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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5화 (225/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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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먼지가 걷히자 힐데군드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녀도 세월이 지나자 크게 변했다. 겨울의 오로라와 같이 아름답고 섬뜩하던 얼굴은 노련미 넘치는 투사의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이마와 뺨에는 크고 작은 흉터들이 보였다. 갑옷은 괴수의 비늘을 촘촘하게 엮은 미늘 갑옷이고 어깨에 짊어진 대검은 굉장한 크기였다. 특히 대검은 짙은 주황색의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어 달아오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머니! 왜 제 결투를 방해하신 겁니까?! 저 자가 당신이 말한 지상 최강의 전사가 아니던가요? 그를 꺾고 저를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청년의 외침에 힐데군드는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시구르드. 네 아버지는 예전만 못한 것 같긴 하다만, 여전히 퇴물은 아니다. 그대로 싸웠다면 네 목이 날아갔을 거다. 내가 전투를 멈춰서 살려준 거니까 감사를 표해야지. 말을 듣거라. 아들아.”

아르투르는 오가는 대화를 듣고 눈을 껌뻑였다. 저 야만인 청년이 내 아들이란 말인가?

시구르드는 그러거나 말거나 승리를 뺏겼다고 생각해 역정을 내며 아르투르를 향해 돌격할 자세를 취했다. 육중한 무게에 풀잎이 짓눌려 바스라진다.

“아무리 어머니라도 제 승리를 빼앗는 걸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 자를 살리고 싶다면 패배를 인정하게 하십시오!”

“시구르드.”

방금 전과 같은 말이었으나 어조는 정반대였다. 힐데군드의 날선 목소리는 자신만만하던 청년마저 고개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오늘이 내게 도전하는 날이냐.”

시구르드는 몸을 떨며 힐데군드를 바라봤다. 지금 힐데군드의 시선에선 자식에 대한 애정 따위는 한 점도 없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묻고 있을 뿐이었다. 대답이 늦어질수록 힐데군드의 기세가 살벌해졌다. 대검을 쥔 그녀의 팔목에 핏줄이 솟아오르자 시구르드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아닙니다. 어머니.”

“감히 내게 이빨을 드러내놓고 고작 말 따위로 넘어가려고 한 건 아니겠지.”

힐데군드는 시구르드를 비웃으며 한 걸음씩 다가섰다. 발자국 소리가 들릴 때마다 시구르드는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결국 손에서 무기를 내버리고 어머니 앞에 두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서도 발걸음이 멈추지 않자 아예 엎드렸다. 수치심과 굴욕감이 온 몸을 타고 흘렀으며 손은 바들바들 떨렸다.

“하. 엎드려 빌 일은 애초에 하질 말았어야지.”

힐데군드는 사정없이 아들의 복부를 거세게 걷어찼다. 시구르드는 비명을 지르며 땅을 뒹굴었다. 그는 분노를 느끼며 반격하려는 욕망을 억눌러야했다. 너무나 수치스러웠지만 억지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되새겨야했다.

시구르드가 계속 얌전히 얻어맞자 힐데군드는 만족스런 웃음을 짓더니 오른발을 들어 아들의 머리를 짓밟아 흙 속에 처박았다. 그는 숨을 쉬지 못한 채 꺽꺽 거리며 발버둥을 쳤다.

“머리가 나빠서 배움이 늦는구나. 내가 몇 번이고 가르쳤을 텐데. 누군가에게 적의를 드러낼 때는 네가 더 강하다는 믿음이 있을 때만 드러내라.”

그녀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더욱 발에 큰 힘을 주었다 시구르드는 뭍 위의 물고기처럼 발악하며 손으로 땅을 헤집었지만 그녀는 전혀 놔주지 않았다.

“너보다 강한 자에게 적의를 드러낼 수 있는 기회는 불시에 기습할 수 있는 단 한 번뿐이다. 그 때까지 인내심을 가지지 못하면 죽는 거고.”

힐데군드는 시구르드의 머리채를 잡고 일으켜 뺨을 후려쳤다. 모욕을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순수한 폭력이었다. 그의 얼굴도 피범벅이 되었다. 처음엔 그러려니하던 아르투르는 벙찐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봤다.

“……네 아들인 거 아니냐?”

“저 나이가 되도록 사리분별을 못하고 개기면 처 맞아야지.”

문명인 출신의 왕실 기사들은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경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군나르를 비롯한 북구 출신의 기사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다. 저게 뭐 별 거라고 그러냐.

“죄송합니다. 어머니.”

“지켜보겠다. 지금처럼 성급하게 굴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넌 세상의 정점에 군림할 거다. 그럼 돌아가서 네 동생들이나 보고 있어. 다른 부족 놈들은 약탈 못 나가게 막아라. 토 다는 새끼는 죽여 버리고.”

“알겠습니다.”

시구르드는 남들이라면 얼이 나갔을 폭력에 노출되고도 흙을 탈탈 털고 일어나서 기어코 일어나서 터덜터덜 되돌아갔다. 아르투르는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상황을 지켜보다가 냉정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설명해봐라. 힐데군드. 왜 10만의 무리를 이끌고 내 영토에 침입했는지 말이야.”

힐데군드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녀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은 나이를 먹고도 여전했다. 그 때는 마음에 들었지만 지금은 경박해 보이기도 했다.

“열여섯 해 만에 만나서 처음으로 나눌 대화 주제론 아쉽네. 다른 이야기부터 좀 하자고.”

힐데군드는 도로 어깨에 대검을 짊어진 채 근처의 바위에 걸터앉아 아르투르와 왕실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아르투르. 군나르. 나는 너희가 이곳에서 게으름 피우는 동안 엄청난 모험들을 했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왕들을 만났고 누구도 탐험하지 못했던 곳들을 정복했어. 이 칼 보여? 세상의 남쪽 끝에는 있는 거인들이 사는 화산섬이 있다. 놈들이 우리 배를 공격했다고. 그래서 거인 족의 마지막 한 놈까지 죽이고 빼앗았지. 이 갑옷으로 말할 것 같으면 말이야…….”

힐데군드가 자신의 모험담을 막 털어놓기 시작할 무렵, 아르투르는 서둘러 끼어들었다. 자신이 감상에 빠져들기 전에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터이다.

“그 이야긴 나중에 듣지. 우리 둘 다 한 집단의 수장이야. 서로의 의무를 먼저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힐데군드는 히죽 웃었다.

“알았어. 용건부터 말할 게. 땅 좀 내놔라. 이쪽 해안부터 저기까지.”

그녀는 손가락으로 해안선부터 멀리 떨어진 산 끝까지를 가리켰다. 아르투르는 추가적인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냈다. 난데없이 쳐들어와서 땅을 내놓으라는 건 호구한테나 할 소리다! 아르투르는 힐데군드가 자신이 유약해졌다고 보인들, 실제로 유약한 것으로 오판 한 것은 아니기를 바랐다.

“서로 친한 사인데 그냥 주면 안 되냐? 내가 너 정도로 땅이 많았으면 그렇게 했을 텐데.”

아르투르의 진지한 표정은 장난기 어린 힐데군드의 모습과 정반대였다.

“농담이겠지. 이미 이 땅엔 백성들이 살고 있단 말이지. 그들은 내게 충성을 맹세 한거지, 네게 한 건 아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사람이 사는 영토를 넘길 순 없어. 꼭 넘겨줘야만 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지.”

“으음. 까다롭게 구네. 너 많이 따분해진 것 같다.”

약해지고 따분해졌다라. 정말 그럴지도.

“왕이 되면서 많은 걸 잃었어. 그만큼 얻은 것도 많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너희는 지금 무단 침입자다. 아직 교전이 벌어진 건 아니니 자진해서 물러간다면 뒤쫓지 않겠다. 아니면 우리가 영토를 내줘야하는 합당한 설명을 요구하겠다.”

힐데군드는 미간을 좁히며 아르투르를 노려봤다.

“지금 아주 섭섭하게 굴고 있는 거 알지? 난 네 선물도 챙겨왔는데 이 따위로 굴 거야?”

“난 지금 백성들의 삶을 책임지는 입장이라고. 방랑 기사 시절처럼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어. 뭔가를 주려면 절차를 거쳐야지, 네가 기대하는 방식으론 불가능하지. 특히 우리는 너희 북구인들을 불신한다. 앙금이 쌓인 만큼 이해는 하겠지. 말해라. 대체 우리 땅을 왜 내놓으라는 거지?”

힐데군드는 실망스런 표정으로 기사왕을 바라보며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본능적으로 그녀의 움직임을 위협으로 인식한 아르투르와 왕실 기사들은 검을 쥔 손에 가득 힘을 주었다.

“나는 싸우다 죽고 싶어서 내려 온거야. 고향에 남아있으면 대부분은 눈보라 속에 파묻혀 죽게 될 테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이제 아주 혹독하고 끝나지 않는 겨울이 들이닥칠 거야. 모든 왕들은 눈보라 속에 파묻히고 눈폭풍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자들만이 살아남겠지. 최후의 용이 깨어나면 한 시대가 종말을 맞으리란 예언이 완성될 때가 온 거야.”

힐데군드는 세상의 종말을 다른 세계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히 말하고 있었다. 어떤 슬픔이나 공포도 보이지 않는 눈빛으로.

“날 따라온 놈들은 남쪽으로 떠나면 신들의 분노에서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어. 똑똑한 놈은 어차피 뭘 해도 겨울이 자신들을 덮칠 거라는 걸 이미 알지만.”

아르투르는 강하게 고개를 저어 부정했다.

“이번만큼은 네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겠다. 미신 따위를 수긍하는 건 너 답지 않다. 힐데군드.”

힐데군드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난 담백한 사실을 전했을 뿐이야. 내 고향에는 신들이 정해둔 운명을 벽화로 그려둔 동굴이 있어. 나는 일곱 살 때 그곳에 들어가서 세상이 겪어온 모든 일과 앞으로 세상을 펼쳐질 일을 봤었지. 발타리아의 힘이 깃든 성검이 다시 나타날 것도. 그의 의지를 이은 사자가 나타날 것도 미리 정해진 바였어.”

“네가 고작 벽화 따위에 수긍할 줄은 몰랐다만.”

힐데군드는 키득키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이제 일어날 일을 알려줄게. 아르투르. 너는 결국 납득하지 못하고 겨울 그 자체와 싸우러 갈 거야. 하지만 피와 얼음의 벌판 속에서 용이 내려앉을 것이고 발타리아의 사자는 모든 빛과 생명을 잃게 될 거야.”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종교마다 하나씩 있기 마련인 흔한 종말론의 이야기 아닌가.

“두려울 것 없던 힐데군드가 그렇게 확신하는 미래가 궁금하군. 뒤에 어떻게 끝나지?”

“아무것도 없어. 말 그대로 우리 인간 세상의 끝. 영원한 겨울의 도래를 뜻하는 거지. 세상은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신들은 부활하겠지.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던 모든 문명은 망각 속으로 떨어지고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거야.”

힐데군드는 흥미로운 옛 이야기를 하듯 들뜬 태도로 예언을 전했다.

“문명이 그들에 대한 숭배를 멈추게 만들었고 덕분에 그들이 권능을 잃고 사멸해갔으니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진 않겠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영원토록 지속되는 세상이 오는 거지.”

아르투르의 표정은 이전처럼 가볍진 않았다.

“만약 네 말이 맞다고 가정한다면 무엇을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온 거냐? 힐더.”

힐데군드는 대검으로 아르투르를 가리켰다. 화산의 힘이 담긴 그녀의 검이 붉게 달아오르며 연기를 내뿜는다.

“네가 신들과 싸우러 갈 테니까. 한 몫 거들어주러 왔지.”

“황송하구만. 하지만 힐더. 그런 거짓말을 믿기엔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네가 고작 그런 이유로 이 먼 길을 왔다고?”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띄었다. 힐데군드는 칼을 아래로 내리며 사뿐히 아르투르에게 걸어왔다.

“상상해봐. 세상에 숨겨져 있던 신비가 모두 모습을 드러내서 힘을 겨루는 모습을! 피조차 얼어붙는 눈보라 속에서 수많은 생명들이 자신의 삶을 두고 엄청난 투쟁을 벌일 거야.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들어보라고. 아르투르. 약해 빠진 놈들의 보모 노릇은 잠시 멈춰두고 말이야.”

지금 힐데군드는 한 없이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전투는 우리가 평생 겪어온 어떤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거야. 인간 문명의 마지막을 장식하겠지. 기억할 전승 따위는 남지 않겠지만 사력을 다 할 가치가 있어. 이런 싸움이 있는 시대에 태어난 건 큰 행운이야. 눈보라 속의 피의 향연에 끼어들 기회가 왔는데 왜 그걸 마다하겠어?”

자신의 몸에도 흐르는 북구인의 피 때문일까. 힐데군드의 말하는 광경은 자연스럽게 연상이 되었다. 자신도 그곳에 껴보고 싶다는 열망이 일었다.

“확실하게 말할 게. 신들과의 전쟁은 아무런 가망이 없어. 하지만 진정한 전사다운. 진정한 자유인다운 죽음이 되겠지. 힐데군드의 모험은 그곳에서 인간 세상과 함께 끝날 거야. 아름다운 마무리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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