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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9화 (219/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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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퍼드 가문의 케이는 아르투르의 오른팔로서 남다른 신임을 받았다. 백작은 왕의 신임을 받을만한 덕목과 능력을 두루 갖추고 있었으나 아르투르가 케이를 그의 부하 중 제일로 꼽는 이유는 균형 감각 때문이었다. 아르투르는 통치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중대사를 처리하는데 중요한 일은 중용에 가깝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통치의 기반이 되는 가장 중요한 가치만큼은 반드시 수호해야 했으나 반대로 충분히 타협할 수 있는 일에 융통성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도 중요했다.

즉, 왕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지켜야만 하는 가치와 타협할 수 있는 안건을 구분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백작은 현명함을 갖추고 있는 드문 사람이었다.

“즉, 네 말을 정리하자면 레오폴트를 우리 왕국의 조건에 합류시키는 게 가장 중요하단 뜻이군.”

“정확하십니다. 강경책이나 온건책으로 접근할 게 아닙니다. 폐하께서 확립하신 평화가 유지되려면 국경선 너머의 위협이 현명하게 관리되어야 합니다. 레오폴트 왕은 공포의 제왕으로서 동방에 알려져 있지만 지지 기반은 생각보다 취약합니다. 불필요할 정도로 엄격하게 왕국을 다스리는 건 오히려 그 때문이지요. 약하게 보여지는 순간, 원한을 가진 사람들이 칼날을 들이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르투르는 곰곰이 사촌의 행보를 되돌아보았다. 자신이 에쿠잘루스를 쉬게 하고 레무리아를 번영하게 만드는 동안 그는 기사들을 데리고 쉬지 않고 동쪽으로 질주해갔다. 그는 싸울 때마다 이겼으며 자신에게 반항한 자들을 결코 살려두지 않았다. 서부 대륙에서 평화 조약이 체결된 지 십년이 지나기 전, 검은 갑옷을 입은 흑색의 패왕과 철저한 복종을 내세우는 공포의 군단에 대한 소문이 동방 전역으로 퍼졌다. 세 개의 왕국이 파괴되었고 수많은 부족들이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것까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대체 왜 레오폴트가 이렇게 호전적인 결정을 한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 그렇게 거대한 영토를 정복했으면 이제 만족하고 칼을 내려놓을 때도 되지 않았나?”

케이 백작은 고개를 가로 저었다.

“더 이상 레오폴트 왕은 멈출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그가 여느 정복자들보다 큰 영토를 단숨에 정복한 비결은 그의 군단 육성에 있습니다. 패왕은 유능한 병사의 자질이 보이는 자라면 군대로 징집해갔으며 한번 입대한 자들은 인간 같지 않은 생활을 강요받습니다. 왕의 명령에 복종하는 노예가 되게 만드는 거지요. 죽음이 아니면 제대할 방법도 없으며 적에 대한 연민이나 불복종을 드러내는 자는 곧 바로 죽음으로 처벌 받습니다.”

아르투르는 다음에 이어질 설명을 어렵지 않게 유추해냈다. 아무리 공포의 제왕으로 이름이 높다한들 저런 비인간적인 생활을 강제로 지속시키려면 아주 많은 보상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복 당시에 학살을 일삼은 나머지 원한을 품은 자들이 가득한 마당에 군대를 줄일 수도 없으니 결국 레오폴트는 제국 전체를 쥐어짰을 것이다. 굶주린 자신의 군대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게 해마다 수만 명의 난민이 우리 영토로 몰려드는 이유였군. 레오폴트. 어쩌다가 거기까지 간 거냐.”

아르투르는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지난 시간동안 레오폴트와는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지만 깊은 대화를 해본 건 십년 전, 숙부의 장례식장이 마지막이었다. 자신이 변해갔듯이 그도 변한 것이리라. 그럴만한 이유들은 있겠지만 어쨌든 레오폴트는 이제는 동부 대륙의 재앙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겠나? 억눌린 자들을 해방시켜 그의 제국을 무너뜨리면 될까?”

케이는 고개를 단호히 가로 저었다.

“아뇨. 지금 레오폴트의 제국을 바로 무너뜨리는 건 불의와의 타협보다도 나쁜 결과를 불러올 겁니다. 그는 동부에 존재하던 기성 강자들의 뿌리를 뽑아버렸기에 지금 레오폴트의 질서를 대체할 수 있는 세력이 없습니다. 만약 그의 권위가 지금 무너진다면 동부는 완전한 무질서 상태에 빠져 모든 게 초토화 될 겁니다. 그러한 결과는 폐하의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으며 국익에는 치명적입니다.”

아르투르는 조금 아쉬운 눈빛으로 케이를 바라봤다.

“흠. 그렇다면 너 역시 우위를 인정받는 선에서 레오폴트를 풀어주고 관대한 동맹을 맺어 우호 관계를 한층 굳건히 가져가자는 왕세자와 왕비의 의견에 동의한다고 보아도 되겠나? 당장은 불의하더라도 다른 길이 없다고?”

케이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부분적으론 그렇습니다. 이미 패전으로 인해 권위가 떨어져버린 레오폴트 왕에게 영토 할양이나 감당할 수 없는 전쟁 배상금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레오폴트 왕은 풀어주시고 몇 년째 논의만 맴돌고 있는 양국 간의 국혼을 추진하시죠. 때마침 양측 왕가의 후계자들이 혼인 적령기에 이르기도 했으니까요. 그것으로 레오폴트 왕이 패전으로 잃은 권위는 복구되겠지요.”

“레오폴트가 내 사촌이니까 그냥 풀어주고 아무것도 없던 일로 한 다음 옛날로 돌아가자고? 그럼 또 다시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이겠지. 아니면 다른 영토를 침공해서 경제적 손실을 매꾸려 들거고. 네 제안치고는 엉성하다. 케이.”

아르투르는 노골적으로 실망스런 목소리를 냈지만 케이는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다.

“대신 레오폴트 왕에게 ‘가족의 일원이자 친구로서’ 내정 개혁에 대한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십시오. 특히 노예제의 전면 철폐는 대왕 폐하의 치세를 상징하는 이슈가 되었으니 반드시 요구하십시오. 레오폴트 왕은 폐하에게 엄청난 정치적 빚을 지게 될 상황이니 거절하지 못할 겁니다. 물론 그런 급진적인 조치가 강행되면 저희 왕국이 겪었던 것 같은 경제적 혼란이 스티리아 왕국을 덮치겠지요. 하지만 저희 왕국은 돈과 물자가 흘러넘치고 있으니 우방국을 다시 한 번 ‘호의로서’ 지원해 줄 수 있겠지요. 이상이 제가 드리는 제안입니다.”

아르투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정치적인 셈법을 따져봤다. 내정 개혁은 레오폴트의 이름으로 발표되겠지만, 스티리아 신민들은 갑자기 폭군이 마음을 바꾸었다고 믿기보다는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해주었다고 생각할 터이다. 그 때 자신의 이름으로 구호품이 전달되며 공주가 스티리아 궁정으로 시집을 가면 마음의 충성이 어디로 향할 지는 뻔한 일이었다.

‘레오폴트의 제국을 통째로 합병하기엔 국력이 모자라고 일부만 합병해서 레오폴트를 적으로 돌리기엔 여전히 위험한 상대야.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아르투르는 마음 속 한구석이 찝찝했다. 아마 잘 따져보면 논리적인 불일치가 있을 까닭이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일단 감수하기로 했다. 자신은 이제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수천만의 백성은 물론 대륙의 운명을 책임 져야했다. 나의 행동이 정당하니 반드시 이뤄질 것이라고 믿으며 돌격하던 젊은 시절과는 달라야했다. 아르투르는 어리석은 통치자들이 몰고 온 불행들을 너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을 추구하되 실현 가능한 범위 내에서 만족하는 것.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 해야 할 일이었다. 더 원대한 이상, 이루지 못한 정의는 후세가 이어가길 기대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들에게 온전한 세상을 물려주는 일도 자신의 의무였다.

***

아르투르가 자신의 결정을 내리자 정국의 방향을 둔 불협화음은 깔끔히 사라졌다. 그동안 기사왕이 내보인 행보에 모든 측근들이 동의했다. 혹여나 일이 잘못 되더라도 피치 못해 벌어진 일이지, 게으름이나 불의 때문에 벌어진 일은 아니며 아르투르가 바로 잡으리라 믿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왕세자님이 바라시던 대로 됐습니다. 만족하십니까?”

케이와 테라일은 두 왕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보며 말했다. 그들은 조약문에 공식적인 서명을 했고 약속의 이행을 맹세했다. 레오폴트는 패도를 쫓는 자였으나 약속을 어긴 적은 없기에 그의 말에는 권위가 있다고 여겨졌다.

“굉장히 만족스럽습니다. 이번에 저를 도와주신 일은 빚으로 달아두십시오. 도움이 필요하신 때가 오면 저도 돕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묻고 싶군요. 백작께선 레오폴트 숙부님에게 강경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믿으셨지요. 그런데 제 말을 대신 전해주신 이유가 뭡니까?”

케이는 복잡미묘하던 감정을 가다듬고 차분히 말했다.

“저는 레오폴트 왕께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의 측근은 제 오랜 친구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번 결정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마스터의 친척이라거나 정략적 관점이란 이유로 폭군을 계속 왕좌에 올려 두는 일은 저희가 추구해온 대의와는 맞지 않거든요. 실망하는 사람도 제법 있을 겁니다. 특히 카밀 아저씨 같은 분은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겠지요. 현실과 타협을 한 도덕적 타락으로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테라일은 케이에게 궁금증 어린 시선을 보냈다.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 의견을 스스로의 입을 통해 전달해준 이유가 있을 터이다.

“그렇지만 말입니다. 제게 가장 중요한 일은 폐하의 궁정이 심각할 정도의 긴장감이 없이 돌아갈 수 있게 만드는 겁니다. 이번엔 제가 묻겠습니다. 전하. 만약 폐하께서 레오폴트 왕의 제국을 무너뜨린다고 결정하셨다고 전하께서 그걸 순순히 받아들이셨겠습니까?”

왕세자는 무거운 표정으로 침묵을 지켰고 케이는 빙긋 웃었다.

“전하께선 순종을 할 만한 분이 아니시지요. 저야 양치기 출신이라 정치는 잘 모르지만, 전하의 마음속에 저 같은 양치기가 상상하기 힘든 웅대한 그림이 있으시단 걸 압니다. 그걸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실 분이란 것도요. 그런데 우리 궁정에는 레오폴트 왕과 이해관계가 엮인 이들이 아주 많지요. 글쎄요. 저나 대왕 폐하가 레오폴트 왕을 궁지로 몰아갔으면 국내에 불온 세력이 형성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왕세자는 그것만은 아니라는 듯 손을 내저으며 소리쳤다

“너무 비약이 심하십니다! 백작. 제가 아버지를 얼마나 존경하는데요.”

“하하하. 과연 비약일까요? 전하께서 마스터를 얼마나 경애하시는지는 압니다. 하지만 전하는 아무리 존경과 사랑을 보내더라도 뜻한 바를 꺾으실 분이 아니지요. 타고나면서부터 왕세자이시던 분이니까요. 마스터와 전하는 지향하는 이상도, 방법론도 다릅니다. 어느 방향이 좋은 일이 될까요? 저는 그것까진 알 능력이 없습니다. 허나 대왕 폐하와 왕세자 전하가 대립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습니다. 차라리 제가 욕을 좀 먹더라도 의견을 접는 게 낫지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하는 일은 궁정이 심각한 사고 없이 돌아가게 만드는 겁니다. 문제가 터질 소지가 있다면 사전에 예방해야하는 거고요.”

두 왕의 회견이 끝나고 양측의 대군이 철수를 시작했다. 테라일 왕세자는 자신이 우려하던 일이 터지지 않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고 한편으로는 미래 구상을 두고 가슴에 들떠 올랐다.

“하지만 전하. 이번에 소신이 의견을 꺾고 전하의 편을 들어드렸음을 기억해주십시오. 대가는 제게 베푸실 필요 없습니다. 언젠가는 전하께서도 궁정의 평화를 위해 의견을 꺾어야하는 날을 맞이하실 겁니다. 그 때는 받아들이기 힘들더라도 승복해주십시오. 오늘 제게 지신 빚을 제가 아닌 왕국을 위한 결단을 내릴 때 갚아주십시오.”

케이는 양이 새겨진 투구를 쓰고 군마에 올라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테라일 왕세자는 재상의 이야기를 가슴 속에 깊이 기억해두었다. 문득 왕세자의 생각을 스친 생각은 아버지에 대한 재평가였다. 만프레드 공작이나 케이 백작 모두 범상치 않은 인물들이었으나 아버지에게만은 절대적인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자신이 아버지를 과소평가한 지도 몰랐다. 전성기가 지난 뱃살 나온 중년의 기사 이상이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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