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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1화 (22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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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조의 결합을 축하하는 행사는 일주일이 넘게 지속되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일을 쉬고 마음껏 먹고 마시는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피오렌치아 근교에 사는 모든 주민들에게는 금화가 명당 한 닢씩 주어졌는데 이 모든 경비는 왕비의 개인 재산에서 지출되었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인 그녀의 재산에는 작은 부분에 불과했지만 피오렌치아 시민들은 왕실의 관대함을 찬양했다.

“왕비님이 바로 우리 피오렌치아 출신의 명문가이십니다! 여러분! 왕비님을 배출한 우리야말로 왕국에서 제일가는 신민들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덕분에 피오렌치아 인들은 자신들을 “왕비의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콧대를 높이 세우고 다녔다. 실제로 피오렌치아는 대양 무역의 중심지이자 수도가 되었기 때문에 굉장히 부유하고 화려한 도시가 된 것도 사실이었다. 때문에 다른 지방 사람들은 등 뒤에서 수군거릴 뿐이었지만, 이에 대놓고 도전장을 던진 이들이 있었다.

“왕비의 사람들이라고? 우리는 다 같은 기사왕의 백성들인데 그 무슨 무엄한 말인가?! 놈들이 수도로 꼽힌 건 단순히 입지가 좋았을 뿐이오. 저 건방진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걸 언제까지 두고 봐줄 수는 없소. 두라노 인들이여! 각성하라!”

“옳다! 옳다! 옳다!”

왕실 근위병을 전담해서 배출하고 있는 두라노 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진정한 충복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아주 높고 강직한 두라노 인들은 신뢰가 필요한 모든 영역에서 중용받고 있었다. 왕궁에서 하인이나 하녀들의 절반은 두라노 출신일 지경이라 다른 지방에서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또한 영구 면세 혜택을 받고 있는 두라노는 발달한 공업을 기반으로 유일하게 피오렌치아의 경제력에 비견할 만한 도시이기도 했다.

“이 두라노 촌놈들이 어딜 끼어들어!”

“느그들이 충성이 뭔지 알어?! 우리야말로 진짜 충복이다!”

“하! 우리가 내는 세금은 너희가 바치는 성납금의 열 배는 될 거다. 어디를 더 이뻐하실까?”

“그래서 왕실 근위병은 어느 도시에서 배출하나?”

“두고 봐라! 조만간 그것도 우리 차지가 될 테니!”

결국 두 도시는 서로를 의식하며 왕국의 모든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시작했다. 두 도시 사이에 운동 시합이라도 있는 날에는 폭동을 방불케하는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왕실은 공식적으로는 중립의 입장을 취했으나 뒤에서는 이런 열기를 부추겼다. 정도를 넘지 않는다면 충성 경쟁은 지배자의 입장에선 권장할 만한 것이었다.

피오렌치아 근교의 정원, 늙은 군인은 기사왕을 알현하고 있었다. 기사왕은 레니에 대장이 자신을 위해 봉사해주는 조건으로 피오렌치아 인들의 자치권을 연장시켜주는 계약을 했었고 그동안 조건부로 작위를 유지해도 좋다는 칙령을 내렸다. 레니에 대장의 봉사는 치세 초반에 아직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통치에 의심을 품던 신민들의 불만을 억누르는데 효과적인 조치였다.

“공화국의 시민이던 자들이 국왕에게 서로의 충직함을 증명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다니. 자네의 관점에선 실로 우스운 일이 아닌가.”

늙은 군인은 입을 다문 채 계속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였다. 진심을 말해서 불충이 된다면 침묵을 지켜야하는 게 궁정 신하의 도리였다.

“일어나게. 레니에 자작. 자네 정도의 경력이면 일일이 눈치 보지 않아도 돼. 은퇴를 청하러 온 거지?”

레니에는 더욱 고개를 조아렸다.

“제 의중을 살펴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폐하.”

“아니야. 아니야. 고개를 들고 내 앞에 와서 앉게. 여러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니 그렇게 해주게. 왕세자와 맏딸이 결혼을 했으니 나도 곧 이제 할아버지가 될 나이야. 권위에 필요 이상으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레니에는 고개를 들어 눈치를 살폈고 세상 경험이 풍부한 노인답게 아르투르의 진심을 알아차렸다. 그는 비굴한 태도를 버리고 자연스럽게 걸어와 아르투르의 앞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맨 처음 피오렌치아의 자치를 약속했을 때 자네 나이가 나 정도였지. 나도 그동안 많은 게 변했네.”

레니에는 아르투르가 짐이란 칭호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젊은 시절 아르투르는 누군가 칭호를 틀리면 인상을 노골적으로 구겨대곤 했다. 왕정에서 자란 사람에겐 당연했지만 하지만 자유민 출신인 자신에겐 꽤 나 고역이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폐하.”

아르투르는 직접 적포도주를 따더니 유리잔에 따라주었다. 두 사람은 가볍게 잔을 부딪친 후 맛을 음미했다.

“좋은 날이니 낮이라 해도 좀 들도록 하지. 자네 생각은 그동안 어떻게 바뀌었는지 듣고 싶네. 그대는 여전히 피오렌치아가 공화국으로 돌아가길 바라나?”

레니에 대장은 조용히 눈을 내리 깔았다. 한때 그는 군인다운 풍채를 가진 강건한 사내였지만 지금은 왜소한 늙은이였다. 아르투르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의 미래를 엿보았다. 아직은 누구와 싸워도 무적의 칭호를 유지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왕비의 미모가 시들어가고 있듯 자신의 몸도 늙는 여정을 시작한 나이였다. 마스터 나이트를 패배시킨 건 세월이었다.

“피오렌치아 인들은 서둘러 폐하의 품에 안기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제가 작위를 반납하러 온 이유이고요.”

“난 자네의 의견을 물었네. 레니에.”

칭호가 붙여지지 않은 단촐한 호칭을 부른 건 사람 대 사람의 교류를 하고 싶다는 뜻일 터.

“저는 자유로이 생각할 수 있는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죽고 싶지 않겠습니까?”

아르투르는 레니에의 조심성 넘치는 태도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시민들 앞에서 자랑스레 연설하던 사내가 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노심초사하는 훌륭한 궁중 신하가 되어있었다. 레니에의 의지를 꺾어둔 것만 같아 홀가분하면서도 속이 쓰렸다.

“내가 젊었을 적엔 자네가 왜 일인 통치를 그렇게 반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네. 오히려 한 명이 평생 전권을 쥐고 있어야만 모든 게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거든.”

“폐하께서는 스스로 내세우신 믿음을 행동과 결과로 증명해보이셨습니다. 그렇게 주장하실 자격이 있으십니다.”

레니에는 여전히 그에게 마음속으로 충성을 바치지는 않았으나 상대가 천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한 위대한 영웅이란 것과 자신의 고향이 그의 통치 아래서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그렇겠지. 처음 10년에는 나도 정말 신이 나서 일했네. 모든 게 날 위해 기다리던 것만 같은 삶이었어. 그런데, 그런데 말이지 슬슬 왕관을 쓰는 게 힘이 부치고 있다네. 그거 아나? 왕이 되니 내 결정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생목숨이 걸려있는데 그런 결정을 일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내려야 돼. 그러니 내 사생활은 사라지더군. 재판하고, 군대를 이끌고, 법을 제정하고, 흉년이 들면 구휼하고, 다시 재판을 하고…… 끝이 나질않아. 그만 좀 쉬고 싶은데 쉴 수가 없네.”

“폐하께서는 인망이 높으신 분이니 따르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까?”

아르투르는 피식 웃었다.

“그래. 말 잘했군. 내가 왜 이런 이야길 자네에게 털어놓고 있을까? 난 지난 십 오년간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일하는 지 유심히 지켜봤네. 자네가 가장 정직했어. 자네는 피오렌치아의 행정관으로 일하며 자신을 위해서는 무엇도 챙기지 않았네. 항상 정해진 법과 정의에 따라 일했지. 누가 감시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왜 그랬나?”

왕은 굉장히 궁금하단 눈빛으로 레니에를 바라보았다.

“머릿속에서 단어를 고르지 말게. 난 자네 진심이 듣고 싶어.”

“이곳은 제 도시니까요. 제 고향이고요.”

아르투르는 큭큭큭 소리 내어 웃었다.

“그걸세. 자네는 나를 위해 일한 게 아니야. 스스로가 이 도시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며 일했지. 그러니까 내 맘에 드는 성과를 가져오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이 도시가 잘되길 바라는 조치들을 할 수 있던 거야. 그게 내가 지금 자네를 크게 존중하는 이유야.”

아르투르는 남은 와인을 한숨에 들이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축제의 한복판 속에서 폭죽이 쏘아 올려지고 있었다.

“모든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 사네.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것엔 진심을 다하지만 아닌 것엔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임해. 사명감을 가진 자라면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사명감을 오래 가지지 못하지. 나의 왕국은 나의 것일세. 하지만 샤를로트나 왕세자는 정성을 다해 일하지. 자기 자식이나 자신이 물려받을 게 당연하니까. 하지만 다른 관리들은? 문제만 안 생기면 되는 거야. 쉽게 쉽게 가려고 한다고. 그놈들이 일 좀 제대로 하게 만들기 위해 샤를로트가 밤을 새서 서류를 뒤적이는 거지. 그런 식으로 일하면 오래 못 살거야. 가뜩이나 몸이 좋은 여자도 아닌데.”

레니에는 왕이 말하는 요점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렇게 당연한 사실을 계속 이야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러니 지금처럼 왕실 가족들이 특출나게 똑똑하기만을 기대하는 방법으론 언젠가 한계에 부딪칠 거야.”

“하지만 테라일 왕세자님은 총명하다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야말로 신성한 왕의 피를 타고 나신 분이죠. 그분에 대한 명성은 이미 전 세계에 자자합니다. 기사왕의 후계자는 신에게 은총 받은 자라고요.”

아르투르는 허탈하게 웃었다.

“아. 테라일. 그놈이 위대한 군주가 될 건 분명하지. 실전 한번 나가 보지 않은 종자가 베테랑 기사들과 대등이 결투를 벌이고 자기 어머니랑 정국을 구상하고 있어. 얼마 전에는 가정교사로 데려온 수염 지긋한 교수가 그러더군. 이미 자기랑 수준이 비슷해서 가르칠 게 없다고. 그런데 나이가 열여섯이야. 내 아들만 아니었다면 열등감과 위협을 느꼈을 걸세. 하지만.”

기사왕은 긴 한숨을 쉬었다.

“지나치게 잘나다보니 세상이 자기 체스판인 줄 알아. 항상 이겨만 봤으니 패배하는 자들의 좌절도 모르고, 없는 자들이 겪는 곤경도 몰라. 콧대만 높아지고 있지. 그런 주제에 우리로부터는 황제를 칭해도 무방할 정도의 권세를 물려받겠지. 그 아이를 나무랄 생각은 없어. 나는 그 나이 때 훨씬 철이 없었거든. 궁궐에서만 나고 자라면 당연한 일이야. 세상과 맞닿을 기회를 줘야해. 상상해보게. 자신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으며 태생적으로 남들보다 존귀하니 무엇이든 할 정당성이 있다고 믿는 권력자의 탄생을. 난 오금부터 저리는군.”

레니에는 슬슬 기사왕이 무엇을 걱정하는 지 눈치 챘다. 지금 그는 지금 아들뿐만이 아닌 왕조 전체의 존망을 걱정하고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그런 왕조가 세상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고 있었다. 확실히 시각이 남다른 자였다.

“그래서 권력을 좀 분산해볼까 하네. 그렇게 해서 왕실 소속이 아닌 이들에게도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야. 그러면 이 왕국을 자신들의 나라라고 여길 수 있는 여지가 생길거고, 내 후계자들이 권력에 취해 폭주하는 상황도 경고해줄 수 있겠지. 그 일에 자네 구상이 필요할 것 같네. 초안을 좀 마련해볼 수 있겠나?”

긴 말을 마친 아르투르는 레니에에게 악수를 청했다.

“날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자손들이 살아갈 터전을 위해서일세.”

늙은 군인은 무릎을 꿇으며 평생 뱉어본 적 없는 단어를 말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저의 주군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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