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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20화 (220/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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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개월 후, 한 여름의 피오렌치아.

“좋은 날인데 웃으셔야지요. 폐하. 지금은 백성들이 보고 있답니다.”

“아까부터 노력은 하고 있는데 잘 안되는구려.”

기나긴 왕실 행렬의 선두에 국왕 부부가 각각 백마를 타고 행진 중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오랜만의 공식행사였기에 최대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샤를로트 왕비는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어 젊은 시절의 미모는 빛을 많이 잃었지만 고고한 기품은 더욱 깊어져서 백성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래도 노력해보세요. 요즘 국왕 부부의 사이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거든요. 그러니 지금이라도 친한 척 해야죠.”

대답하는 아르투르의 목소리는 시큰둥했다.

“선술집의 취객들이 왕실에 대해 자기의 상상을 떠들어댄들 그게 무슨 상관이오. 우린 언제나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왕국의 부모가 아니겠소.”

“언제나 작은 불씨에서 큰 불꽃이 타오르는 일이니까요.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르투르.

“으. 반 년 만에 만나는 자리에서 꼭 그런 숨 막히는 소리부터 해야겠소? 처음에 당신이 사람들의 소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이해를 했소. 왕국이 불안정한 시기였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왕국은 안정되었고, 왕실의 아이만 넷이고 모두 훌륭하게 자라주었으니 후계 구도도 안정된 거요. 이젠 여론이 뭐라고 하건 좀 쉽시다. 그런 가십거리가 위협이 되기엔 우리 지위는 너무 굳건하오.”

왕비는 왕이 더 이상 듣지 않을 걸 알았기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는 아르투르가 안이하다고 느꼈다. 샤를로트는 타고난 정치가였다. 어려서부터 사람의 심리를 읽고 그들에게 맞춰주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특히 왕비로서 보낸 15년의 세월은 남다른 감각을 발전시켜주었다. 권력의 정점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위로 올라가며 바둥대던 시절에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정점의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야심가들은 도전하기에 너무 강한 자들이 버티고 있다해서 뜻을 꺾지 않았다. 그저 비수를 품은 채 그림자 속에서 인내했다.

도전자들은 권력자들이 오랜 평화에 나른해지기를, 늙고 약해져서 버틸 수 없는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권력의 꼭대기에서 물러날 곳은 따위는 없다. 왕좌는 곧 자신이 묻힐 무덤이었다.

왕실 행렬은 피오렌치아의 거대한 백색 다리를 건너 도시 너머로 향했다.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통치가 시작된 이래 피오렌치아는 믿기지 않는 발전을 거듭했으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도시로 거듭나 왕국의 심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왕비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아버지. 결국 도시를 구해낸 건 접니다. 아버지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전부 실패했지만 저는 성공했다고요.’

피오렌치아 시민들은 옛 공화국 체제 따위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옛 공화국 정부는 무질서하고 규율이 없는 시대에 불과했다고 격하되었으며 이제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왕가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왕비가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있던 사이, 그들은 마침내 도시의 교외에 위치한 대성당에 도착했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길 오른편에는 스티리아 왕국의 흑기사들이, 왼편에는 레무리아 왕국의 백기사들이 들어서서 일행을 환영했다.

“대왕 폐하 부부께 충성을!”

양측의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높이 치켜들며 함성을 질렀다. 대성당의 입구에는 교황청의 종교 기사들도 있었다.

“교황 성하께서도 오셨군? 이곳까지 오는 길도 쉽지 않으셨을 텐데.”

아르투르는 에쿠잘루스에서 단숨에 뛰어내리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샤를로트는 안장을 밟고 차례로 조심스레 내려와서는 부채를 폈다. 왕비의 뒤로 시녀들이 따라붙어 드레스가 땅에 너무 끌리지 않도록 받쳐주었다.

“천국으로 가시기 전에 조금이라도 교회의 존재감을 보이고 싶으신가 보지.”

“저런. 무리해서 오시면 천국으로 가시는 날이 빨라지실 텐데.”

아르투르의 빈정거림에 샤를로트는 간만에 피식 웃었다. 조금은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장난기가 차올랐다.

“이렇게라도 해야 우리 아이들이 교황청이 있긴 하다는 걸 배우겠지. 수명을 깎아서라도 오는 저 의지는 존중할 만 해.”

“당신도 그런 말을 할 때가 있다니.”

왕비는 아르투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대성당 안으로 걸어갔다.

“당신이랑 팔짱 껴보는 건 오랜만이네. 당신이 처음으로 내게 데이트 신청 했을 때 기억해?”

샤를로트는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미소 지었다. 아르투르도 무언가 떠오른 듯 피식 웃었다.

“하이에버에서의 일은 모두 기억하고 있어. 모든 게 그곳에서 시작되었거든. 가장 의기가 넘치던 때였지.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였어. 진정으로 자유롭던 시절이었지. 낙은 적은데 의무만 가득하네.”

아르투르의 자조적인 말에 샤를로트는 싸늘할 정도로 맑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그렇죠. 폐하가 정부들과 놀러다니고 사냥에 몰두하시는 동안 저는 혼자서 밤을 새서 서류를 검토했지만 폐하께선 의무가 막중해서 지금의 삶을 후회하시죠. 소신은 괜찮습니다. 그런 게 왕비의 일이니까요.”

아르투르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거리를 떠올리는데 몰두했다.

“그. 그게 말이지. 나도 그러려고 그런 게 아니라…….”

“됐어요. 당신이 정무를 내팽개치는 동안 내가 궁중을 장악했으니 나한텐 남는 장사였다고. 요즘 애들 말로 이런 걸 개이득이라고 하더라.”

두 사람은 어이가 없어서 킥킥 웃었다. 대성당에 늘어선 하객들은 그 광경을 보고 국왕 부부의 금술이 좋다고 착각했다.

“우리 참 재밌는 관계야. 안 그래?”

샤를로트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는 바야. 하지만 진심으로 말하건데 남아 있어줘서 고마워. 난 테라일이 태어났을 때 걱정을 좀 했어. 당신이 무기만 챙겨서 홀연히 떠나버릴 줄 알았거든. 지난 시간동안 당신이 얼마나 답답해했는지 알아. 맨날 일하라고 구박해서 미안하기도 하고. 기사왕의 치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평화를 누렸지만 당신에게는 맞지 않던 옷인 것 같아.”

아르투르는 이젠 소리를 내어 웃었다.

“하하하하. 그랬다간 내가 세운 왕국을 당신이 홀랑 차지했을 텐데, 그건 배 아파서 못 보지. 돈이나 잘 쳐주면 모를까. 하여간 답답해. 다들 이렇게 똑같은 삶만 반복하면서 현실에 찌들어가는 게 재밌나? 솔직히 난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두 사람은 점차 대성당의 중심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레오폴트 부부와 두 쌍의 어린 신랑 신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오래 지켜봤으니 확실하게 말해줄 게. 당신은 여전히 그대로야. 옳다고 믿는 바가 있으면 얼마나 어려운 일이 있건 강행하겠지. 자기중심적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겠지만 그것도 무시할 거야. 기사란 스스로 믿는 바에 굽힘이 없는 자니까. 그렇지 않아?”

아르투르는 무거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과연 그게 옳은 길이었을까. 그런 의문이 드는 거야. 요즘따라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명예를 따르겠다며 벌인 싸움들로 인해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은 게 아닐까. 억울한 수십만의 원혼이 자식들을 저주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네.”

“나이 들었구나. 아르투르.”

왕의 생각에도 그랬다. 과거에 누가 자신에게 이런 이야길 했으면 주먹이나 한 대 날려줬을 것이다. 옳은 일을 하는 데 의문이 뭐가 필요하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세상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하지만 말이야. 당신은 내 영원한 영웅이야. 아르투르. 아내여서 하는 말이 아니야.”

샤를로트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아르루트의 녹색 눈동자를 바라봤다. 한때 패기가 가득 넘치던 눈동자는 연약해진 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이 인생의 동지에게 와 닿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당신은 피와 불꽃만이 가득하던 땅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어. 나는 내 가문을 몰살시킨 자들의 손에 길러지며 수많은 권력자들을 봤어. 아르투르. 미치광이 폭군과 정신 나간 독재자들의 횡포 속에 셀 수 없는 사람들이 절망을 맛봤지. 내 꿈은 그들을 구원하는 거였어. 하지만 내게 그럴 힘이 없었기에 당신을 만나기 전까진 정해진 운명을 체념하는 삶을 살아왔을 뿐이야.”

아르투르는 이제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귀담아들었고 샤를로트는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데 당신이 모든 걸 바꿔둔 거라고. 빈 말로도 완벽한 통치는 아니었지. 하지만 당신은 권력을 남용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왔고 조금이라도 나은 선택을 하고자 고민해왔어. 내게 그 길에 함께 갈 수 있던 건 삶의 보람이었고 영광이었지. 나 뿐만이 아니야. 작년도 인구조사로는 마침내 왕국의 인구가 3천 만을 넘었어. 이 모든 사람들이 당신에게 평화를 빚진거야. 당신은 보람을 느낄 자격이 있어.”

믿기지 않는 숫자였다.

“3천만이라.”

기사왕은 발걸음을 멈춰서서 왕비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이해관계의 차이로 대립하며 서로에게 고성을 지른 일이 제법 있었다. 도시 귀족 출신인 샤를로트는 예의를 차린다고 항상 우회적인 말을 선호했으며 모호한 태도를 보이다가 나중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하는 경우도 흔했다. 반면 아르투르는 늘 당당하고 겉과 속이 같았으며 일단 정하면 무조건 밀어붙이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상대에게 져줄 생각이 없던 지라 결혼 생활은 첫 일 년 만에 파탄이 났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지금까지 함께 해온 이유는 사생활 따위는 자신들의 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공유된 이상 덕분이었다. 그들은 누구나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아르투르는 인구의 안정과 경제의 번영이 뜻하는 바를 이해했다. 마침내 성과를 손에 쥔 것이다.

“샤를로트. 역시 당신은 최고의 왕비야.”

“아르투르. 당신도 정말 훌륭한 왕이지.”

두 사람은 피식 웃고는 도로 팔짱을 끼고 신랑 신부들을 향해 걸어갔다. 두 사람은 일부러 남편이나 아내라는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다! 괜히 좋은 분위기를 깰 필요가 없지 않을까?!

엘라카르시스 왕조가 창건된 지 15년 째 되는 해에 중대한 혼인이 있었다. 레무리아 왕국의 왕세자 테라일은 스티리아의 맏이 공주인 레오노르와 혼인 서약을 했다. 옆자리에선 스티리아의 왕세자 프란츠와 레무리아 왕국의 맏이 공주인 샤를로트 2세의 혼인 서약이 이루어졌다. 어린 신랑신부들이 입맞춤을 한 뒤 신방에 넣어졌다.

이제 두 왕가는 강력한 연합으로 거듭났다. 양측 가문에 각자의 피가 흐르게 될 터이니 한 쪽이 단절되면 계승권이 이어질 터였고 따라서 어떤 세력도 그들에게 대항하기 어려웠다. 패왕 레오폴트는 군대를 감축하고 폭압적인 통치를 포기하는 대가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었다. 스티리아의 백성들은 기사왕의 평화가 그들을 구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제 그들은 매주 교회에 갈 때마다 기사왕의 평안을 빌었다. 프란츠 왕세자와 함께 찾아온 샤를로트 2세가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건 물론이었다.

가장 강력한 두 왕조의 결합에 각 국 군주들은 축하 사절을 보내며 전전긍긍했다. 아르투르는 모든 군주의 사절들에게 노예제의 폐지를 요구했으며 이를 거부하는 자가 있다면 자신의 적이 되리라고 선포했다. 그들은 앞 다투어 노예의 쇠사슬을 풀어주었으며 핍박 받던 자들은 기사왕의 명예를 칭송했다.

“아르투르 왕의 치세가 영원하기를!”

이제 기사왕의 명성은 대양을 건너 동방 대막으로, 열사의 사막을 넘어 오아시스들로, 황무지를 넘은 초원 지역까지 전해졌다. 엘라카르시스 왕조의 영향력은 모든 문명지에 와 닿았다. 모두가 이런 완벽한 평화가 계속 되기를 그들의 신에게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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