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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3화 (223/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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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없는 일이야. 놈은 왕비의 사촌이자 귀족원 수장의 사위다. 재판 따위로 교수대로 보낼 수 있는 길은 없단 말이지. 그놈 수하들이나 목이 매달리고 끝났겠지. 그놈을 방조한 진짜 몸통들은 뒤로 숨은 채 말이야.”

케이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는 사법관이시니 법에 따라 행동하셔야죠. 폐하의 법령에 따르면 반역에 가담한 평민은 사형, 귀족은 작위 및 재산 박탈 후 추방입니다.”

“반역자가 저항한다면 무력을 써도 된다는 조항도 있지. 놈이 일격을 견디지 못한 걸 어쩌겠니. 정 그러면 나도 생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고 하면 될 일 아니냐. 알랑송 자작이 너무 약해서 유감스럽다는 성명이라도 낼까?”

심드렁한 카밀의 태도에 케이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니까 평민이랑 귀족 간에 적용되는 법률이 다른 게 불만이신 거잖아요. 귀족들에겐 가문 대대로 내려온 유산이 가장 귀한 거에요. 우린 지금 망나니 도련님들에게 본보기를 보일 기회를 놓친 거라고요.”

카밀은 흥분해서 항변했다.

“그건 순진한 생각이다. 케이. 귀족들은 그래도 연줄을 이용해서 살아남고 다시 재기할 기회가 있어. 제 놈들끼리 혈연과 지연으로 다 얽혀있으니까. 그놈들이 개짓거리를 못하게 할 방법은 하나야. 잘못을 저지르면 제 놈들 목숨도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려주는 거지. 폐하께선 노예를 사고팔며 소유한 이들을 반역자로 간주하라고 하셨고,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뭐든 해도 좋다고 하셨어. 난 그분의 명에 따를 뿐이다.”

아이씨. 꽉 막힌 사람 같으니라고.

“훌륭한 신하라면 폐하의 의도를 좀 헤아려보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요?”

“훌륭한 신하라면 시류 따위에 얽매이지 않고 충직한 봉사를 제공해야지.”

케이는 후- 하고 한숨을 쉬면서 이마를 매만졌다. 비슷한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던지라 그 때마다 뒷수습을 맡은 자신은 진저리가 났다.

“됐어요. 재판은 이쯤 하고 간만에 같이 식사나 하러 가죠. 개인적으로 전할 것도 있고요.”

케이는 일어나 양털로 된 외투를 입었고 카밀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번에도 날 풀어주면 뒷수습은 어떻게 하려고?”

“제가 욕 좀 먹으면 결국 해결될 겁니다. 이제 와서 귀족 가문들이 불만 좀 있어도 뭐 어쩌려고요. 반란을 일으킬 거면 십년은 전에 했어야죠. 뭐. 그땐 아직 폐하가 성질이 불같으실 때이긴 했네요. 그 때 같았으면 방금 난리쳤던 사람들 모두 다 불려가서 혼 좀 났을 겁니다. 지금이 그나마 유해지신 거죠. 자, 이거 두고 가시면 안 되죠.”

케이는 붉은 용이 새겨진 보검을 도로 내밀었다. 왕의 사법권을 상징하는 물건을 도로 건넨다 함은 재신임 의사를 드러낸 것이었다.

“……계속 사법관으로 일해도 좋다고 하신 거냐? 이번에 처단한 놈은 왕가와 연줄이 있는 사람이어서 은퇴하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말이다.”

카밀은 왕의 보검을 받아 허리에 조심스레 찼다. 이 외로운 노인에게 사법관의 직위는 자신의 존재 의의이기도 했다.

“알랑송 자작은 반역죄를 저지른 현장에서 사법관에게 칼을 빼들었습니다. 제압 도중 죽은 걸 어쩌겠어요. 귀족의 권리를 보장받고 싶었으면 항복을 했어야죠. 지금쯤이면 대왕께서 직접 법을 어기지 않은 사법관을 해임할 일은 없다고 공포하셨을 겁니다. 재판이야 하도 지랄들 하니까 그냥 열어준 거고요. 폐하의 생각은 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냥 더 영악해지신거죠.”

“흠. 그렇다면 더욱 충실히 일해 왕의 성은에 보답해야겠지.”

“아. 사고 좀 그만 쳐요. 아저씨. 제가 힘들단 말입니다!”

***

얼마 뒤, 케이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드넓은 정원에서 주저앉아 모닥불 위에 양을 굽고 있었다. 건너편에 비스듬히 드러누운 카밀은 느긋이 정원과 저택을 둘러보았다. 어지간한 귀족들도 엄두를 내기 힘든 화려한 저택이었다.

“네가 부유해졌다는 소문은 들었다만, 너무 돈을 많이 쓴 것 아니냐? 결국 네 영지는 농사도 잘 안 되는 고원과 소금기 많은 해안이잖나.”

“아. 그거요. 마스터가 만류했는데 일부러 거기로 고른 거에요. 양을 기르고 내다팔기 좋은 곳이거든요.”

케이는 꼬챙이에 꿰인 양고기를 빙빙 돌리며 구석구석 불에 익히는 사이 카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카밀은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여러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당사자에게 직접 들을 수 있는 건 더 의미가 컸다.

분명히 건국 초기에 케이를 보는 세간의 시선은 좋지 않았다. 운 좋게 마스터를 잘 만나 작위를 얻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봉분을 받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딱히 용맹하지도, 잘 싸우지도 않던 것이다. 결투 신청이 날아들면 대전사를 보냈고 토너먼트는 예선 탈락에 그쳤다.

“기사왕의 종자인데 어떻게 배운 게 저렇게 없냐? 쯧쯧. 역시 운이 좋아 날로 먹은 놈이야.”

심지어 가문의 문장은 풀을 먹는 양떼였고 가문의 모토는 “잘 먹고 잘 살자”였다. 푸른 피의 귀족이라면 모름지기 검과 창을 들고 나서 군공을 세워 가문의 명성을 드높일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를 비웃기 위해 양치기 백작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의 양치기 백작은 부러움과 경의가 담긴 호칭이었다. 케이 백작은 왕비를 제외하면 가장 부유한 제후였고 걸맞는 강력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었다. 유일한 공작인 용병공이나 유서 깊은 위르마넨 가문의 수장인 아델라이데 후작 정도나 그와 비견할 만 한 지위에 있었다.

“전 양들이 고맙습니다. 전부 그 아이들이 가능하게 해준 거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했다는 거냐? 다른 귀족들은 할 수 없는 방법으로 해낸 거잖나?”

“그 치들이야 토너먼트 나가서 상 탈 생각만 하니 양을 어떻게 기를 지, 농사를 어떻게 지을 지는 관심이 없죠. 저는 거기서 앞서 갔을 뿐이고요. 방법은 간단해요. 엄청나게 큰 목장을 짓고 그곳에 양들을 엄청나게 많이 기릅니다. 목장 옆에는 양털로 옷을 짓는 엄청나게 큰 직물 공단을 짓습니다. 엄청나게 만들어진 옷들을 해운으로 수출합니다. 그러다가 양이 너무 많아지면 도축용으로 내다 팝니다. 그러면 돈이 벌려요. 참 쉽죠?”

카밀은 푸하하- 하고 웃었다. 케이는 간단히 말하고 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여러 사투와 번뜩이는 재치가 있었겠지.

“네가 원하는 걸 얻은 걸 보니 기쁘구나.”

“저도 그렇네요.”

양고기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구수한 살 냄새를 풍겼다. 두 사람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꼬챙이에 꿰인 양고기를 포식했고 맥주를 들이마시며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케이는 이제 막 인생이 전성기에 오른 시절이었으나 카밀은 살아온 날이 앞으로 살날보다 뚜렷이 많았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은퇴를 하고 여생을 정리할 시점이었다. 그러나 카밀에겐 일 외엔 남은 것이 없었고 남길 것도, 남길 사람도 없었다.

“가족들과는 어떠냐?”

“아내가 생각보다 문명에 빨리 적응했어요. 이제는 당당한 백작부인으로 영지를 잘 다스리고 있답니다. 자식도 다섯 명이면 나쁘지 않네요. 두 명 정도 있으면 딱 일 것 같았는데 말이죠.”

두 사람은 짠-하고 잔을 부딪쳤다. 두 사람이 함께 견뎌온 세월은 길고 길었고 공유하는 감정과 기억은 수 없이 많았다. 카밀에게는 보살필 젊은이가 필요했었고 케이는 보고 배울 어른이 필요했었다. 두 사람은 부자 관계와 유사한 유대를 가졌었다.

케이가 알딸딸하게 취한 상태로 중얼거렸다.

“아저씨. 우린 참 서로에게 요긴한 사이였어요. 그쵸?”

“알면 잘해라. 욘석아.”

케이는 혀가 꼬부라지는 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제가 아저씨 진짜 가족은 아니잖아요-오.”

“취했으면 들어가서 자라.”

“아니. 제가 할 말을 전하면 아저씨가 무슨 반응을 할지 몰라서- 미리 하는 이야기에요.”

카밀은 케이가 전할 말이 있다는 걸 눈치채고 침묵을 지켰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고 케이가 물길을 틀었다.

“아저씨의 누나가 살아있는 것 같아요. 조카들도 계신 것 같고요.”

평소엔 감정이라곤 내보이지 않던 백발의 노인이 크게 눈을 떴다.

“뭐?”

고향 마을에 기근이 닥쳤을 때, 누님은 동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를 팔았다. 당연히 이런 혼란의 시대를 겪는 와중에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살아있더라도 찾아낼 방법 따위 있을 리가 없잖나.

“옛날에 누나 이야기를 해주셨잖아요. 혹시나 해서 십년 전부터 왕비님 도움을 받아서 좀 사람을 찾아봤습니다. 워낙 옛날 이야기여서 시간이 걸렸어요. 아저씨와 동일한 이름을 가진 남동생이 있었고, 같은 사연으로 마을을 떠났던 노인이 한 명 있어요. 고향 마을과 가족에 대한 기억도 얼추 일치하고요.”

케이는 손을 떨고 있는 카밀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고향 마을에서 떠나 이리저리 돌다가 결국 랑트리뷔아체의 상인에게 팔려간 모양이더군요. 불행 중 다행으로, 주인이 유언으로 몇몇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다고 하더군요. 그 뒤로는 함께 해방된 노예와 결혼해서 다른 지방으로 옮겨가 정착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손자 손녀도 있고요. 동일인인지는 직접 만나보셔야 할 것 같아요.”

카밀은 일가족이 죽은 날부터 싸늘히 식어있던 심장이 도로 뜀박질을 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일말의 기대를 가진 채 케이가 알려준 마을로 떠났다.

왕의 사법관은 저녁 어스름이 다가오는 시간에 시골 마을의 외딴 언덕에 도착했다. 눈에 보이는 것은 통나무로 만든 큰 저택으로, 여러 가족이 함께 살기 위한 집이었다. 카밀의 시선은 패다 만 장작과 도끼로 향했다가 도로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살아있을 리가 없다. 미련이 남지 않기 위해 확인을 해볼 뿐이다.

창가 너머로 구수한 빵 냄새가 풍겨오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슬쩍 살펴보니 곁눈질을 해보니 스무 명 정도 되는 대가족이 함께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들은 위대한 삶과는 거리가 먼 촌부들이었으나 얼굴에서는 모자랄 것 없는 행복함이 느껴졌다.

터벅. 터벅.

똑.

똑.

똑.

벌컥 -

“누구요?”

집에서 나타난 중년의 남자는 위 아래로 카밀을 훑어보다가 허리에 찬 장검을 보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는 기사왕이 즉위하던 해에 전쟁터에 끌려갔던 사내이기에 눈앞에 있는 백발의 노인이 풍기는 중압감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건 사람을 죽이는 걸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섬뜩함이었다.

이런 자들과 마주 쳐서 좋을 일은 하나도 없다. 서둘러 달래서 보내야했다.

“나리. 잘못 찾아오신 것 같습니다. 이곳은 평범한 농부들의 집일뿐입니다. 여비나 식사가 필요하신 거라면 즉각 내어드리겠습니다.”

카밀은 자신을 보고 고개를 조아리는 사내를 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하긴 언젠가 우연히 물가에 비친 자신을 본 적이 있었다. 자신이 젊은 시절 쏴죽이던 북구인들이 그곳에 있었다. 투쟁으로 닳아버리고 피에 굶주린 악귀의 얼굴. 일반인들이 자신을 무서워하는 건 당연하리라.

“애. 누가 왔니.”

뒤편에서 들리는 노파의 목소리.

“어머니! 들어가 계세요! 제임스! 할머니 나오시지 못하게 해!”

“이 애미가 늙었다고 무시하는 게냐! 애미 집을 찾아온 손님은 직접 봬야지! 예끼! 비켜라!”

노파가 막무가내로 지팡이를 짚으며 나오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마침내 문 사이로 노파가 모습을 드러낸 노파는 왕의 사법관과 얼굴을 마주했다.

“뉘시길래 이 늦은 시간에 오셨수? 실례인 것도 모르우?”

카밀은 말없이 노파를 내려다보았다. 노파도 그의 시선을 의식한 지 뚫어져라 눈동자를 쳐다봤다. 기시감이 느껴졌다. 시간의 거센 풍파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모두 부식시켰다. 잡초처럼 짓밟히며 살아온 민초로서 삼켜야만 눈물은 그들의 의지를 처절하게 짓밟아왔다. 어린 시절은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카밀?”

“누님.”

남매의 눈동자는 굴곡진 세월을 넘어서 상대의 얼굴에 남은 마지막 흔적을 찾아냈다. 백발의 노인들은 서로의 모습을 어린 시절의 모습에 겹쳐볼 수 있었으며 길고 긴 그리움의 시간을 지나 서로를 마주했음에 안도했다. 그들은 서로를 감싸 안았고 한없는 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힘들었던 시간을 위로하였다.

남동생과 누나는 헤어지던 날의 손을 다시 맞잡은 채, 삶의 마지막에서 구원을 목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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