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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7화 (21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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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무리아 왕국군의 진영 한 가운데 속. 풍채와 생김새가 비슷한 두 기사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나이가 중년과 소년으로 한 세대 차이가 났고 머리 색깔이 각각 금발과 갈색으로 다르긴 했으나 풍채나 전반적인 생김새는 비슷한 편이었다. 아버지는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아들은 숱한 소녀들을 울리고 다닐 미남형의 얼굴이란 큰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버지. 제가 숙부와 담판을 지어왔습니다. 동의만 해주시면 이번 위기는 끝이에요.”

미소 짓고 있는 아들과 다르게 아버지는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네가 말한 방법으로 해결 할 거면 진즉에 해결했지. 내줘선 안 되는 걸 내줬잖느냐!”

“아버지. 제 생각에는 모든 걸 가질 수 없다면 그나마 나은 걸 택하는 것이 옳습니다.”

아르투르는 표정을 찌푸리며 왕세자를 바라봤다.

“네 정치적 수완은 인정한다. 테라일. 나와는 다르지만 네가 훌륭한 왕의 자질이 있다는 것도 알아. 하지만 그런 식으로 타협하고 또 타협해선 어떤 중대한 일도 이룰 수가 없다.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되는 가치가 있는 거라고. 폭정을 피해 도망쳐온 불쌍한 자들을 죽으라고 돌려보내면서 우리 왕조가 엘라카르시스 여신의 뜻을 받든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건 왕조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일이야.”

기사왕은 테라일 왕세자와 눈을 마주치며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거세게 찔렀다.

“네 양심의 소리를 들어라! 테라일! 네 아비는 대관식 날의 신성한 맹세를 기억한다. 신의 뜻을 대신하여 이 땅을 통치하겠노라고! 불의를 이 땅에서 일소하겠노라고 맹세했다! 정의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할 수 있는 근거다! 우리도 일개 도적 우두머리와 다를 바 없다. 그걸 잊어선 안 돼!”

테라일 왕세자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자기 이름의 유래를 알고 있었다. 자신이 태어나던 해에 대륙의 질서를 두고 거대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로 대륙의 중심은 루이스 대왕에서 아버지에게로 이동했지만, 아버지는 자신이 쓰러뜨린 스승을 기리고자 자신에게 같은 이름을 붙였다. 그 고집스런 기사가 가졌던 명예를 아버지가 물려받았으니, 자신도 그런 명예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을 터. 하지만…….

‘테라일 드 바야르는 기사로서는 대단한 자였다. 그러나 군왕이 배워야 인물이라기엔 현실 감각이 너무 부족한 자였어. 아버지도 같은 실수를 하고 계신다고. 어떻게 설득을 하면 좋을까?’

“지금 숙부와 전쟁을 벌이시면 수십만은 우습게 죽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 영토로 도망쳐온 탈주한 농노들은 다 합쳐도 수만 명에 불과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도덕적인 일 아니겠습니까?”

아르투르는 이젠 흥분해서 소리치고 있었다.

“테라일! 너는 명예로운 이름을 물려받았다! 비겁자처럼 말하지 마라! 나는 너를 그렇게 키운 적이 없다!”

테라일은 스스로가 자기가 알아서 컸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엄밀히 따지면 어머님과 보낸 시간이 더 길었다. 하지만 아르투르는 아주 흥분해서 레오폴트의 군영을 바라보며 침을 튀기며 소리친다.

“하. 백성들이 자꾸 우리 땅으로 도망쳐오는데 인도해주지 않아서 따지러 왔다고? 레오폴트가 지금 자기 나라를 어떤 꼴로 만들었는지 되돌이켜 봐야 할거다! 수확량의 칠 할은 세금이요, 한번 징집되면 죽어서 돌아와야 하고, 군대가 민가에 횡포를 부려도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게 무슨 놈의 나라란 말이냐. 백성들이 도망을 치면 통치를 똑바로 할 생각을 해야지. 왜 살 길을 찾아 떠난 백성들을 죄인이라고 부른 단 말이냐? 난 결코 그딴 헛소리와 타협하지 않겠다!”

왕세자도 지금만큼은 물러나지 않았다. 대륙을 피의 소용돌이로 몰고 갈 전쟁이 눈앞에 있었다. 결코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 각 나라의 법은 주권자인 국왕이 결정할 문제입니다. 우리가 레오폴트 숙부의 통치에 간섭할 근거는 없어요. 숙부께서 저희 영토에서 도망친 죄인들을 항상 송환해주셨는데, 저희가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분명 큰 잘못입니다. 농노가 장원을 버리고 달아나는 건 우리 왕조에선 합법이지만 저쪽에서는 아닌 거죠. 지금 하시는 행동은 타 국왕의 주권에 대한 침해 사례로 남을 겁니다.”

아르투르는 왕세자의 말을 듣고 생각에 빠졌다. 자신이 지금 레오폴트의 왕권을 침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랬다. 그것이 잘못된 일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약자들을 지키고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건 옳은 일인가? 아르투르는 자신이 겪은 숱한 전쟁을 떠올렸다. 되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었다. 그럴 가치가 있는가? 그는 성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려보았다. 오래간만에 의지에 응한 빛나는 에너지가 모여들었다.

“아들아. 내가 왕이 되고 첫 번째로 선포한 법령이 무엇인지 기억하느냐?”

테라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젠장. 이건 못 말려.

“보편적 정의에 어긋나는 모든 법과 권리는 무효다. 라고 선포하셨죠…….”

아르투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권도 다를 바 없다. 왕도 신과 정의 앞에선 한낱 인간일 뿐. 아들아. 네 치세에는 네가 옳다고 믿는 바를 해라. 하지만 지금은 나의 시대고, 나에게 권한이 있다. 내 통치의 가장 큰 근간은 언제나 명예였다! 케이, 전군에게 알려라! 모두 전투 대형으로!”

초조한 표정으로 결정을 기다리던 케이 백작은 대기하던 제장들에게 소리쳤다.

“폐하의 명이 떨어졌다! 전군! 전투 대형으로!”

“전투 대형으로!”

아르투르는 지난 통치 기간 평화를 지킬 수 있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레무리아 왕국군은 두터운 장교단과 규율 있는 병사들을 갖춘 훌륭한 군대로 거듭났으며, 기사왕의 외침은 명령 체계에 따라 신속히 전해졌다. 한번 왕의 명령이 떨어지자, 장병들의 마음속을 감싸던 두려움의 안개가 순식간에 걷혔다. 기사왕은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렸으며 영광스런 승리로 그들을 이끌었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으리라!

“국왕 폐하 만세!”

“국왕 폐하 만세!”

대열 곳곳에서 자발적인 호응이 터져 나왔다. 국왕에 대한 병사들의 경애는 이제는 거스를 수 없는 파도가 되어 전군을 휩쓸었다. 기세를 탄 레무리아 군대는 아주 빠르게 움직여서 순식간에 배치를 끝냈다. 반대편에는 아르투르 군을 상회하는 숫자의 레오폴트의 기병들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들은 레무리아 군대의 함성에 압도당했다.

“기사왕 아르투르! 기사왕 아르투르!”

레오폴트의 군대는 모두가 그들의 왕을 두려워하여 철통같은 규율을 자랑했지만 열광적인 지지란 찾아볼 수 없이, 그저 왕의 말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침 안개가 걷혀오며 양군의 양상이 서로에게 노출되었다. 이제 누군가 국경을 넘기만 하면 싸움은 걷잡을 수 없는 대전투로 이어질 터였다. 테라일 왕세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우익에 위치한 케이 백작을 찾아갔다.

“재상! 이건 미친 짓입니다. 당장 아버지를 말려야 해요.”

젊은 영주는 고개를 돌려 왕세자를 바라보았다.

“후방에서 전하의 아버지가 얼마나 위대한 분이신지 구경이나 하시면 됩니다. 승리는 저희 것이 될 겁니다.”

“지금 승패가 중요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고작 탈주한 노예들 때문에 최대 동맹국과 전쟁을 벌이겠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겨도 손해가 이만 저만이 아닐 겁니다! 양국의 불화를 바라는 다른 군주들이 웃고 있을 거라고요!”

“흠. 생각을 좀 해보죠.”

케이는 들떠 있던 마음을 가라앉히고 턱을 매만졌다. 길게 생각 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손익은 명확했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제게 나라의 중신으로서 조언을 구하셨다면 이딴 미친 짓은 그만 두라고 했을 겁니다. 도망자들을 레오폴트 왕에게 넘겨주고 끝내라고 조언했겠지요.”

테라일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즉에 깨달으셨어야죠!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당장 후퇴 명령을 내리십시오! 그 뒤에는 제가 상황을 수습하겠습니다.”

“전하의 말씀은 맞지만 그른 일입니다. 반면 폐하의 말씀은 틀렸지만 옳은 일이지요. 만약 폐하가 제게 친구로서 조언을 구하셨다면 개전 결정을 전적으로 지지했을 겁니다.”

테라일은 입을 떡 벌렸다. 상식인인줄 알았던 케이 백작도 알고 보니 미친 자였다! 도대체가 제정신인가? 탈주 농노들을 위해 우방국과 전쟁을 벌이자니?

케이는 그런 왕세자의 생각을 읽은 듯 미소를 지었다.

“폐하는 전하의 생각보다 훨씬 터무니없는 분입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범인과는 생각하는 게 다르시지요. 저희 는 그런 분을 믿고 이곳까지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기사왕께선 그런 분이지요. 사람들에게 헛된 망상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주시는 분. 모두가 눈앞에 놓인 현실에서 절망할 때 그걸 능가할 용기를 주시는 분 말입니다. 전하께서 이어가실 기사왕의 유산이란 그런 겁니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만 생각해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것이지요.”

케이는 아르투르가 보여주었던 꿈을 회상했다. 그 분은 농노를 위해 대가문들과 싸움을 벌이셨으며 혼란이 가득하던 땅에 질서를 가져오셨다. 적들을 죽이지 않고도 무릎 꿇렸다. 이제는 왕의 책무라는 이름하에 현실에 짓눌리는 대신 왕의 책무라는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려고 하고 있었다.

“솔직히 털어놓지요. 기사왕께서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을 추구했던 광대로 남으실지도 모릅니다. 지금 하시는 일도 풍차를 향해 돌격하는 정신 나간 기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예를 해방한다 한들 다른 착취가 남을 것이며, 진정으로 농노와 귀족이 같은 권리를 지닐 날이 오겠습니까. 저는 회의적입니다. 남들에게 비웃음이나 살 짓을 고생하면서 하느니 차라리 대충 타협하고 배나 두드리며 사는 게 좋을 지도요.”

하지만 케이의 말에선 굉장한 환희가 느껴졌으며 제후부터 말단 병사에 모든 이들이 들뜬 마음에 가득 차 있었다. 왕세자는 지금, 그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열기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들은 꿈을 꾸고 있었다.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불가능한 꿈이 이뤄질 수 있으리라 믿으며 전진하고 있었다. 기사왕은 그런 열망을 이끄는 상징이자 그들의 인도자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저는 마스터와 함께 하고 싶습니다. 그분이 마지막에 저희를 인도하실 세상이 너무나 궁금하거든요. 전하께서도 직접 보고 판단하시지요. 과연 저희의 꿈에 전하의 삶을 거실 가치가 있는 지 말입니다.”

말을 마친 케이는 고개를 돌려 적진을 바라보았다. 레오폴트 왕의 궁기병들이 좌우로 산개하며 국경선을 넘었다. 아르투르는 직접 돌격 나팔을 불고 늙은 백마와 함께 벌판을 지나 돌격했다. 케이는 환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아르투르 왕에게 영광이 있으라!”

케이를 시작으로 모든 병사들은 미친 사람처럼 웃으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세례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찬란한 빛이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다. 아르투르와 기사들은 단숨에 적진을 두동강 내어버렸고 뒤따라온 보병대는 단일한 의지가 되어 적진을 강타했다. 레오폴트의 기병대는 제대로 산개해보지도 못한 채 난타 당했다.

왕세자는 굉장히 높아보이던 벽이 단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을 느꼈다. 금화 백만 닢을 주어도 이런 충성은 얻을 수 없으리라. 십만의 군대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달려드는 장관은 결코 자신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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