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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스부르크의 영주 관저 안. 침실에서 아르투르는 결의가 담긴 태도로 아델라이데 후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 생각에 프리드리히는 수도로 데려가는 게 맞겠소. 아무래도 어머니의 땅이다보니 게을러진 것 같군. 그 아이를 좀 더 엄격히 훈육하는 장소에서 자랄 필요가 있소. 프리드리히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말이오.”
아델라이데 후작은 아직 젊음의 생기가 가득해 미모가 하늘처럼 빛나고 있었다. 아르투르와 지내는 동안에는 특별히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고있기는 했다. 그녀는 아르투르의 품에 안겨서는 부드러운 미소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올려다보았다.
“에이. 화 푸세요. 프리드리히가. 평소엔 손에도 대지 않던 검술에 손을 댄건 아버지께서 무예를 좋아하시기 때문이었다고요. 대견하게 여겨주셔야죠.”
아르투르의 목소리가 단번에 벌컥 올라갔다.
“뭐? 위르마넨 가문의 계승자가 평소에 검에 손도 대지 않는단 말이오?! 아델라이데 후작! 정신 차리시오! 프리드리히는 당신 후계자요! 이대로면 기사 한 명 몫도 못한다니까! 케이도 저거보단 잘했어!”
아르투르가 흥분해서 소리쳤지만 아델라이데는 미소를 잃기는커녕 오히려 더 사랑 가득한 미소를 지어보일 뿐이었다.
“당신도 참. 둘이 있을 때는 애칭으로 불러달라니까요. 작위 붙이지 말고요.”
아델라이데는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아르투르의 귀에 속삭였다.
“알겠소. 아델. 미안하게 됐소. 화를 내려던 게 아니라…….”
아르투르는 누그러진 목소리로 답한다.
“당신이 다 저와 프리드리히를 걱정해주셔서 하는 말씀이신 걸 잘 알고 있답니다. 하지만 차분히 제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그러면 프리드리히가 그저 게으름을 피운 게 아니라는 걸 아실 거에요. 그랬더라면 저도 크게 혼냈을 거랍니다.”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의 팔짱을 낀 채 왕을 부드럽게 정원으로 이끌었다. 정원의 한복판에는 프리드리히와 수염이 희끗한 남자들이 함께 있었다. 행색을 보아하니 학자였다. 프리드리히는 아직 볼 살이 빠지지 않은 열두 살의 소년이었으나 어머니를 닮은 뚜렷한 미남이었다. 소년은 학자들과 진지한 지적 토론을 나누고 있었다.
“만약 세상을 창조한 자들이 용들이었다면 그 용들을 창조한 것은 누구이겠습니까?”
“저희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 단지 위대하신 발타리아의 의지가 작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따름이지요.”
“왜 사과는 누가 따지 않아도 땅으로 떨어지는 걸까요?”
“사과는 땅에서 시작된 것이므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 설명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화살은 땅에서 난 것이 아니어도 쏘면 땅으로 떨어지지만 사과를 낳은 나뭇가지는 땅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살은 경우가 다릅니다. 저희가 사람을 쏘기 위해 만든 것이니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맞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의지를 불어넣는다고 사물을 움직일 수 기적을 부릴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사과와 화살은 분명히 다르게 만들어졌는데 왜 같이 땅으로 떨어질까요?”
노학자는 표정을 찌푸리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생각에 골몰한 모습이었다. 이 호기심 많은 소영주는 옛날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믿어왔다는 방식의 설명에는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질문은 많은 경우 본질을 꿰뚫고 있었다. 이번엔 뭐라고 대답해주어야 할 지 곤란해 할 때 뒤편에서 박수소리가 들려왔다.
“토마스 교수. 대왕께서 그대와 면담을 원하신다.”
“예. 후작 각하.”
노학자는 소영주가 다른 학자들과 토론하게 내버려둔 채,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다가와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알현할 기회를 주셔서 영광입니다. 고귀한 대왕이시여.”
패기로 가득 찬 젊은 기사다운 모습을 자랑하던 아르투르는 이젠 마흔을 눈앞에 둔 중년의 통치자였다. 풍성한 턱수염과 옅은 주름은 노련한 통치자의 면모를 엿보였다. 여전히 기사답게 온 몸에 튼튼한 근육을 기르고 있었지만 조각상 같던 젊은 시절과는 달리 뱃살도 조금 있어 후덕한 모습을 내보였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험심이 가득하고 사납기 그지없던 젊은 모습보다는 지금의 아르투르에게 안정감과 권위를 느끼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네. 토마스. 소영주에 대해 물을 게 있네. 그는 향후 내 봉신이 될 자인만큼 장래에 잘 알고 싶군.”
“허허. 아버지가 자식의 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리 부연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인자한 노인의 표정에 아르투르는 조금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프리드리히 소영주는 위르마넨 가문의 사람일세. 아버지의 정체는 후작이 밝힌 적이 없으니 누가 알겠나?”
노인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아! 물론 공식적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누가 소영주님의 아버지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재미있는 이야기로 여길 뿐, 정치적 문제로 여기거나 폐하에 대한 비난거리로 사용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왕다운 일이라며 부러워들 하지요. 그만큼 폐하의 인기가 좋다는 반증입니다! 사제들마저 은근히 언급을 피하니까요.”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가 은근히 불편해하는 것을 느끼고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서 듣길 원하시는 건 소영주의 학습 진척에 대한 것일세. 그 점에 집중해주게.”
토마스는 그제서야 자기 결례를 깨달은 듯 고개를 조아렸다.
“아차. 송구합니다. 대왕 폐하. 이 무지한 노인의 오지랖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점이 궁금하신지요?”
아르투르는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큼. 자네들이 소영주와 대담을 나누는 걸 들었네. 그의 성취는 어느 정도 수준인건가? 짐은 학문에 조예가 거의 없어서 모르겠네.”
“소영주께선 학문에 굉장한 재능이 있으신 분입니다. 열두 살의 나이에 추상적인 문제를 저렇게 복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분은 드뭅니다. 또래의 귀족 도련님들보다 월등히 뛰어난 편이고 저 정도면 대학의 뛰어난 학생들과도 동등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아르투르는 갸웃하며 물었다.
“그 정도면 얼마나 잘하는 건가? 소영주는 백 만이 넘는 인구를 다스리는 대영주가 될 걸세.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론 소용이 없어!”
“대학에는 스물이 넘은 공부 좀 한다는 집안의 사람들이 오지요.”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게.”
토마스는 일일이 아르투르에게 프리드리히의 성취를 전해주었다. 모든 학문 분과에서 뛰어난 성과를 보이나 특히 자연 철학과 법학, 기하학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뛰어난 교수자인 토마스는 해당 과목들이 왜 중요한 지 꼭꼭 강조해주었다.
“짐도 학문의 중요성에 대해선 잘 아네. 여러 대학을 건립하는데 투자를 한 걸 보면 알 거야. 하지만 그게 군주에게 꼭 필요한 소양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만. 소영주는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를 이끌 줄 알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지금은 학문보다는 무예와 군사 전술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나?”
토마스는 긴 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물론 통치자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으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 점엔 누구도 이견의 여지가 없지요.”
아르투르는 역시 내 말이 맞지 않냐는 눈길로 아델라이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빙긋 웃어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대왕 폐하. 꼭 뛰어난 기사만이 영지를 지킬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당장 폐하의 오른팔이신 케이 백작께서도 기사로서는 범용하다고는 평가를 받으심에도 장수로서는 폐하의 제후들 중 으뜸으로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 용병공마저도 한 수 접어줄 정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 바위 군도를 장악한 해적이 해상왕을 자처하며 왕국의 해안선을 따라 노략질을 해왔다. 싸우면 상대도 안 될 허접스런 놈이었지만 신출귀몰하게 변방만 약탈하고 돌아다니니 번거롭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 케이 백작은 거짓 정보를 퍼뜨려 해적 함대를 유인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케이의 영지에 민간인만 있는 걸 보고 잽싸게 달려들었으나 그들은 모두 양치기들이었다. 접전 중 케이의 돌팔매질에 해적왕이 맞아죽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살려주겠다는 케이의 말을 항복했다가 교수형에 처해졌다.
‘약속과 다르지 않습니까?! 기사왕의 종자께서 명예를 저버리시는 겁니까?’
‘응. 아냐. 민가나 털어먹는 새끼들은 아무렇게나 죽여도 돼.’
케이는 그 뒤로 자비로 함대를 편성해 바위 군도로 진격했고 난공불락의 해적 요새에 내분을 일으켜 손쉽게 함락시켰다. 덕분에 바다는 훨씬 안전해졌으며 이제 상선들은 호위함 없이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그 뒤로도 케이는 크고 작은 분쟁에 투입되었고 그때마다 늘 이겨놓고 싸우는 장수로 유명해졌다.
“케이 백작은 짐과 함께 전쟁터를 누비며 거친 삶과 싸움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기 때문에 지략으로 활약할 수 있던 것이지. 소영주가 노력해서 기사 교육을 받고도 성취가 뛰어나지 않다면 짐도 인정하겠네. 하지만 그는 고생을 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그건 고쳐져야만 하네.”
아르투르의 단호한 말에 아델라이데는 교수에게 눈빛으로 압력을 보냈다. 그럴듯한 대답을 내놓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이다. 그녀는 가주로서 아르투르가 후계자를 수도로 데려가겠다는 걸 거부해도 그만이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르투르의 납득이었으니까. 자신은 언제나 그의 미소와 사랑이 받고 싶었다.
“흠. 대왕의 말씀이 옳습니다. 분명 군대를 이끄는 장수로선 기사 교육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사가 되기엔 분명 폐하의 곁만큼 훌륭한 곳이 없겠지요.”
아델라이데는 도끼눈을 떴다. 내 아들을 수도로 보내라고? 죽고 싶냐?
“하지만 이런 관점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폐하. 군주가 반드시 뛰어난 장군이어야만 외적을 이끌 수 있는 것입니까? 오히려 군사적인 재능은 아랫사람의 손을 빌려도 되는 게 아닐까요? 마침 위르마넨 가문의 봉신 가문에는 위대한 무가의 후예들이 많습니다. 군주에게 진정 필요한 재능은 사람들의 재능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일 겁니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니까. 기사도 아닌 영주에게 누가 전시에 충성을 바칠거냐는 말일세.”
“이걸 한번 봐주시겠습니까? 폐하.”
노학자가 꺼내든 두루마리에는 많은 글이 써져있었다. 어떻게 법률을 제정하고 시행해야 공평한 재판이 될 수 있을 지, 죄인과 누명을 쓴 자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지에 대한 고찰이 담긴 글들이었다.
“폐하께서도 많은 재판을 주재해보셨으니 쓸 만한 고찰이 담겼다는 건 보이실 겁니다. 이 건 다른 구상입니다. 새로운 물레방아의 구상도지요. 기존의 물레방아엔 비효율적인 부분이 많으니 어떻게 고치면 더 많은 밀을 제분할 수 있을 지 구상 중이십니다. 이렇게 근면한 영주를 아랫사람들이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기꺼이 자신들의 군주를 위해 칼을 들지 않을 지요? 후작 각하의 고용인이기 전에 한 명의 학자로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프리드리히 소영주께선 배움을 계속 하신다면 분명히 좋은 영주가 되실 겁니다. 물론 결정은 두 분의 몫이겠지요. 소신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토마스는 고개를 숙인 후 뒤로 물러났다. 아르투르는 큰 혼란을 느꼈다. 자신이 자라던 시절만 해도 군대의 지휘 여부는 계승권을 박탈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나머지 분야는 잡기로 취급되어 잘하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이었다. 변경의 제후 집안에서는 글은 자기 이름을 쓰는 법만 배우곤 육체 단련에 몰두했던 곳도 많았다.
‘요즘 청년들은 이견이 있으면 칼로 결판을 내는 것보다 토론을 선호한다지.’
고민에 빠진 아르투르에게 아델라이데의 부드러운 살결이 와 닿았다. 그녀는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있잖아요. 후계자가 무엇을 배워하느냐를 빼놓고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프리드리히가 원하는 걸 배우면서 자라는 게 좋지 않겠어요? 어머니 옆에서 사랑을 가득 받으면서 구김살 없이, 건강하게 자라주면 좋겠어요. 영주이기 전에 우리 아들이잖아요. 한번만은 아버지로서 생각해주세요. 그럼에도 프리드리히가 수도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렇게 할 게요. 저 아이에겐 아버지의 인도가 필요하니까요.”
퉁명스런 아르투르의 대답이 뒤를 이었지만, 조금은 누그러진 듯한 음성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파도가 그를 얌전히 남겨두지 않을 수도 있잖소.”
“프리드리히가 홀로 설 수 있도록 저희가 막아주면 되잖아요?”
“언제까지고 우리가 지켜줄 수 있는 건 아니오. 언제나 부모가 자식보다 먼저 떠나지.”
“저는 프리드리히를 믿어요. 필요한 걸 해야 하는 시기가 되면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깨닫고 잘 할 거라고 믿는 답니다. 당신도 한번만 믿어보면 안될까요? 우리 아이잖아요.”
아델은 아르투르의 품에 스스로를 파묻은 채 사랑이 가득 담긴 눈빛을 내보냈다. 아르투르는 그녀가 안일한 인식을 내보인다고 생각했지만 단 칼에 거절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프리드리히가 해맑게 자라는 걸 보고 싶었고 아델이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들은 몇 안 되는 자신의 안식처였다. 그들의 행복만은 지켜주고 싶다는 이기적인 목소리에 굴할 수밖에 없었다.
“아델. 당신이 나보다 훨씬 현명한 것 같군. 원하는대로 하시오.”
아델라이데는 활짝 웃으며 발끝을 들어 올려 아르투르에게 입을 맞추었다.
“저만의 왕이시여. 영원토록 사랑할게요.”
“그건 낯이 부끄럽군.”
“어때요. 듣는 사람도 없는데.”
두 사람의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