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왕 아르투르-224화 (224/248)

224.

그 해 가을에는 대단한 풍년이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수확량이 대단했으며 날씨도 따뜻했다. 문명인들은 평화가 이뤄진 것에 대한 신들의 보상이 내려졌다며 춤추며 노래했다. 그들은 마음껏 인생을 즐겼다. 알려진 모든 문명 세계에서 기근도 전쟁도 모두 물러간 세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를 두드리며 평화를 만끽했다. 아르투르와 그의 주변 인물들도 원하는 것을 찾았다. 각자의 삶이 안정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시점이었다.

평화여. 영원하라.

아르투르는 알현실의 옥좌에 홀로 앉아 텅 빈 알현실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잘 풀렸으니 이런 평화를 말년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자신의 몫은 다하는 것이다. 그 뒤에는 새롭게 자라나고 있는 젊은이들의 시대가 되리라. 그는 허리에 찬 성검을 풀어 곰곰히 살펴보았다. 많은 세월이 흘렀건만 황금의 검은 하이에버에서 각성한 모습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정말로 가장 귀한 것을 물려주셨다. 고작 낡은 검이라고 흥분했던 과거가 부끄럽군.’

그 때였다. 마음속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르투르. 들리느냐.’

‘잘 들립니다. 어머니. 간만에 말씀하시는군요.’

최근 몇 년 사이 엘라카르시스는 아르투르에게 거의 말을 걸지 않았다. 치세 초기에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거나 자신의 이름을 남겨달라는 요청을 해오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몇 달에 한번 안부 인사를 건네오는 게 고작이었다.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녀는 대답 역시 거의 해주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궁금함을 느끼는 게 전부였다.

‘올해 풍년이 들었지. 맞느냐?’

‘예.’

‘아직 내 권능이 남아있기는 하군. 다행이다. 아르투르, 모든 인간들에게 나의 말을 전하라. 마지막 밀 한 알까지 아껴서 저장하고 짐승들의 가죽으로 가장 두터운 옷을 만들 지어다. 집은 어느 때보다 튼튼하고 따뜻하게 보수되어야 한다. 무엇보다 이것을 전하라. 이번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화롯불을 키고 절대 꺼뜨리지 마라. 땔감. 땔감을 준비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어머니? 엘라카르시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혹은 다른 형태로 돌아왔다.

벌컥 - !

“폐하! 남쪽 해안가에 용머리 장식을 한 대규모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굉장한 규모여서 현지 병력으로는 대응이 힘들어 보입니다. 주민들은 현지 영주들의 인도에 따라 산으로 대피를 시작했으나 물자가 부족하여 오래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문을 어깨로 밀치며 등장한 케이는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함대는 아직 귀환하지 않았나?”

목소리의 동요 없이 침착하게 답하는 아르투르.

“예. 사막 왕국의 폭군을 폐위하긴 했으나 현지가 안정화되지 않아 동방에서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급하게 불러들여도 늦겠군. 용머리 장식이라면 북구인들일텐데, 북쪽에서의 공격은 발루아누스가 미리 경고해주었어야 할 텐데. 그건 어떻게 된 거지?”

“1차 목격자들의 제보에 따르면 동쪽에서 나타났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데네토르의 왕께서 알려주시지 못한 것도 설명이 됩니다.”

아르투르는 왕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어쩐지 너무 평화롭다 했어. 이 정도 시련은 있어야 통치에 긴장감이 있지.

“좋아. 나머진 직접 가서 알아보지. 나는 수도의 근위 기병대를 데리고 놈들을 저지하러 가겠다. 너는 동원령을 내리고 제후들을 소집해서 지원오도록.”

“예. 주군!”

기사왕이 이끄는 삼천의 근위 기병대는 말을 바꿔가며 남부 해안으로 향했다. 에쿠잘루스는 살날이 많지 않은 노마임에도 여전히 아르투르가 선두에 설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다소 힘들어하는 모습은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일부러 말을 바꾸지 않았다. 에쿠잘루스는 전용 마굿간에서 편히 쉬다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해온 주인과 함께 마지막 날까지 달리고 싶어 했다. 늙었더라도 전우는 전우다.

사흘 뒤 기사왕의 군대는 남부 해안에 도착했다.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한 바가 없기에 아르투르는 군대에 휴식을 명한 후 왕실 기사들만 데리고 정찰에 나섰다. 대규모 함대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은 많지 않았기에 상륙에 유력한 장소들을 몇 곳 추렸고 해당 장소만 집중적으로 수색한 결과 아르투르는 적의 상륙지를 직접 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다.

“휘유. 저렇게 많은 함선이라면 십만은 되겠군. 기사단장. 북구인들은 인구수가 우리보다 훨씬 적다고 했었지?”

왕실기사단장 군나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숫자로 치면 북구인 한 명이 우리 쪽 백 명 이상을 상대해야 할 거요. 하지만 모든 성인 남자가 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숫자는 비슷하겠지. 십만이라면 거대 부족 몇 개가 연합해서 공격해올 정도의 규모인데. 그 정도라면 우리가 사전에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소.”

두 사람은 더 유심히 북구인들을 살폈다.

“전부 전사가 아니군. 아이들과 여자들도 데려왔어. 그게 흔한 일인가?”

군나르는 생각해보다가 말이 되지 않는 지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군. 대부분의 여자들도 싸울 줄 알지만 인구가 희귀하니 보통 집을 지키오. 어린아이들을 약탈 원정에 데려올 이유는 하등 없고.”

“그렇다면 다른 약탈 원정은 아닌거군. 이곳을 정복해 눌러 앉을 셈인가? 그렇다면 저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기사왕은 대규모 북구인 선단을 내려 보며 여러 가능성을 추론해봤다. 저들은 왜 모든 가족들을 데리고 내 왕국의 한복판으로 왔는가. 손쉬운 정복 상대라고 생각해서? 그럴 리는 없다. 그렇다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가?

“폐하!”

또 다른 친위 기사인 시라노가 다급히 외쳤다. 아르투르는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경고를 느끼고 본능적으로 감각에 집중했다. 우측 상단에서 둔탁한 강철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들고 있었다. 기사왕은 황금의 검을 단숨에 들어 날아드는 강철을 받아쳤다. 성검의 빛에 조각나리라는 예상과 달리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겨 나왔고 도로 뱅글뱅글 돌며 원점으로 돌아갔다.

“오호라. 한방에 머리가 깨지진 않는다라. 지상 최강이라는 별명이 가짜는 아니군.”

목소리의 주인은 굉장히 젊은 청년이었다. 웃통을 까고 있는 그는 온 몸이 근육질이었고 거의 자신과 비슷한 체격이었다. 덜 자란 수염이 아니었다면 당연히 장성한 전사로 간주만한 사내였다. 오른손에는 회전도끼를, 왼손에는 긴 장검을 든 청년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르투르는 그의 눈빛에서 자신을 향한 끝없는 호승심과 집착을 느꼈다.

“짐을 만나자마자 무기부터 던진다라. 이 땅의 주인인 내게 이럴 정도면 네 무리가 적대 의사를 가지고 왔다고 봐도 되겠지?”

아르투르는 이런 도전적인 시선을 간만에 받았기에 가슴이 끓어올랐다. 젊은 시절이 떠올랐다.

“하. 겁먹은 개처럼 숨어서 엿보기나 하던 늙은이가 할 소리냐?”

“흐하하하. 재밌는 젊은이군. 운 좋은 줄 알게. 젊은 시절에 만났으면 이미 자네를 반으로 갈라버렸을 거야.”

아르투르는 호쾌한 웃음으로 적당히 상황을 모면해보려 했다. 상대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생사결을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은 못한다는 이야기네? 옛날 타령하는 늙은이들이 다 그렇지. 쫄리면 튀시든가. 지금 도망치면 봐줄게.”

킬킬 웃으며 중지를 올려 보이는 청년을 본 아르투르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면 응전해 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위대한 전사의 자질이 보이는 자를 펴보지도 못하고 죽이고 지지 않은 마음이 있었는데, 아쉽게 되었다. 기사왕은 이미 흥분한 에쿠잘루스를 몰아 청년에게 돌격했다. 기사왕은 질풍 같이 접근해 벼락과 같이 성검을 내리쳤다. 청년은 대응도 못하고 그대로 쪼개졌……어야 했다.

“?!”

캉 -!

청년은 날렵하게 도끼와 검을 교차해서 성검을 받아내며 자신의 옆으로 지나치는 에쿠잘루스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어찌나 힘이 센 지 육중한 전투마인 에쿠잘루스가 휘청였고 예상치 못한 일격에 아르투르는 안장에서 굴러 떨어졌다.

“으아아아아!”

청년은 틈을 놓치지 않고 자신을 향해 달려들어 사정없이 도끼와 검을 연달아 내리쳤다. 아르투르는 재빨리 일어나 공격을 능란하게 받아치며 전투를 이어갔다. 이를 보던 친위 기사들이 왕을 돕기 위해 합류하려 했으나 아르투르가 손을 내저었다. 그는 간만에 전투의 무아지경에 빠져들었고 이를 이어가고 싶었다. 아르투르와 청년의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매 번 공격과 방어가 바뀌었고 발걸음을 현란히 옮겨가며 싸웠기에 위치도 계속 반전되었다. 청년의 공격은 폭풍처럼 매서웠으나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이건 완전한 괴물이군.’

상대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만 했다. 상대는 위대한 전사의 자질이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위대한 전사였다. 왕실 기사들과 싸워도 무방할 정도의 실력자였다. 저 나이에 이 정도 성과를 이뤘으니 자만심이 넘칠 법도 했다.

“하! 노땅 주제에 제법이군. 하지만 기껏해야 그 신물에 의존해서 버티고 있는 것이지!”

“자네도 마법 도끼를 쓰는 판이니 날 뭐라고 할 건 아니네.”

두 사람은 희열과 흥분 속에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르투르는 청년의 눈매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선가 본 느낌이지만 생각에서 지워버렸다. 상대는 집중을 잃은 채 싸우기엔 너무 위협적이었다. 저 청년은 온 힘과 정신을 다해 싸워야하는 강적이다!

아르투르가 전투의 흥분 속에서 극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되었을 때 청년 역시 흥분을 가득 끓어 올려 더욱 사나운 공격을 가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굉장히 파격적인 공격이었으나 효과는 확실했다. 아르투르는 이제 청년의 공격을 막아내기에 급급해졌다. 간발의 차이로 급소를 피하거나 방어를 포기하고 갑옷에 의존하는 일이 갈수록 많아졌다.

“으하하하하! 그 따위 무거운 깡통이나 입고 있으니 체력도, 민첩도 떨어지지! 노땅! 이제는 내가 최강자다!”

청년은 호승심에 함성을 질렀다. 이미 곳곳에 상처를 입혔고 갑옷에 구멍을 내둔 상황이었다. 저 늙은 왕의 방어는 한계에 이르렀으니 조금만 더 압박하면 수급을 취할 수 있으리라! 청년의 공격 템포가 한층 빨라졌다. 저 투구에 도끼를 꽂아 넣으면 나의 승리다!

“죽어!”

소년이 더욱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할 때 아르투르는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궁지에 몰린 상대에게 맹공을 가해 마무리를 하는 건 좋지만 상대의 역량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우선이었다. 무모한 공격은 균형이 깨지기에 필연적으로 방어의 부족을 유발한다. 무기술의 기본은 적을 죽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는 것. 적은 죽고 나는 사는 것이다.

두 사람의 무기가 다시 교차할 때 양측은 서로가 승리했다고 믿으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르투르가 단숨에 느린 척하던 속도를 올리며 상대의 목을 찌르려는 순간.

콰앙 - !

두 사람은 공중에서 날아드는 공격에 굉장한 위협을 느끼고 양 옆으로 휙 물러났다.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파였다. 제때 대응하지 못했다면 두 사람 모두 고기 파편이 되어 나뒹굴고 있을 터였다. 먼지 속에서 붉은 갑옷을 입은 전사가 몸을 일으켰다. 길다란 백금색 머리를 휘날리며 나타난 전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기사왕을 바라보았다.

“낄낄낄. 너 굉장히 약해졌구나. 살도 많이 쪘고.”

“……힐더?”

“그래. 나야. 오랜만이다. 아르투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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