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챙 - !
이른 아침, 바이스부르크에 있는 위르마넨 가문의 전용 훈련장에서 강철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아르투르와 레오폴트는 서로 검을 맞댄 채 호승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재빠르게 검을 젖힌 두 사람은 초인적인 몸놀림으로 예술적인 검로를 그렸다. 두 사람은 소드마스터들조차 쉽사리 흉내 낼 수 없을 완벽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둔탁한 움직임이 들렸다. 온 몸의 기관들이 유기적으로 협응하며 변화무쌍하게 공격을 가했다. 매 일격이 절명에 이를 수 있는 치명타를 노려서 이를 지켜보는 이들은 불안에 떨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의 실력을 믿었기에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몇 분간 이어진 치열한 사투 끝에 여명이 레오폴트의 목에 겨누어졌다. 카운터 자세를 취하려던 그는 검을 손에서 놓으며 위로 올렸다.
“항복. 항복. 네가 이겼다. 아르투르.”
아르투르가 여명을 거둬들여 검집에 꽂자 레오폴트는 쓰러지듯 훈련장의 잔디밭에 드러누웠다. 그는 매번 깊게 들이쉬며 호흡의 안정을 되찾았고 하인이 가져다 준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를 닦았다. 반면 아르투르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의연한 태도로 서 있다가 레오폴트에게 손을 내밀었다.
“…….”
두 사람의 건틀렛의 맞닿으며 레오폴트는 몸을 일으켜 세웠지만 표정이 개운치 않아 보였다.
“이번에도 네가 이겼다. 아르투르.”
“패배를 발판삼아 노력하면 다음번엔 네가 이길 수 있을 거다.”
레오폴트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 저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야. 너는 4년 전에도 이 장소에서 똑같은 말을 했었다. 일정한 궤에 오르면 그 다음부턴 타고난 재능의 싸움이다. 네가 수련을 멈추지 않는 한 나는 기사로서는 널 영영 따라잡을 수 없을거다. 마스터의 말이 맞았던 거지.”
아르투르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흠.”
레오폴트는 피식 웃었다.
“이거 봐. 이젠 부정도 안하잖아. 기사로서 타고나는 놈은 따로 있는 거야. 나는 범상한 자일뿐이고.”
“정말 네가 재능이 없었다면 여기까지 날 몰아붙이지도 못했겠지. 범상한 건 저런 경우를 말하는 거겠지.”
아르투르가 대련 중인 그들의 종자들을 가리켰다. 막시밀리안은 케이를 데리고 놀고 있었다. 불쌍한 양치기 소년은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었지만 힘, 속도, 기교, 감각. 모든 면에서 막시밀리안이 그를 압도했다. 물론 막시밀리안은 벌써 정식으로 서임해줘도 괜찮을 역량의 종자였지만 그걸 감안해도 케이의 움직임은 좀 심하게 형편없었다. 이대로면 기사 서임이나 받을 수 있을 지 의심이 되는 수준이었다.
“허. 아무리 평민 출신으로 늦게 들어왔대도 저 정도까지 밀리나? 한 열 두 번은 죽었겠네. 어이쿠. 지금 한 번 더 죽었다.”
레오폴트는 케이를 노리며 낄낄 웃었다.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었다.
“게으름을 피워서 그런 거라면 내쫓기라도 하지.”
“케이 녀석이 열심히 하는 건 알아줘야지. 막시밀리안은 벌써부터 겉멋만 들어서 계집질이나 하고 다닌다. 저번엔 도박장에 갔다가 걸렸다고.”
“……막시밀리안도 대성하긴 글렀구만. 우리가 저 나이 때를 시작하면 너무 발전이 늦어. 너나 나나 왕실 기사들 정도 빼면 무난히 이기고 있었잖아.”
“그러게 말이다. 우린 종자 복이 왜 이렇게 없나 모르겠네.”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이렇게 느긋하게 얼굴을 맞대고 레오폴트와 시간을 보낸 건 참 오랜만이었다. 그들은 같은 피를 이어서 함께 자라났으며 같은 마스터 밑에서 기사 교육을 받았다. 여러 모험을 함께 끝낸 지금은 승전의 동지이자 동맹이기도 했다. 아르투르는 자신에게 진정한 형제가 있다면 레오폴트뿐이라고 여겼다.
“기억나나? 우리의 모험은 이곳에서 시작됐었어. 그 때 나는 첫 영지를 얻어서 흥분했었고 너는 첫 전투에 나가서 공적을 세우고 싶었지.”
아르투르는 과거를 회상했다. 짧고도 긴 4년이었다. 모든 것이 극적으로 변해버린 시간들이었다.
“벌써부터 옛날을 회상할 여유가 있는 거냐.”
“솔직히 정치는 이제 그만하고 싶군. 동방으로 떠나 검투장이나 돌고 싶은 심정이야. 머리 싸움에 계속 골몰할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지겹다고.”
“이제부터 통치의 시작인데 뭘. 슬슬 가보겠다. 동부 원정을 준비해야 돼. 우리 루이스 형님이 날려먹은 가문의 위신을 복구하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묻겠는데 정말 함께 가지 않겠나? 우리가 힘을 합친다면 어떤 왕들도 막지 못 할 거야.”
“대관식이 끝난 지 세 달도 지나지 않았어. 국내를 보살펴야지. 백성들에게 칼을 갈아서 쟁기를 만들라고 말할 때야.”
“민초들이야 알아서 잘 살아남겠지. 일부러 우리가 걱정을 해줘야하나? 저 드넓은 동부에 얼마나 많은 영토와 백성이 있는데.”
아르투르는 무표정하게 레오폴트를 바라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레오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하기야. 넌 이미 모든 걸 쥐었는데 굳이 모험을 감행할 이유는 없겠군.”
“자금이 바닥나서 하고 싶어도 뭘 할 수가 없단 말이지.”
“흐음. 글쎄. 그런 이유는 아닐 텐데. 하여간 알겠다. 나한테는 어쩌면 기회일지도.”
레오폴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막시밀리안! 바로 끝내. 떠나야 할 시간이다! 부지런히 출발해야 돼.”
“넵! 잘 지내라. 케이 백작. 다음에 만날 때까지 실력 좀 올려두라고.”
“으으으.”
막시밀리안은 급속히 속도를 올려 곧장 방패로 케이의 얼굴을 후려쳤고 케이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막시밀리안은 케이에게 손을 흔든 후 레오폴트를 뒤따라갔다. 검은 갑옷을 입은 호위 기사대가 자신들의 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에는 도로 동등한 입장에서 보자고. 아르투르.”
“우린 언제나 동등했어. 작위가 무엇이고 영토가 얼마나 넓든지 말이야. 난 널 언제나 존중한다. 레오폴트. 나한테 진정한 형제가 있다면 너 뿐이다.”
레오폴트는 눈을 크게 뜨고 강렬한 시선을 보냈다.
“기사왕이 거짓말을 하면 안 되지. 나는 네가 성검을 뽑고 왕국을 건국하는 동안 조연에 불과했고, 이제는 네 아랫사람에 지나지 않아. 네 왕국, 네 왕비, 네 무용, 네 명성. 그리고 네 성검. 모두 최고의 것들이야. 나도 최고의 존재가 되어서 돌아오겠다. 아르투르. 우린 다시 동등한 입장에서 마주 보게 될 거야.”
두 사람은 짧지만 강렬한 포옹을 했다. 그들은 함께 하던 시절을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졌다는 게 서로에 대한 신의에 방해가 되지는 않으리라. 서로가 위급한 시절이 되면 주저 없이 도우리라. 적어도 아르투르는 그렇게 믿었다.
“또 보지.”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경례했고 레오폴트는 말의 허벅지를 힘차게 걷어찼다. 레오폴트를 선두로 한 검은 기사무리가 바이스부르크의 성문을 지나쳐가자 아르투르는 시선을 도로 개인 훈련장으로 옮겼다. 아르투르의 눈에는 4년 전, 아직 수염도 자라지 않은 젊은이들이 순수하게 무용을 겨루던 시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당시에도 자신과 레오폴트는 서로 맹렬히 검을 부딪치며 웃고는 했다. 지금 보면 허점이 많기 그지없는 동작들이었다.
아르투르는 시종이 가져다 준 손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더 이상 치기 어린 기사가 아니었다. 이제 턱수염은 그럴듯하게 자라났으며 얼굴 표정에선 노련함이 묻어나왔다. 마침내 자신의 통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왕이 되고자 하는 꿈은 이루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자신이 왕이 되어야했는가를 세상에 증명 할 시간이었다.
시간의 수레바퀴는 빠르게 흐른다. 봄이 시작되었고 농부들은 밭을 갈았다. 여름이 되자 사람들은 열심히 일했다. 씨를 뿌리고 물건을 팔러 대양을 건넜고 대장간의 화로는 식을 줄 몰랐다. 가을에는 대륙인들이 농사에만 전념하였던 그 노력의 결실이 풍족히 곡물로 자라났고 창고가 가득 찼다. 사람들은 기사왕이 불러온 평화를 칭송했다. 겨울에는 일 년 간의 고생을 치하하기 위해 먹고 마시며 겨울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평화가 여러 해가 거듭되자 이제 사람들은 당장의 생존에서 벗어나 인생을 좀 더 긴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이런 변화는 세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 생산량의 증대는 빠른 인구의 증가로 이어졌고 장기간의 투자는 기발한 발명과 낯선 곳과의 교류를 촉진했다.
아르투르가 대관하고 십 년하고도 다섯 해가 지난 뒤, 서부 대륙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빛나는 번영을 누리는 장소가 되었다. 기사왕이 다스리는 레무리아 왕국과 그 제후들의 영토는 번영의 중심 속에서 엄청난 영화를 누렸으며 왕실 가족의 번성은 이러한 평화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희망을 가져다주었다.
이러한 때에 새로운 이야기는 북방에서부터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시간에 시작된다.
챙 -!
“도련님! 다리를 더 빠르게 움직이십시오!”
“으. 으읏.”
“힘들어도 손에서 검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실전에선 적이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허억. 허억. 히. 힘들어. 알튼 자작. 조금만 쉬고 하면 안 될까?”
“위대한 위르마넨 가문의 후계자께서 벌써 지치시면 어떡합니까?!”
바이스부르크에 있는 위르마넨 가문의 전용 훈련장에서 백발의 노기사가 소년 종자와의 지도 대련을 이어가고 있었다. 소년은 체격은 건장했으나 움직임은 꽤 느릿한 편이었다.
“지금 선조분들께서 도련님을 보시면 한심하게 여기실 겁니다! 곰의 후예답게 자신감 있게 발걸음을 내디십시오!”
“크, 크윽. 그래도 힘들단 말야!”
그 때, 백옥 같은 젊은 여성의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프리드리히. 아버님이 보고 계시잖니. 의젓하게 행동하렴.”
소년 종자, 프리드리히는 물끄러미 고개를 돌려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는 굉장히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내고 있으셨다. 역, 역시 무서운 분이야. 그렇지만 어머니께선 한 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보내고 계셨다.
“너는 할 수 있단다. 프리드리히. 힘을 내렴.”
신뢰가 담긴 어머니의 미소에 프리드리히는 검을 굳게 쥐었다. 그래! 해보는 거야!
“훗. 알튼 자작. 진심으로 갈 테니 각오하시오.”
소년 종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알튼 자작에게 달려들었다. 좋게 평가하자면 최선을 다한 공격이었지만 공격에 미숙함이 묻어나왔다. 그가 평소에 검술 연습을 게을리 하는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자작은 적당히 공격을 받아내며 그의 주인들을 바라보았다. 아델라이데 후작은 평소처럼 적당히 하길 원하는 눈치였으나 기사왕의 눈빛은 아주 험악했다.
‘박살을 내버리게.’
알튼 자작도 기사왕의 생각에 크게 동의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나약했다!
자작은 프리드리히의 어설픈 공격을 휙 피해낸 후 손잡이로 프리드리히의 머리를 후려쳤다.
“으악! 어머니!”
소년 종자는 균형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고 코피를 줄줄 흘렸다. 아델라이데 후작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달려와 그를 끌어안았다.
“프리드리히! 괜찮니!”
“피, 피가 나요! 어머니!”
서로 부둥켜안은 모자를 보며 아르투르는 알튼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평소에도 이런가?’
알튼은 깊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르투르도 깊은 한숨을 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