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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2화 (22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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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무리아의 중부에 있는 항구 도시인 트란트는 딱히 경쟁력 있는 상품이 없어 무역의 중심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도시가 피오렌치아로 가는 항로에 있는 점을 활용해 트란트를 숙박업과 여흥을 제공하는 중간 정박지로 내세웠다. 즉, 도시에 방문하는 상선은 많았으나 굵직한 물건이 오가는 교역 장소는 아니었다. 즉, 세수는 별로 못 거두는데 손은 많이 가니 왕국 행정부에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지역이 되었다.

다시 말해, 법을 피해 거래를 하고자 하는 자들에겐 최적의 장소였다. 귀족의 인장 반지를 낀 젊은 사내가 수십 명의 일꾼과 함께 동방 풍의 범선으로 모여들었다. 각자 수십 개의 럼주통을 짊어진 채였다. 부두 경비를 서고 있어야 할 경비병들은 차가운 바닷바람을 피해 선술집에 모여 스트립쇼를 구경 중이었다. 왁자지껄한 음악소리와 밤의 짙은 어둠이 그들을 가려주었다.

비단을 걸친 구릿빛 피부의 노년 사내가 배에서 내려왔다. 뒷켠에는 무장한 흑인 병사들이 서슬 퍼런 언월도를 들고 있었다. 노인은 못마땅한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사내는 아르투르가 피오렌치아를 장악하는 것을 도와 여러 특권을 얻어냈던 바 있던 동방의 대상인, 마라이카였다.

“왜 당신들만 왔지? 화물은 어디로 갔나?”

마라이카의 말에 젊은 귀족은 기가 찬 듯이 웃었다.

“하. 이교도 놈아. 우리가 네놈이랑 대작이라도 하려고 럼주를 가져왔겠어? 너희가 가져온 거나 보여줘.”

마라이카가 같잖다는 표정으로 손뼉을 치자 선원들이 진귀한 양탄자와 비단을 한 가득 내려두었다. 젊은 귀족의 눈에 탐욕이 들불처럼 번졌다. 정가로 구입하려면 영지라도 팔아야 할 값어치의 물건들이었다. 역시 위험 부담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이번엔 내가 화물을 봐야겠군.”

마라이카는 직접 럼주통을 열어 안에 있는 화물들을 일일이 확인했다. 손이 묶이고 재갈이 묶여있는 준수한 외모의 젊은이들이 두려운 눈길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동방의 언어로 말을 걸었지만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좋아. 안목이 제법 괜찮구만. 뒤처리는 깔끔하게 했겠지?”

“어차피 실종 처리된 빈민이나 농노들이니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자들이오. 내 쪽은 꼼꼼하게 처리가 됐으니 당신이나 걱정하시오. 혹시 나한테 불똥이라도 튀면 절대 가만있지 않을거요.”

“퍽이나. 애들아. 빨리 배에 실어라! 출항 준비!”

마라이카는 젊은 귀족을 비웃으며 돌아섰다. 왕실에 연이 있다는 배경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망나니 주제에 입만 살았기는. 레오폴트 왕이 보장하던 막대한 노예 공급이 하루아침에 끊겨서 노예 시장 전체가 경색 되어버렸다. 자신의 본국, 사막 왕국은 노예제에 기반하던 나라이기에 사회가 큰 혼란에 빠져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렘에 처박혀 노예들을 죽이는 낙으로 살던 대마초 중독자 왕이 이제 자신의 신하와 그 가족들을 잡아 죽이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도 일족의 어른이라고 안심하고 있다간 개밥이 될 거다. 살아남으려면 놈이 원하는 걸 가져다줘야 해. 아무튼 이번 거래가 끝나면 레무리아로는 돌아오지 말아야겠군. 저 모자란 놈을 믿었다간 큰 일이 날 거다.’

핑 - !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을 때, 노련한 동방 상인은 직감했다.

좆 됐다.

첫 화살에 자신의 호위병이 쓰러졌고 야음 속에서 계속 잇달아 화살이 날아들었다. 자신의 선원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갈 때 마라이카는 노구를 상자 위로 던지며 처절하게 외쳤다.

“항복! 항복하겠소! 살려주시오!”

그제야 화살 세례가 멎더니 횃불을 든 날렵한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선두에는 백발의 장궁수가 있었다. 노인이 살벌한 미소를 지으며 붉은 용의 문양이 새겨진 장검을 뽑아들자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의 정체를 알아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대왕의 저승사자, 사법관 카밀이었다.

밤바다의 부두로 카밀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를 인신매매 혐의로 체포한다. 칙령에 따르면 인신매매는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된다. 즉, 이제부터 너희 모두는 반역자로 체포되었다는 뜻이지. 얌전히 무기를 버려라.”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카밀의 악명을 알았기에 순순히 투항해 밧줄에 묶였다. 젊은 귀족만 빼고.

“이 무슨 무례냐! 나는 알랑송 자작 체자레 델 라니아다!”

알랑송 자작의 외침에 병사들이 멈칫했다. 신분의 경계가 뚜렷한 세상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사법관! 나는 왕세자의 외가 친척이란 말이다! 당장 병사들을 무르지 않으면 호된 꼴을 당할 것이다!”

“나는 지금 왕의 정의를 집행 중이다. 반역자는 저항하지 말라.”

무뚝뚝하게 답한 카밀은 알랑송 자작을 향해 뚜벅뚜벅 다가왔다. 반백년이 넘는 세월을 수라로 살아온 사법관의 눈에선 살기가 느껴졌고 알랑송 자작은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자신은 한 다리만 건너면 왕세자와도 친척이 되는 고귀한 몸이었다! 고작 평민 관리 따위에게 주눅 들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당당히 검을 뽑아들었다.

“감히 평민 따위가 어딜 노려보느냐! 물러서지 않으면 베어버리겠…….”

푸샥 -

사법관의 검이 번득였고, 자작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사법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었다. 난 이 일이 참 좋단 말이지.

***

피오렌치아의 법원 건물. 재판관 역할을 맡고 있는 케이 백작은 분노를 쏟아내는 방청객들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작! 재판도 필요 없소! 당장 사형 판결을 내리시오! 감히 평민이 내 사위를 죽여?! 그 죄는 죽음으로 밖에 갚을 길이 없소!”

“사형! 사형! 사형!”

왕의 자문위원이자 귀족원의 의장인 타에라트 백작을 필두로 수많은 귀족들이 흥분하여 피고인의 죽음을 외치고 있었다. 서로 파벌을 나누어 헐뜯기 일상인 귀족들이 이렇게 단합된 목소리를 외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었다. 케이는 머리가 지끈거려오는 지 이마를 짚었다. 자신이 피고인석에 앉히려고 했던 건 알랑송 자작이었는데, 왜 카밀이 앉아있는 건가.

‘쯧. 알랑송 자작의 죄목을 밝히면 귀족 사회에서도 여론이 좋지 않았을 거야. 그걸 기반으로 귀족들의 사법 특권을 제약해나갈 수 있었을 텐데. 여론이 이렇게 되어서야 곤란하군.’

“정숙! 정숙하십시오! 나는 대왕 폐하를 대신해서 재판을 주관하고 있소!”

그러나 귀족들의 아우성은 잦아들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알랑송 자작의 지인들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서 그가 얼마나 훌륭하고 쾌활한 자였는지 증언했다. 가장 큰 거물은 대왕의 장모였다. 늙은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조카에 대해 증언했다. 그는 웃어른을 잘 모셨으며 왕실의 봉사자로서 많은 역할을 맡아왔음을 강조했다. 그런 알랑송 자작이 반역 행위를 할 리가 없으며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소리치자 귀족들은 분노에 차 정의를 요구했다.

“케이 백작! 정의를 이뤄주시오! 알랑송 자작은 충신이었소!”

워낙 그들의 열기가 강해 케이가 자숙을 명해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다음으론 알랑송 자작의 젊은 부인인 타에라트 백작의 영애가 나와 시키지도 않은 연설을 했다. 자작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가정적인 남편이었는지 증언했다. 그가 젖먹이 아이를 내보이며 아버지 없이 살아갈 아이의 설움을 설파하자 이번엔 법정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것이 정의다!”

혈기가 넘치는 십 수 명의 귀족들이 방청석에서 일어나 카밀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을 가로 막은 건 네 명의 왕실 기사들이었다.

“비키시오! 노땅들! 요즘 젊은이들은 눈에 뵈는 게 없단 말이오!”

왕실 기사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서로를 쳐다봤다.

“요즘 얘들은 우리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나?”

“기분 좋구만. 처음에 개종했을 때만 해도 야만족 이교도 출신이라고 다들 멀리 했는데 말이야.”

“에잇! 비키란 말 안 들리나! 요즘 젊은이는 노인 공경 따위 모른다고! 다쳐도 몰라!”

왕실 기사들은 껄껄 웃었다.

“노인 공경? 우린 노인 공격만 배우고 자랐지. 덤벼봐라. 요 귀여운 놈들아!”

왕실 기사들이 한번 발길질을 할 때마다 청년 기사들이 펑펑 날아다녔다. 법원은 순식간에 격투장이 되었으나 소란은 금세 정리되었고 귀족 청년들은 입에 문 채 경비병들에게 끌려나갔다. 왕실 기사들은 실려가는 청년 기사들을 보며 비웃음을 머금었다.

“우리 때는 말이다. 애건 노인이건 제 몫을 못하면 눈폭풍 속에 버려졌다. 식량 사정이 나쁜 부족은 냉동고에 가둬버렸고 말이야. 부모 잘 만나서 편히 자랐으면 얌전히 살아. 병신들아.”

방금 벌어진 광경에 방청객들은 왕실 기사들이 원래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기억해냈고 금세 조용해졌다. 케이는 이 틈을 타 비공개 재판을 선언하고 방청객의 전원 퇴장을 선고했다. 상황이 정리된 후 케이는 직접 피고인석으로 내려가 카밀과 얼굴을 마주했다. 카밀은 자유로운 상태이기는 했지만 지금은 고발당한 신분이었다.

“충분히 죽이지 않고도 제압할 수 있으셨잖아요.”

“굳이 그래야 하는 이유가 뭐냐? 케이.”

케이는 눈앞에 있는 노인의 인상을 살폈다. 카밀은 이제 확연히 늙었지만 약해지는 대신 더 고집스럽고 굳센 성격이 되어갔다. 카밀은 끝내 모든 가족을 잃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르투르는 몇 차례고 새로운 출발을 설득하며 높은 작위를 주겠노라 제안했지만 본인이 끝내 모두 거부했다. 아르투르는 그의 뜻을 존중하긴 했으나 상당히 멋쩍은 관계가 되어버렸다.

‘아저씨는 그렇게 나를 제외한 모두에게서 고립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아저씨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불편해했다. 그럴수록 아저씨는 일에만 몰두했고 더욱 괴팍한 사람이 되어갔었어.’

역설적으로 그 점이 카밀을 완벽한 사법관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는 모든 이를 어떤 사감도 없이 대했다. 대제후나 왕실 구성원이 연루된 부패조차 예외 없이 수사하고 공개했으며 사생활이 없으니 사익 추구도 없다. 오늘 왕국이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는 원인엔 결코 카밀의 몫이 적지 않았다. 귀족들이 기회가 될 때마다 사법관의 교체를 주장함에도 아르투르가 듣지 못하는 척 넘겨버리는 까닭이었다.

“귀족 사이에서도 그의 막 나가는 행실을 경계하던 자들이 많았어요. 자작이 재판을 받았다면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카밀은 무언가 미심쩍고 못마땅한 목소리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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