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
늦은 새벽. 바이스부르크의 영주의 침실 안. 아르투르와 아델라이데는 서로 몸을 포갠 채로 사랑의 말을 주고받았다. 얼마 뒤, 두 사람은 기분 좋은 나른함을 느끼며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제 곧 수도로 돌아가실 시간이죠?”
“아무리 순시가 명목이라고 해도 언제까지 머무를 순 없으니 말이오.”
“저는 모두 이해한 답니다. 제 처지를 알고서 시작한 사랑이었으니까요.”
아델의 말과 달리 목소리와 눈빛은 아쉬움에 가득차 있음을 내비쳤다. 하지만 아델도, 자신도 서로 감당해야 할 몫이 있는 법이었다. 아르투르는 이 관계가 완전히 떳떳하지는 않았지만 후회하지도 않았다. 일 년 중 백색 산맥을 건너와 바이스부르크에 머무르는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에 불과했으나 그는 이 시간이 가장 좋았다. 나머지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줄만한 동력이었다. 후작의 영토에서만큼은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편히 쉬었다. 이 땅의 백성과 봉신들은 순수한 호의로 자신을 반겨주었고 후작은 오직 온전한 사랑만을 원했다.
‘아버님이 왜 말년에 그렇게 힘들어하신 지 이해가 가.’
역설적으로 사람들은 난세에 더욱 단결했고, 고귀한 미덕을 찬양했다. 긴 평화가 도래하자 정치가 시작되었다. 당장 먹고 살 일이 해결되니 서로의 몫을 늘리기 위한 보이지 않는 투쟁과 거짓말, 음모, 사기가 판을 쳤다. 한적한 땅의 영주라면 눈을 감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권력의 중심에 있는 대왕 정도가 되면 평화의 이면에 깔린 모든 더러운 소식들을 듣고 다루어야했다.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것도 있었으나 아닌 것도 많았다. 실은 아닌 게 더 많았다.
긴 평화의 시간 이후 레무리아 왕국은 세상의 모든 부와 힘, 영광이 모이는 장소로 거듭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신을 향해 구원해달라고, 자신들이 바라는 걸 달라고 외치고는 했다. 숨 막힐 것 같은 삶의 연장이었다. 명예를 지키는 건 매번 시련에 처해야했다.
“궁정 생활은 살 만 하신가요?”
강하게 고개를 젓는 아르투르.
“다 때려치우고 떠나고 싶은 심정이오. 왕비의 끝없는 권력욕을 견제하면서 전장에서 함께 피를 흘린 건국 공신들과도 머리싸움을 해야 한다오. 백성들은 내게 고마움을 느끼며 나를 존경하지만 가까이 여기지는 않소. 내가 모두에게 공정한 탓이지. 때문에 그들은 내 말을 잘 듣지는 않는다오. 공평한 지도자보다는 자신을 편애해주는 사람이 더 좋으니까.”
모두가 공정한 통치에 만족할 거라고 생각했던 건 꽤 순진한 생각이었다. 약자라고 해서 정의를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들은 입장이 달라지면 다른 행동을 했다.
“게다가 요즘엔 머리가 굵어진 왕세자가 자기 파벌을 형성하고 있소. 아직 성인식도 안한 놈이 대단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로선 피곤한 일이지. 왕국을 위해서 좋은 일이 될 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한편으로 카밀은 굉장히 유능하고, 성실한 감찰관이지만 너무 열심히 하는 나머지 가끔 사고를 칠 정도지. 그러면 그것도 수습해야 하오.”
아르투르는 긴 한숨을 쉬었다.
“한 마디로 유능하고 신념 있는 자는 야망을 품어 다루기 어렵고 다루기 쉬운 자는 간사한 자이거나 충성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무능한 자들이오. 그나마 나와 이상을 같이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지. 케이와 두라노 인들만이 나를 전적으로 지지하고 동조해준다오. 나머지는 모두 자신의 이익을 쫓을 뿐이야.”
아델라이데는 똘망똘망한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저희 도파뉴 사람들은요?”
그녀의 질문에 크게 웃는 아르투르.
“하하하. 아델. 당신이야말로 내 진정한 지원군이라오. 항상 고맙소.”
아델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르투르의 머리를 푹 껴안았다.
“제 품에서만큼은 편히 쉬세요. 세상 사람들이 당신을 저버릴 지라도 저만큼은 영원한 당신의 편이랍니다. 우린 가족이니까요.”
아르투르는 그녀의 품에 안겨 눈을 감고 현재를 즐겼다. 이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고요 속에서 평화와 안정을 만끽했다. 세상의 일 따윈 내려두었다. 영광과 성공을 쫓던 젊은 시절의 생각과 달리 행복이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다그닥 -! 다그닥 - ! 이히히히힝 - !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두 사람의 평화를 깨뜨렸다. 한 밤 중의 파발마이니 긴급한 정보일 것이다. 아르투르는 직접 소식을 확인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아델의 가녀린 두 손이 자신의 머리를 놔주지 않았다.
“가지 마세요. 별 일 아닐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군. 당신도 아닌 걸 알 테지만.
얼마 뒤에는 관저 마당에서 소란이 벌어졌다. 새벽에는 들여보낼 수 없다는 문지기의 고성과 당장 소식을 전해야하니 비키라는 전령의 다툼이었다. 문지기는 결국 관저의 문을 열어주었다. 꼭두새벽에 후작의 관저를 치고 들어올 정도면 범상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아르투르는 마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일어서려했다. 여전히 아델은 그를 놔주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이미 상황을 눈치챘으나 그럼에도 왕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더 평화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가득 했다. 저 소식이 무엇이든 내쫓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관저로 들어온 사내들이 계단을 거칠게 뛰어올랐다. 갑옷이 철컥였고 복도에는 무거운 것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그들이 도착할 거요. 우리가 마중을 나가야 체면이 살지 않겠소?”
“체면 같은 건 없어도 돼요. 당신과 함께 하는 찰나가 더 소중해요.”
“그게 당신이 바라는 거라면야.”
다가오는 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복도에선 위르마넨 가문의 호위 기사들이 소리 높여 외쳤다.
- 멈추시오! 당신들이 누구이건 후작 각하의 침소에는 접근할 수 없소. 우리가 소식을 전하고 올 테니 기다리시오. -
- 그럴 시간 없다! -
군나르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호위 기사들이 뭔가에 얻어맞고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투르는 자신을 붙잡은 아델라이데의 손을 서서히 때어냈다.
벌컥 -!
복도의 불빛이 침실로 새어 들어왔다. 눈부신 빛 너머에는 한 무리의 기사들이 있었다. 선두에는 양의 문장이 그려진 갑옷을 입은 젊은 영주, 케이가 있었다. 그의 뒤로는 북구인 기사들이 모두 도열해있다. 하나 같이 심각한 표정이었다.
“대왕 폐하. 바로 떠나셔야 합니다. 상황은 가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케이의 말이 워낙 무거워서 더 이상 거스를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르투르는 이불 속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입었고 아델라이데도 남들의 눈을 아랑곳 않고 이불 속에서 나와 그의 무장을 챙겨주었다. 모든 갑옷을 착용하고 건틀렛까지 낀 후 창 밖을 내다보니 이미 왕의 근위 기사들이 모두 집결해 있었다.
“그렇게 슬픈 눈으로 바라보지 마시오. 어차피 가야할 때였으니.”
걱정 어린 눈길을 보내는 아델라이데.
“반드시 무사하게 돌아오셔야 해요. 맹세해주세요.”
“최선은 다하겠지만 맹세는 하지 못할 것 같군. 프리드리히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시오.”
아르투르는 아델라이데가 내미는 성검을 받아 왼편의 혁대에 걸었다. 그녀를 끌어당겨 길게 입맞춘 후 아르투르는 기사들을 이끌고 관저를 나섰다. 뒤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북구인들의 침공이라도 개시된 건가?”
“그보다 나쁩니다.”
실없이 웃는 아르투르.
“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예. 레오폴트 왕이 모든 군사력을 긁어모아 동방 국경으로 접근 중입니다. 왕비 폐하의 정보원에 따르면 기병 8만 이상. 후발대로는 보병 4만 정도라는 군요. 이미 선발 기병대는 동부 국경에 도착했을 공산도 큽니다. 레오폴트 왕의 본대도 빠르면 사흘, 늦어도 일주일 안에는 국경에 도착하겠지요.”
아르투르는 잠시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멍 하니 있다가 결국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지? 그 정도 대 병력을 소집하려면 분명히 징후가 있었을 텐데. 정보부에 문제가 있었나?”
“예. 저희 측 귀족 중에 내통자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소식을 듣는 건 늦추고 레오폴트 왕의 궁정에 있는 저희 첩자들은 모조리 일러바쳤지요. 덕분에 이렇게 된 겁니다.”
아르투르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분노가 샘솟았다.
“레오폴트. 오늘을 위해 그 모든 걸 속였던 거냐? 우리 측 대응은 어떻게 되었나?”
두 사람은 후작의 저택을 군마에 올라탔다. 에쿠잘루스가 투레질을 해서 주인을 반겼다.
“마침 국경 수비를 맡고 있던 만프레드 공 덕분에 제때 대응을 하긴 했습니다. 현재 왕비 폐하의 지시로 왕국 전역에 총동원령이 내려져있으며 왕세자 전하는 왕실 군대를 이끌고 동부 국경으로 떠나셨습니다. 가는 길에 만프레드 공과 제후들이 합류할 테니 8만 명 정도는 모일 겁니다. 나머지 8만도 소집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겠지만요.”
아르투르는 잠시 상황을 곱씹어봤다. 레오폴트는 지난 십 오년 간 단 일 년도 전쟁을 쉰 적이 없었다. 국지전만 주로 치러본 만프레드나 아직 야전 경험 없는 한번 없는 왕세자가 상대할 적수가 아니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회전이 벌어지면 끝장이다! 사흘, 사흘내로 동부 국경으로 향한다! 전속력으로 달려! 낙오하는 자는 차후에 합류하도록! 이랴!”
아르투르는 뒤죽박죽이 된 감정을 억누르며 에쿠잘루스를 재촉했다. 왕의 백마가 선두에서 달리는 가운데 수백 쌍의 말굽이 그 뒤를 따랐다. 기사왕의 행렬은 새벽의 어둠을 뚫으며 해가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질주했다. 한 없이 분노가 끓어오르던 때 성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감정이 이토록 요동치는 건 실로 오랜만이구나.’
‘레오폴트에게 배신을 당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그는 제 형제이자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여러 분란이 있었지만 저는 그를 믿었다고요. 그런데 지금 뒤통수에 칼을 맞은 겁니다!’
‘…………어찌 되었든 잘 해결하길 바라마.’
‘저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에쿠잘루스도 주인의 감정을 읽은 듯 매우 거칠게 발을 내디뎠다. 새벽의 어둠 속을 질주해가는 아르투르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레오폴트와 함께 해온 모든 순간들이 지나갔다. 그는 어째서 자신에게 칼을 들이댔는가? 정말로 배신인건가?
만약 배신이라면 나는 레오폴트를 벨 수 있는가? 레오폴트는 나를 벨 수 있을 것인가?
지금으로선 아무 답도 얻지 못했다. 그저 직접 만나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확립한 질서가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유가 위협받고 있었다. 절대 이 상황을 좌시할 수 않으리라. 평화가 무너진다면 칼로서 다시 세우고야 말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