 어떠냐.”
힐데군드는 씩 웃으면서 아르투르에게 도로 대검을 겨누었다.
“그냥 이기는 사람 말이 맞는 걸로 하자. 내가 이기면 땅은 그냥 내놓는 대신 동등한 동맹 관계로서 도와줄게.”
아르투르는 자신만만한 힐데군드의 표정을 보며 일종의 모욕감을 느꼈다. 스스로의 승리를 확신하는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본다면 제법 즐거운 일이 될 것 같았다. 기사도의 규율에 억눌려있던 원시적인 욕망들이 끓어올랐다.
“폭력을 놔두고 괜히 말로 해결하려고 할 필요가 없었지.”
아르투르는 즉각 성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리고 오른발은 앞으로 내딛어 유동적인 전투 자세를 취했다.
“선공은 양보하지. 달라진 게 없다면 오늘 나한테 혼이 좀 많이 날 거다”
아르투르의 자신만만한 웃음을 본 힐데군드 역시 밝게 웃었다.
“하하하하! 광오한 자신감만은 여전하구나. 그래야 너답지. 하지만 선공을 양보한 건 너무 섣부른 생각이었어. 후회하게 될 거다.”
힐데군드는 날쌘 맹수처럼 달려들며 대검을 휘둘렀다. 굉장히 크고 무거운 무기였지만 그녀는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후우웅 - !
화산의 힘이 담긴 대검이 공기를 찢으며 머리를 향해 내리쳐왔다. 굉장히 정직한 공격이었다. 아르투르는 속으로 웃음 지으며 성검을 들어올렸다. 성검으로 경사를 만들어 자연스레 상대의 공격이 아래로 흘러가기를 유도할 생각이었다. 두 검이 맞닿는 순간 힐데군드가 미묘하게 검을 뒤틀어 정면으로 부딪치게 만들었다.
카아아아앙 - !
힘을 가득 실은 일격이 부딪칠 때 각각의 무기에서 불씨가 튀고 빛이 새어나오며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두 사람은 감각에 의존해 계속 움직였다. 충돌 직전에 본 상대의 발걸음과 검을 파지한 자세, 상대방의 성향을 고려한 움직임이었다. 아르투르는 예상보다 거센 힘이 전달되자 뒤로 한 발자국 밀려났다.
‘분명히 힘은 내가 우위였는데. 내가 약해진 건가? 힐데군드가 강해진 건가? 우리 둘 모두 신체 능력의 정점을 지난 나이인 건 마찬가진데.’
짧은 생각의 와중에도 아르투르는 뒤로 물러나며 방어를 굳혔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힐데군드의 극도로 호전적인 성격은 전투 방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한 번의 공격이 시작되면 쉬지 않고 상대를 몰아쳐, 정신과 몸의 여유를 빼앗아가며 빈틈을 만든 후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려 마무리 짓는 것이 그녀가 선호하는 전투 방법이었다.
그런데 곧장 공격이 들어오지 않았다.
“흐응. 넌 여태 변한 게 없구나.”
힐데군드는 미묘하게 유리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검은 닿을 수 없으나 그녀가 든 대검이라면 몇 발자국만 걸어오면 곧장 후려칠 수 있는 위치였다. 그걸 인식했을 쯤에는 우상단에서 그녀의 대검이 날아들었다. 곧장 쳐냈지만 이번엔 좌상단이었다. 아니, 좌하단인가?
아르투르는 몸의 긴장을 끌어올려서 상대가 품은 예기와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자신이 공격자라면 어딜 칠 것인가? 좌상단은 금방 동작이 이어져 방어할 수 있지만 좌하단은 비어있었다. 나 같아도 당연히 하단을 치겠지!
캉 - !
“호오. 그걸 막았네? 다행히 감은 살아있구나.”
예상과 달리 힐데군드의 대검은 좌상단을 향해 날아왔고 아르투르는 그녀의 검이 목에 닿기 전에 간신히 또 밀어낼 수 있었다. 검을 쥔 양손의 손목이 욱신거렸다.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분명히 힐데군드는 지금 자신보다 분명 우위에 있었다.
“제기랄. 조금만 늦었어도 한 번에 목이 날아갈 뻔 했다고. 좀 살살하지 그래?”
“세계 최강의 전사가 그것도 못 막으면 죽는 게 낫지. 약해졌는데 더 살아서 뭐해?”
아르투르는 사납게 쏘아붙이는 힐데군드를 보며 깨달았다. 아. 그녀는 이 순간을 위해 수많은 시간을 준비해온 반면 자신은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해졌고 자신은 약해졌다.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흔 무렵은 신체적 전성기는 지났을지 몰라도 오히려 경험과 노련미가 더해져 전사로서의 전성기에 오를 수 있는 시기였다. 이보다 나이가 많아지면 슬슬 신체에 한계가 오고 더 젊으면 경험에 한계가 있는 나이. 오히려 가장 강했어야 하는 나이였다.
‘제기랄. 마스터만 해도 환갑이 넘도록 최강의 자리를 유지했었어. 반성해라. 아르투르. 평화에 찌들어서 안일했던 거다.’
이제 힐데군드는 자신의 능력을 완전히 파악하고 앞선 신체 능력을 내세워 맹공을 가했다. 읽기 쉽던 그녀의 공격은 매우 변칙적인 것으로 변했다.
좌우상하의 구분이 없었고 전혀 보지 못했던 기교와 기발한 활용의 연속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전투 방식이었다. 지금까지 힐데군드는 탐색전을 해왔을 뿐이었다! 이제 힐데군드는 스스로의 과도한 공격성을 완전히 통제한 채 안전한 시점에서만 공격을 해왔다.
“아르투르. 네 움직임이 너무 뻔히 보인다. 널 이기려고 십 오년을 준비해왔는데 이런 식으로 패배하면 바로 목을 쳐버릴지도 모른다! 제대로 해!”
아르투르는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나 갈수록 숨이 가빠지고 손이 욱신거렸다. 힐데군드는 춤을 추듯이 날아다니며 현란한 몸놀림으로 눈을 속였다.
이어지는 예측 불허의 일격 속에서 아르투르는 순수한 감과 본능에 의존에 공격을 피해 다녔다. 그게 아니었다면 이미 싸움은 힐데군드의 승리로 끝났으리. 아르투르는 문득 무언가가 떠올랐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싸워본 게 언제인가? 열세에 처한다는 감각은 언제 느껴 보았는가?’
자신은 왕으로 즉위한 이후 호적수와 싸워본 적도,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했던 적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하며 간단히 죽일 수 있는 손쉬운 적들을 상대하거나 실력자들과 대련을 해온 게 전부였으니 감을 잃은 것이었다.
‘온 힘을 다해 싸운다는 감각을 잊게 된 거야. 그래서 밀리고 있는 거라고.’
잠깐만. 내가 밀린다고? 세상 최고의 기사인 내가?!
아르투르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에 분노하여 함성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아!”
“좋아! 그거야! 더 해보라고!”
질 리가 없다! 늙었다는 건 청년 시절만 못하다는 자조에 불과했지 자신은 언제나 최강이다! 모든 도전자는 물리쳤고 대륙 사람들이 칭송해 마지않는다!
공격! 공격! 공격! 온 힘을 다해 성검을 내리친다! 힐데군드의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내가 패할 리가 없다!
“하하하하하. 그래! 이 모습을 보려고 멀리서 찾아온 거라고! 아르투르!”
그 때부터 힐데군드의 검로가 기묘하게 휘고 왜곡되었다. 분명히 물리적인 움직임이었으나 마법의 신비처럼 느껴졌다. 아주 무질서한 검술처럼 보이다가도 일정한 패턴이 보이기도 했다.
침착함과 맹렬함,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내보이는 기묘한 검술이었다.
“내가 말했지? 전 세계를 다니면서 각 지역의 대가들과 쉬지 않고 싸워봤다고. 너희 기사들의 싸움법도 아주 뛰어나. 특히 갑옷을 믿는 정면 승부에선 그만한 방법이 없지. 아주 패기가 넘치고 용맹해서 좋아한다고.”
씨익 웃어 보이는 힐데군드.
“하지만 말이야. 유연성과 즉흥적인 대응은 떨어지는 편이야. 너는 여전히 기사 중의 최강이다. 유약해졌어도 내가 상대한 어떤 무사보다 강해. 하지만 거기까지다. 더 이상 내 상대는 아니라고.”
아르투르의 이마에 핏줄이 가득 올랐다. 오늘 제대로 박살을 내줘야겠다.
“하! 증명해보시지! 천하의 힐데군드가 입놀림만 늘었나?!”
“나는 네가 어떻게 싸우는지 뻔히 알아. 하지만 너는 내가 어떻게 싸우는지 모르지. 그러니 넌 질 수 밖에 없어.”
두 사람의 검이 교차했다. 아르투르의 일격은 간발의 차이로 힐데군드의 어깨를 스쳤지만 그녀의 대검은 아르투르의 목에 겨눠져 있었다.
“체크메이트.”
아르투르는 여전히 자신의 목에 와 닿은 강철의 감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충격을 먹은 표정으로 검을 아래로 내렸다.
“내가 이겼어. 땅 내놔!”
“어떻게 이긴 거지? 분명 마지막에 봤을 땐 넌 나보다 한 급수는 낮았어.”
“하하하하. 말했잖아. 넌 서부 대륙의 최강자일 뿐이야. 다른 곳의 전사들이 어떻게 싸우는 지 본적 없지? 사막의 전사들은 가볍게 차려입고 날쌔게 싸운다. 힘만 좋다고 능사가 아니지. 정글의 전사들은 숨어서 기습하는 걸 중시해. 머나먼 동방에서는 무기술을 배우면 정신이 함양된다고 믿는 괴상한 놈들도 있어. 그놈들은 범용성은 떨어지지만 한 번 한 번의 일격에 혼이 실린다고.”
힐데군드는 의기양양하게 웃어보였다.
“난 그들 전부와 싸워보았고 결국은 전부 이겨서 내 기술로 흡수했어. 그 뒤에는 모험을 다니면서 부족한 걸 보완했었지. 너는 어떠냐? 한 방법으로만 평생 싸워온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겠지. 자. 딴 소리하지 말고 빨리 땅이나 내놔.”
아르투르는 패배했음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아. 이렇게 가슴 떨리는 싸움을 한 것은 얼마 만인가. 돌이켜보면 자신을 최강의 기사로 만들어준 건 재능이나 노력이 아니었다.
‘더 높은 곳을 향한 의지. 더 강한 사람이 되기 위한 열망. 전투의 열기와 흥분이 나를 이끌었지. 지금은 전투 외에 무엇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아르투르는 자신의 정신 속에 있던 모든 걸 집어던졌다. 감정에 충실했다. 왕의 의무도 세상의 멸망도 나중의 이야기였다. 자신은 기사였다. 계속 반복되는 삶 속에서 자신을 누르던 무료함이 흥분의 홍숭 휩쓸려 쓸려 내려갔다.
“좋아. 땅을 주지.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 이제 와서 말 바꾸는 거면 죽여 버린다고 했다?”
“계속 내 상대가 되어줬으면 하는데.”
“그러지. 뭐. 가르쳐도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