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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6화 (21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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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무리아 왕국의 동부 국경엔 끝없는 초원이 펼쳐져있었다. 이웃한 스티리아 왕국과의 통행을 가로 막는 방해물은 벨파스 강 하나에 불과했으며 또한 양측의 국경이기도 했다. 양국의 군주들이 절친한 사이이자 동맹이었기에 서로는 이곳에 군대를 거의 주둔시키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몇년사이 악화된 긴장 끝에 국경 요새가 건설되었다.

용병공 만프레드는 망원경을 통해 강 너머에서 순찰을 도는 수많은 기병들을 볼 수 있었다. 저 정도 위세면 세계 최강의 기병대이리라. 아르투르가 직접 이끄는 레무리아의 정예군 정도를 제외하면 누구도 대적할 수 없어보였다. 레오폴트 왕이 본격적인 공세를 가하면 오래 버티지 못할 터이다. 어떻게든 살아남을 길을 찾아야 했다.

만프레드는 평생을 용병으로 살아온 자였다. 중년의 공작이 된 지금도 다를 바 없었다. 세간 사람들은 용병공이란 칭호를 공작이 되어서도 용병같이 생각하는 만프레드를 비하하기 위해 사용했으나 당사자는 그걸 자랑스럽게 사용했다. 작위를 받고도 그의 용병 활동은 계속 되었다. 왕국이 평화를 누리는 동안에도 만프레드는 세상으로 나가 끝없이 싸움터를 찾아 헤맸다. 돈을 주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서 싸웠다. 용병공과 그의 무리는 썩은 고기를 먹으면서 포식하고, 증식했다. 살아남은 대장 하이에나는 더욱 노련하고, 교활한 자가 되었다.

‘생존의 법칙 첫 번째. 나보다 강한 놈이 멀쩡할 때 싸워주지 마라. 레오폴트에게 정면으로 붙으면 그냥 박살날 거야. 기사왕만이 그를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레오폴트가 당장 도하해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점을 믿고 저지해야 하나? 아니면 요새에 틀어박혀 농성을 해야 하는 것인가?’

용병공의 종자인 소년 기사는 마스터의 망원경을 휙 뺏어들어 적진을 살폈다. 만프레드는 종자를 나무라지 않았다. 만프레드는 기사다운 사고가 전쟁에 방해가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레오폴트 왕이 엄청난 기병대를 몰고 왔습니다. 동방의 유목민들과 기사들이 함께 하는 모습이라니. 국경 요새가 없었으면 진작에 모두 쓸려나갔을 겁니다. 폐하께서 선견지명이 대단하셨던 것 같습니다.”

만프레드의 말에 소년 기사는 피식 웃었다. 소년은 항상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는 체격이 큰 미남이었을뿐만 아니라 일부러 자신을 돋보이는 장신구들을 잔뜩 착용하고 있었다. 붉은 용이 그려진 황금 갑옷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아뇨. 이건 부왕께서 크게 실수하신 겁니다. 우리 쪽에서 잘못한 거에요. 레오폴트 숙부가 화가 날 만 했어요.”

이 소년의 정체는 기사왕의 장남이었다. 갓 열여섯을 넘은 왕세자는 벌써부터 대륙 전역에 다양한 이유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풍운아였다. 왕세자의 냉철한 녹색 눈이 강 건너를 주시했다.

“전하의 말이 맞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대로면 국왕께서 오시기 전에 다 죽을 판입니다.”

“아니요. 숙부님은 공격해오시지 않을 겁니다.”

“?”

“모르시겠습니까? 숙부께서 정말 침공을 하실 의향이셨다면 이미 국경을 건너셨을 겁니다. 우리를 무시하고 내륙으로 달려가 모이는 군대를 각개격파 하셨겠죠. 숙부님은 협상을 하러 오신 겁니다.”

만프레드는 갸웃한 태도로 물었다.

“허. 어찌 그리 자신만만하십니까?”

“그분은 동방 유목민들의 기동전을 채용하신 분이에요. 전쟁이 벌어지면 불시에 침공해서 적의 주력을 섬멸한 후 각개격파 해버리죠. 그 뒤에 고립된 거점을 모조리 불태우다보면 항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세 곳의 왕국이 저항도 못해보고 멸망했지요.”

“제 말은 전하께서 레오폴트 왕의 전략을 그렇게 자세하게 알고 계시냐는 겁니다.”

“제가 숙부님의 팬이거든요. 그분의 전쟁 기록을 모으다보니 눈에 익었습니다. 아주 화려하게 군사 작전을 하시는 분이죠. 묵직한 단판 승부를 중시하는 부왕과 달리 기동전을 중시하시는 전략이 돋보인다고요. 두 분이서 붙으면 제법 재밌는 상황이 펼쳐질 겁니다.”

“아니. 그럴 시간이 어디서 나셨냐는 겁니다. 왕비 폐하께서 아주 빡세게 교육시키기로 유명하시잖습니까.”

“한 네 살 때부터 취미로 하다보니 얼추 되더라고요. 그 때 어머니한테 정세를 설명받은 날에 전 직감했습니다. 숙부님은 우리 왕조의 최고의 우방이거나 운명의 적이 될 수밖에 없다고요. 적이든 친구든 잘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태연히 답하는 왕세자를 보며 만프레드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이 열여섯에 어떤 생각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왕세자는 일반적인 부류의 인간과는 궤가 달랐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두려워해 마땅하다.

“숙부를 직접 뵙고 담판을 지어야겠습니다. 성문을 여세요.”

“네?! 폐하의 명령은 국경 지대를 얌전히 지키고 있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만프레드는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더 숙부를 기다리게 했다간 정말로 공격이 시작될 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내가 짜둔 계획은 다 무너집니다. 내가 물려받을 왕국이니 내가 지키러 가겠소. 성문을 여십시오.”

“그건 안 됩니다. 왕세자 전하를 적진으로 보내는 건 제가 받은 권한에서 어긋나는 일입니다. 포로라 잡히시면 제가 호된 문책을 받게 될 겁니다.”

왕세자는 피식 웃었다.

“알겠습니다. 용병공. 일이 잘못 되어도 당신이 견책 받지 않을 명분이 필요하단 이야기군요. 지금 만들어드리지요. 전군, 나의 목소리를 들어라!”

소년 기사의 쩌렁쩌렁한 목청에 요새 안에 있는 병사들의 시선이 한 눈에 쏠렸다. 왕세자는 단숨에 빛나는 보검을 뽑아 만프레드의 목에 겨누고 있었다.

“내가 숙부를 만나 평화를 매듭짓고 오겠다는데 일개 용병공 따위가 폐하의 계승자인 나를 막으려든다! 이게 반역이 아니면 무엇이겠느냐!”

휘하 부장들은 어떤 표정도 짓지 못한 채 난처해했다. 분명 왕세자는 대단히 총명했지만 정식으로 군권을 쥐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만프레드 공작이었다. 그런데 만프레드 공작은 몸을 떨며 식은땀을 흘렸다.

“토,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왕세자 전하!”

“경비병! 문을 열어라! 이 겁쟁이를 내버려두고 내가 다녀오겠다!”

“안됩니다! 지금 가시면 전하의 신변이 위험합니다!”

“뭬야?! 그대의 미래의 왕으로서 명한다! 당장 문을 열어라!”

두 사람은 짜고 치는 멋진 연기를 선보였다. 왕세자는 허세에 가득 찬 통제할 수 없는 망나니로 보였고 용병공은 최선을 다해 그런 망나니를 말리려는 충신의 역할이었다. 그들은 여러 다채로운 감정 변화를 선보이다가 결국 만프레드가 칼집에 얻어맞고 나뒹굴며 상황이 정리되었다.

용병공은 ‘어쩔 수 없이’ 성문을 열어주었고 왕세자는 근위 기사들만을 데리고 레오폴트의 진영으로 떠나버렸다.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말이다.

“괜찮으십니까? 만프레드 원수! 이번 일은 왕세자님께서 크게 잘못하신 겁니다!”

“지금이라도 가서 그분을 도로 데려와야 합니다! 저분이 잘못 되시면 왕비께서 우릴 놔두시지 않을 겁니다!”

“폐하도 가만 안 놔둘거다! 가서 데려와!”

만프레드는 최선을 다해 소리쳤고 여러 기사들이 왕세자의 뒤를 따라나섰다. 그렇게 열혈 기사들이 떠난 후 만프레드를 주변을 살폈다.

‘마일즈. 딴 영지애들 다 갔냐?’

부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만프레드는 일어나서 엉덩이를 탁탁 털었다. 그의 오랜 부하들은 모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있었다.

“자. 자. 우리 왕세자님께서 평화를 가져다주시길 기도하자고. 발타리아의 이름으로 평화가 오기를!”

사실 알 게 뭐람. 왕세자가 협상을 성사시키면 평화가 오니 좋고 실패하고 포로로 잡히면 왕세자의 신변에 가해질 수 있는 위협을 우려해 군대를 철수시켰다고 하면 될 터이다. 어느 쪽이든 자신의 군대는, 자신은 살아남을 것이다. 늙은 용병대장의 최대 관심사는 안락한 노후였다.

***

국경 요새에 근처에 있는 지휘 막사 속. 기사왕과 그의 제후들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있었다. 왕이 노기를 뿜어대는 통에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다.

“그래서 왕세자가 적진으로 혼자 가는 걸 지켜보고만 있었다?”

기사왕의 차가운 시선을 받은 만프레드를 고개를 조아리며 몸을 떨었다. 아르투르 대왕의 전설을 듣고 자란 젊은이들은 그를 명예롭고 관대한 왕으로 기억하고 있었으나 나이 많은 제후들은 아르투르의 분노한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야심덩어리 제후들이 괜히 왕명이 내려오면 순순히 따르는 게 아니었다.

“그, 그게. 저희도 최선을 다해 막았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칼을 뽑아들고 자신을 막으면 반역이라고 주장하시는 데 신하된 자로서 어쩔 도리가 있겠습니까?”

“음. 어쩔 도리가 없었다라.”

아르투르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제후들을 둘러보았다. 타에라트 변경백을 비롯한 모든 주요 제후들와 지휘관들이 모두 모인 장소였다. 그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르투르는 씩 웃음을 지었다.

“만프레드야.”

두려움을 최대한 숨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답하는 만프레드 공작.

“네. 폐하.”

“최선을 다했으니 용서해달라고 하기엔 우리 나이가 많지 않냐? 갓 서임 받은 청년 기사가 해야 용서 받을 소리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은 결과를 내야지. 그렇잖아. 왕세자가 지금쯤 무사히 돌아와 있었으면 네 변명도 모르는 척하고 넘어갔겠지. 그런데 여태 안 돌아왔잖아. 우리가 사신을 보내도 만나지도 못하고 안전하단 대답만 듣고 돌아와야하고. 이건 억류된 거 아니겠니?”

“…….”

아르투르는 살벌하게 만프레드를 노려봤다.

“임마. 평소에는 내가 직접 내린 명령도 핑계대면서 미루는 놈이 성인도 안 된 왕세자가 지시한다고 고스란히 따라? 넌 임마. 못 막은 게 아냐. 싸우기 싫어서 안 막은 거지.”

“아, 아닙니다! 소신이 능력이 부족하여 불충을 저질렀……으악!”

아르투르는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만프레드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린 후 마구 흔들었다. 중무장한 기사가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인형마냥 뒤흔들렸다.

“다시 말해봐.”

“토옹-촉-하여-주시-옵-소-서! 폐-에-하! 으-아-아-악!”

아르투르는 만프레드를 짐짝처럼 허공에서 몇 바퀴 돌렸고 이리 던졌다 저리 던졌다 한 뒤 도로 의자에 내리꽂았다. 강제로 착석당한 만프레드는 책상에 쿵-하고 머리를 찍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싸움을 피하고 싶어서 제대로 막지 않았던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폐하도 아시다시피 전하께서 워낙 영특하신 분이시지 않습니까? 워낙 확신을 가지시길래 저 같이 미천한 놈은 생각도 못하는 기발한 해결책이 있으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 그렇게 정직하게 답해야지. 하여간 이제부턴 넌 결과로 답하면 된다. 왕세자가 무사하면 감봉으로 끝내겠지만 만약 아니라면…….”

아르투르가 만프레드의 멱살을 잡고 노려볼 때, 근위대장을 맡고 있는 조레스 대장이 들어와 고개를 숙였다. 아르투르와 동년배이던 농부 청년은 넉살 좋은 풍채를 가진 훌륭한 군인으로 거듭나 있었다.

“폐하. 왕세자 전하께서 털 끝 하나 다치지 않으시고 돌아오셨습니다. 수행원들도 모두 무사하고요.”

“오오! 발타리아의 보우하심이라! 직접 만나러가겠다!”

아르투르는 단숨에 멱살을 놓고 버선발로 왕세자를 맞이하러나갔다. 다른 제장들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사왕을 뒤따랐다. 만프레드는 멍이 든 목가를 매만지며 억울한 표정으로 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으나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의 형제나 다름없는 용병 출신 봉신들조차도 말이다.

“에이씨! 왜 내 억울함은 아무도 안 알아주는 거야!”

왕을 뒤따르던 그의 부관, 마일즈 자작이 힐끗 고개를 돌렸다.

“대장님이 남의 억울함을 알아준 적이 없잖아요.”

“음.”

납득할 수밖에 없는 설명이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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