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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8화 (218/248)

218

전쟁터의 한복판 속. 상반된 색채의 무장을 한 두 기사가 서로를 노려보았다. 각각 백색과 흑색의 갑옷을 입은 기사 군주들은 각각 자신의 애검을 뽑아들었다. 백기사의 성검은 찬란한 황금 빛을, 흑기사의 마검은 불길한 붉은 빛을 내뿜었다. 아르투르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 검은 어디서 주워 온 거냐?”

대수롭지 않게 웃어보이는 레오폴트.

“부러진 걸 다시 만든다고 고생 좀 했지. 너와 동등한 입장에 서려면 유물이 한 자루 정도는 필요해보였거든.”

“나와 싸우게 되는 날을 준비해왔던 거냐.”

“대등한 자리에 서려고 노력한 결과물이지.”

두 기사왕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서로를 향해 마법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까앙 - !

충돌은 두 유물의 상반되는 힘을 극대화시켰다. 금빛 기운과 붉은 기운이 물결치며 서로를 감싸다가 충격파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두 기사의 유물은 사용자들을 보호해주었으나 주변에 있던 병사들은 충격파에 강타당한 후 뿌리가 뽑힌 나무처럼 날아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럼 오늘이 서열 정리를 다시 하는 날이 될 거다!”

“바라던 바다!”

두 왕이 결투를 시작하자 전장은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모두들 왕의 싸움을 지켜보느라 바빴던 탓이었다. 이제 전쟁의 승패는 자신들이 아닌 그들의 왕에게 달려있었다. 백의 왕이건 흑의 왕이건 도무지 일반인들은 끼어들 엄두조차 나지 않는 엄청난 싸움이었지만 몇몇 용맹한 자들은 자신들의 주군을 지원하길 원했다.

“주군!”

하지만 그 때마다 두 유물의 기운이 얽혀 계속 충격파를 발생시켰기에 멀리서 응원하는 게 다른 이들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두 사람은 검을 맞댄 채 한층 힘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이럴거면 결투로 정할 걸 그랬군.”

레오폴트는 마검을 재빨리 거둬들이며 한층 안정적인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니! 이건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니 결투로 정할 수 없다! 핍박받아 도망쳐온 자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일은 이제 우리 모두의 뜻이 되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니 네 뜻을 강요하고 싶다면 우리 모두를 꺾어야만 할 거다. 레오폴트!”

아르투르는 신속하게 파고들면서 매끄러운 공세를 이어갔다. 두 사람의 검술은 문자 그대로 완벽에 달한 상황이었으며 누가 조금의 우위도 없는 완벽히 동등한 실력이었다. 백의 기사와 흑의 기사, 둘 모두의 움직임은 모든 동작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견제와 보호,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이루어지며 굉장히 정제된 싸움이 계속 되었다. 그들은 합을 맞춘 검무를 추듯이 예술적인 싸움을 했다. 문외한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경지의 싸움. 단 하나의 실수가 죽음으로 직결되는 싸움이었지만 그들에겐 모두 여유가 느껴졌다.

“하하하! 도망 간 가축이나 돌려받으러 왔는데 전쟁을 치를 줄은 몰랐네. 나는 네 우리에서 빠져나온 놈들을 제때 돌려주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하지 않는 구나. 너무 신의가 없는 것 아닌가?”

흥미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레오폴트와 달리 아르투르는 시종일관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투구 때문에 서로의 표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두 사람은 동작만 가지고도 상대의 기분을 유추할 수 있었다. 이미 수천 번 합을 맞춰본 싸움이었다. 아르투르는 반전을 만들어내기 위해 육탄전을 걸었다. 아르투르의 육중한 어깨가 레오폴트의 몸에 부딪쳤다.

“네 백성은 사람이다. 납득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해주마!”

하지만 레오폴트는 하체로 버티고 서서 끄떡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아르투르가 육탄공격을 하느라 빈틈이 생긴 틈을 타, 양손에 힘을 가득 실어 내려베었다. 방어가 비는 리스크가 큰 동작이었지만 수 싸움에선 레오폴트가 이겼다. 아르투르는 공격을 계속하는 대신 재빨리 성검을 거둬들여 공격을 받아쳤으며 흐름의 주도권은 다시 레오폴트에게로 넘어갔다.

“아르투르! 내가 세 곳의 왕국을 정복하는 동안 넌 왕궁에 가만히 앉아 지냈을 뿐이야.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살이나 불어 올라선, 행동은 굼떠졌고 칼끝에는 살의가 없다! 평화가 너와 네 군대를 모두 약하게 만든 거다!”

아르투르는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레오폴트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사촌은 중년의 나이임에도 경험을 쌓아 이전보다 더 사납고 맹렬해졌으나 자신의 몸은 무거워졌으며 검술은 피를 흘리는 실전과 멀어졌다. 물론 훈련을 게을리한 적은 없었다. 기사왕으로서 최고의 기량을 유지하는 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무예를 발전시킬 수 있는 자극도, 시간도 없었다.

자신에겐 다스려야 할 왕국과 보살펴야 하는 가정이 있었으며 오랜 평화는 자신의 긴장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싸움을 마지막으로 치루어 본 게 언제였던가. 십 년 전? 십 오년 전?

지루한 삶이었다.

어느새 아르투르의 입가에는 흥분된 미소가 떠올랐다.

“네 말이 맞아. 레오폴트. 내가 평화에 찌들어 약해지는 동안 너는 전쟁 속에서 더 강해졌구나. 하지만 말이야.”

아르투르는 능수능란하게 레오폴트의 공격을 받아쳤다. 처음에는 검로를 읽기도 버거웠지만 이젠 읽어내는 건 물론 정확히 따라가 카운터 칠 수도 있었다.

“평화 속에서 내 왕국은 번영을 누리며 강해졌다. 백성들이 살이 쪘다는 건 좋은 일이지. 반면 네 땅은 어떠냐?”

레오폴트의 불길한 마검이 자신의 검을 쳐내더니 목덜미 근처를 노렸다. 간발의 차이로 피했지만 아주 위험했었다.

“그건 말 할 필요도 없지! 내가 영토가 세 배도 넘고 백성의 수도 두 배는 된다. 게다가 내 창고에는 온갖 왕들의 보물이 있다고.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이젠 내가 세상의 중심이다. 하지만 나는 널 동등하게 대하려고 했다. 네가 거절한 거지.”

아르투르는 과감히 레오폴트의 심장을 노리고 칼날을 내질렀다. 레오폴트는 현란한 발걸음으로 피해내기는 했으나, 땀범벅이 된 아르투르는 흥미를 느끼며 더 속도를 올렸다. 검을 휘두르는 손목의 감각이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실전이란 이런 거였어!

“네 제국은 약탈과 착취로 쌓아올린 곳이야. 기반이 미비하다고. 공포만으로 제국을 다스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진짜 시련이 닥쳐오면 무너져 내릴 거야. 아주 빠르게.”

레오폴트는 피식 웃었다.

“그러지 않은 나라가 있나? 결국 위험을 극복하고 아니고는 군주의 역량에 달린 문제일 뿐이야. 크윽?!”

아르투르는 이제 레오폴트가 따라오기 힘든 속도로 그를 몰아붙이고 있었다. 성검이 온갖 궤도에서 날아들었고 더 이상의 여유는 없었다. 특히 레오폴트는 체력이 이전만 못해 집중력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레오폴트의 몸은 젊은 시절의 원기와 중년의 원숙함을 맞바꾼 상태였다. 갈수록 흑기사는 뒤로 몰려갔고 아르투르는 더욱 치명적인 공세를 이어갔다. 이를 보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아르투르의 장병들!

-기사왕! 기사왕! 기사왕!-

“하! 들리나! 레오폴트! 그들이야말로 나의 자랑이며 내가 싸움을 포기하고 쌓아올린 평화가 만들어낸 기적이다! 네 꼴을 봐라. 어째서 네 군대는 아무도 네 이름을 외치지 않느냐?!”

성검의 빛은 더욱 강렬해졌으나 마검의 빛은 줄어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레오폴트는 한계에 이르렀다. 이제 뚜렷해진 아르투르의 전투 감각은 그를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고 적의 움직임을 훤히 읽어냈다. 레오폴트는 분명히 발전했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단점, 과도한 공격성을 극복하지 못해 검로가 뻔했다.

저런 경로로 막겠군.

레오폴트는 이를 악다물고 마지막 역전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는 중이었다. 덕분에 오히려 아르투르는 여유롭게 자신의 의도대로 그를 몰고 갔다. 적당한 속도로 연격을 가하자 레오폴트는 마검을 전면에 내세워 방어를 시도했으며 아르투르가 정확히 노리던 시점이었다. 온 힘을 다해 마검을 후려치자 마검은 하늘을 높이 날아 몇 미터 떨어진 바닥에 꽂혀버렸다. 레오폴트는 지친 몸을 이끌고 마검을 향해 몸을 던지려했다.

“이익!”

아르투르는 곧장 레오폴트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후 목에 칼날을 겨누었다.

“끝났군.”

레오폴트는 억울함을 가득 담아 말했다

“……괴물보다 더한 놈. 어떻게 아직도 젊었던 시절만큼 힘이 쌘 거냐? 어떻게 되먹은 거야?”

아르투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본다.

“지금 네가 해야 할 말은 그게 아닐 텐데.”

그는 성검을 살짝 앞으로 내밀자 레오폴트는 양손을 들어올렸다.

“항복. 항복이다. 나는 네 포로다. 아르투르.”

결국 흑기사는 한숨을 쉬며 항복했다. 스티리아와 레무리아 간의 전쟁은 개시된 지 한 시간 만에 끝났다.

***

많은 이들이 걱정하던 양국 간의 대규모 전면전은 없었다. 전투도 아르투르 군이 압도적인 기세로 밀어붙여 레오폴트 군을 밀어내다 끝난 양상이라 사상자도 충돌 규모에 비해 적은 편이었다. 양 군은 서로를 신사적으로 대우했고 덕분에 필요 이상으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쌓이는 일은 없었다. 물론 이 전쟁을 어떻게 마무리 할 건지는 신하들 간의 의견이 갈렸지만 말이다.

“논쟁이 될 만한 부분에서만 우리의 조건을 관철시킨 뒤 숙부는 돌려보내지요. 아직 그분의 군사력도 건재하니 분명히 저희의 좋은 동맹이 되어줄 겁니다. 지금이야말로 제가 가져온 원안의 건을 성사시킬 땝니다.”

우선 왕세자를 필두로 한 우호파의 의견이 있었다. 이 방안은 전통적인 고위 귀족들이 지지했다. 전투의 결과가 전해지기 무섭게 왕비도 이런 방향으로 해결할 것을 강력히 제안해왔다.

“이 기회에 영토 양도를 비롯한 확실한 우위를 받아내시지요. 결국 대륙의 일인자는 한 명뿐입니다. 폐하. 더군다나 급히 병력을 소집하느라 저희가 입은 경제적인 손해도 만만치 않으니 그 부분도 보상이 되어야 할 거고요. 다시는 없을, 왕창 털어 드실 수 있는 기회입니다.”

용병공 같은 실용주의적인 의견들도 있었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신흥 세력이었으며 현실 감각을 중요시하는 세력에 속했다.

“이번 싸움으로 수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동맹국은 얼어 죽을. 오히려 신의를 깼으니 강경한 본보기를 보이셔야 한다고 봅니다. 평소에 바른 말 하는 주교들을 내쫓고 동방의 마술사들을 들일 때부터 마땅히 취해야하는 조치였습니다!”

교회 쪽 사람들이 주장하는 강경한 방법도 있었다. 레오폴트가 폭군으로 이름이 높았기에 적지 않은 사람, 특히 평민들이 이런 의견을 지지했다. 입이 달린 자라면 어떤 조건을 요구할 건지를 두고 저마다 의견을 내놓았다. 아르투르는 은근히 사람들의 반응을 살피다 여태 아무런 의견도 내놓지 않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기사왕은 그를 따로 불러냈다.

“네 의견은 어떠냐? 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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