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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2화 (212/248)

212

“누가 언제 아르투르 놈 때문에 왔다고 했냐? 우리가 필요해서 식량을 챙기러 왔다고 했지. 할프단, 하랄, 어떻게 되어 가냐?”

창고 저 편에서 덩치 큰 북구인 사내 두 명이 얼굴을 들어 올려 힐데군드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곁에는 정신을 잃은 창고지기가 얼굴에 멍이 든 채 널 부러져 있었다.

“기다려봐라. 여긴 지금 생고기가 별로 없단 말이다. 에이, 문명인 놈들 고기를 먹을 줄 모르네.”

“이놈 일어나기 전에 가야되는 거 아냐?”

“걱정 마. 방금 여기 주인이 왔어.”

“그래? 그럼 더 걱정 없이 챙길 수 있겠군!”

아델라이데는 한숨을 쉬었다. 이 무례한 야만인 놈들 같으니라고. 정중히 요청해도 모자랄 걸 강제로 뜯어가? 본때를 보여줘야겠다! 사나운 표정으로 힐데군드를 노려봤다. 알튼 남작이 말했다. 싸움은 기세라고!

“감히…….”

아델라이데는 힐데군드가 자신을 노려본다고 생각했다. 사실 힐데군드 본인은 무슨 말을 하나 싶어 쳐다봤을 뿐이지만.

“……사적인 목적으로 제 재산을 무단반출하시고 계신 겁니다! 도둑질이군요!”

그래! 야만인을 대하면서도 품위를 잃으면 안 된다!

아델라이데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힐데군드는 싱겁다는 표정으로 귀를 후비적댄다.

“왜 호들갑이야? 어제까지만 해도 마음껏 먹으라고 베풀어줬잖아. 게다가 우리가 남이야? 가진 게 많으면 동료에게 베풀 줄도 알아야지.

아델라이데는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 남 맞거든요! 불쾌하니까 친한 척 하지마요! 아무튼 빨리 정리해서 나가라고요! 안 들려요?”

힐데군드도 미간을 좁혔다.

“야. 슬슬 기분 나쁘다? 너랑 내가 어떻게 남이야? 나라고 너 같은 약골이 마음에 드는 줄 아니? 하지만 같은 집단이니까 잘해주려는 거지. 어째 이곳 놈들은 죄다 인심이 없어! 인심이! 떠나가는 길에 선물을 줘도 모자랄망정 도둑질이라고 소리나 질러대고 말이야.”

아델라이데는 비웃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이 나한테 언제 잘해준 적이 있어요? 내 이름이 뭔진 압니까?”

“에델바이스 아니었나?”

“아델라이데거든요!”

“아. 그런가. 아무튼 안 때리고 있잖아. 난 원래 대화할 때 패고 시작하는데 많이 봐주고 있는 거라고. 알아둬.”

“하! 그건 그렇다 치죠. 하지만 대 위르마넨 가문의 계승자인 제가 족보 없는 당신이랑 어떻게 같은 집단이에요?”

힐데군드는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르냐는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너, 나, 아르투르. 돈 많은 레무리아 여자가 하나로 묶이고, 여기에 케이랑 카밀라라는 재미없는 놈 추가. 거기에 레오폴트도 우리 식구고. 두라노 애들도 아르투르랑 유대가 있으니 껴줘야겠지. 이렇게 한 집단이라고 부를만한 거 아닌가? 이유야 어쨌건 아르투르 중심으로 뭉친 아르투르네 대가족이라고.”

아델라이데는 도무지 상상도 못해본 인식에 망연해졌다. 지금 이 여자는 자기가 북구 설원 어딘가의 동굴에 있다고 생각하나보다. 가족이란 그런 게 아냐!

“뭘 그리 황당한 표정이야. 케이한테 다 들었다고. 너도 아르투르에게 빚진 게 많고 그 녀석을 좋아해서 여태 결혼 안한 거라메? 그러면 너도 아르투르네 소속이지. 같은 부족끼리 왜 그렇게 못마땅하게 구냐? 마음에 안 들어도 어지간하면 괜찮아하는 척이라도 해.”

아델라이데는 까득 이를 갈았다. 지금 이 년이 나를 능멸하고 있었다. 기사들을 불러다가 이 이교도의 혀를 뽑아버리고 싶은 충동이 가득했다! 알튼 남작이라면 이 야만인의 머리를 자기에게 가져다주리라!

…………

은퇴할 날도 얼마 안 남은 알튼을 죽으라고 내던질 순 없지. 일단 분부터 삭혀야했다. 그래. 아델라이데.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기분 나쁘니까 그만 꼬라봐. 부족 서열 최하위 주제에 왜 그렇게 나대냐. 위아래도 몰라? 떠나는 마당에 기분 좆같이 만들려고 작정한 거지? 웃어. 웃으라고. 표정이 그 따위야?”

아델라이데는 마지막 이성의 끈이 끊기는 걸 느꼈다. 이런 도발에 응전하지 않는다면 위르마넨 가문의 가주라고 할 수 없었다!

“너 때문이잖아! 이 추잡하고 더러운 야만인 년아!”

소녀 영주는 힐데군드에게 달라들어 머리채를 꽉 쥐었다. 오늘 이 년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고야 말겠다! 곰의 포효를 들어라!

***

“죄송합니다. 언니.”

아델라이데는 불쌍한 표정으로 힐데군드를 올려다보며 허공에서 허우적댔다. 그녀는 식량 창고의 벽에 거꾸로 걸려있는 채였다.

“그러니까 아르투르가 나만 총애하는 것 같아서 질투가 났다?”

힐데군드는 바닥에 앉아 아델라이데와 눈길을 마주친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네에에…… 그, 그런 이유였어요. 같은 여자로서 너그러이 이해해주실 수 있죠?”

힐데군드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이해가 안 가.”

아델라이데는 이 년이 무슨 꼽을 더 주려나 싶어 상대의 표정을 바라보았지만……상대는 진심으로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가만. 우두머리의 자리가 탐나는 거냐? 꿈 깨라. 넌 아르투르 절대 못 이겨.”

“아니, 왜 그게 그렇게 되나요.”

“아르투르를 독점하길 원한다는 거 아냐. 그건 우두머리만 할 수 있는 거지.”

“아니죠! 모름지기 사랑이란 한 사람과 나누는 것으로…….”

“뭐래. 그랬다가 가족 하나 죽으면 대가 끊기는 거냐? 그러면 안 되지. 우두머리가 배우자를 여럿 거느리는 이유잖아. 이곳 왕들도 말로만 안 한다 그러고 다 하더만. 아르투르도 그렇잖아?”

“전 지금 영원한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사랑이 영원할 수가 있나?”

“…………전 그렇게 믿어요.”

힐데군드는 낯선 개념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 애네. 아르투르는 항상 목숨 내놓고 다니는 거 알지? 언제 뒈져도 안 이상해. 그놈 뒈지면 어쩔건데? 영원한 사랑 도 끝?”

“그러면 상복을 입고 평생 추모하며 지내겠어요. 당연한 거죠. 사랑이란 건 그런거에요.”

“그럼 시체랑 하는 거냐? 으. 그건 좀 드러운데.”

아델라이데는 화들짝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거랑 사랑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너 좀 이상한 애구나?”

“당신이 문란하고 지조가 없는 거죠.”

힐데군드는 이번에는 흥미가 돋은 표정으로 아델라이데를 바라봤다. 결국 그녀는 천장에 묶인 소녀 백작의 발을 풀어주었고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흐응. 못 들어본 이야기라서 흥미가 가네. 좀 설명해봐라.”

결국 아델라이데는 침을 튀기며 자신이 왜 아르투르에게 빠져들었는지, 왜 자신이 그에게 가장 적합한 상대인지 열변을 토했다. 자신이 어떻게 아르투르에게 구원 받았고 반해버렸는지 세세히 설명했다. 그 뒤에는 자신이 아르투르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걸 강조했고. 결혼도 그와만 하겠다고 맹세한 것도 설명했다.

“이제 제가 왜 당신보다 폐하의 곁에 있기 적절한 사람인지 아시겠죠? 우연히 만나서 어쩌다가 같이 싸우다보니 정이 든 당신과는 전혀 다르다는 말이에요.”

아델라이데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지만 힐데군드는 별 감흥이 없었다. 왜냐면.

“나한테 말해서 뭐하게? 난 이제 볼 일 마치고 떠나는 사람인데.”

“네? 언니가 간다고요? 어디로요?”

“이 동네 질려서 딴 데 가려고. 아르투르 보고 같이 가쟀는데 싫데. 그럼 혼자 가야지.”

“…….”

아델라이데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그래. 솔직히 이 야만인 여자가 폐하와 어울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폐하는 투사의 혼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었고 하루의 대부분을 특정한 종류의 싸움을 생각하며 지냈다. 일어나면 칼부터 휘둘렀고, 자기 전에는 군사 전략을 구상하시는 분이었다. 그런 거친 세계에 진정으로 공감하고 도와줄 수 있는 여자는 세상에서 이 야만인이 유일할 지도 몰랐다.

그런데 이길 수 없는 강적이 그냥 제 발로 사라져준다니! 이건 주님이 주신 기회다!

“근데 너 아르투르랑 결혼은 못하는 거 아냐? 걔 이미 부인 있잖아. 중혼은 여기서 금지인 걸로 아는데.”

새롭게 의욕이 샘솟던 소녀 백작은 단숨에 풀이 죽었다. 아델라이데는 고개를 푹 수그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역시 마음만 가지고는 안 되는 건가 봐요…….”

힐데군드는 눈물을 글썽이는 아델라이데가 왠지 불쌍하게 느껴졌다. 조금은 도와줄까? 그래. 연회도 베풀어주고 식량도 한 가득 챙겨줬는데 보답은 해야 도리지!

“그런데 결혼을 해야만 아르투르의 사랑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잖아?”

“하지만 이미 가정이 있으신 거잖아요. 저렇게 엄격한 분이 제게 눈길을 주시겠어요? 언니야 결혼 전부터 연인이었으니 그렇다 쳐도…….”

“걔 이미 딸도 있는데?”

아델라이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네?!!?! 폐하가 애아빠라고요?!”

“뭘 놀래. 나부터가 걔랑 결혼 같은 거 한 적 없는데.”

힐데군드는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힐데군드가 볼 때 이 소녀는 꽃밭에서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리고 걔. 자기 명예만 신경 쓰지 의외로 도덕이나 규칙은 신경 안 쓰는 놈이야. 자기가 믿는 가치는 지독할 정도로 철저하게 지키지만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는 녀석이라고.”

“……하지만 부인과 아주 사이가 좋아 보이시던데요. 왕비로서 완벽한 사람이잖아요. 솔직히 파고들 엄두가 안 난단 말이에요. 볼 때마다 저만 화나면서 좌절하는 거죠.”

힐데군드는 의아한 목소리로 답했다.

“엥? 무슨 소리야? 이틀 전에 걔랑 술 마시면서 한 대화 내용 절반이 부인이 벌써부터 정치질하고 있다는 뒷담이었고 나머지 절반이 자기 좋다는 여자들이 늘어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야기였어.”

아델라이데는 아르투르에 대한 환상이 깨지는 걸 막기 위해 머릿속으로 여러 자기 합리화를 했다. 폐하께선 다 이유가 있으실 것이다. 악독한 왕비에게 시달리다보니 마음에 여유가 없으실 수도 있고……아무튼 그냥 바람둥이인건 아니실 거야!

“에이,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러면 제게도 응답을 해주셨겠죠.”

“아. 맞다. 니 이야기도 나왔거든. 그런데 넌 자기 봉신이라서 부담스럽다고 하더라고. 정치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나, 뭐라나.”

이제 아델라이데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거짓말입니다! 폐하가 그러실 리가 없어요!”

힐데군드는 슬슬 그녀의 반응이 재밌어졌다.

“영원한 사랑 같은 거 원하면 딴 놈 찾아봐. 낄낄낄. 그래도 네가 원할지도 몰라 충고해주자면 말이야. 그놈 엄마에 대한 향수가 있더라. 아마 위로에 약할테니 그걸 노려봐.”

아델라이데가 질색이란 표정을 짓는다.

“……그건 싫어요. 제가 당신의 대용품이 되는 거잖아요.”

“무슨 개소리람. 내가 왜 그놈을 위로해줘?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알아서 극복해야지. 짧은 인생이야. 몸이 썩어 들어가기 전에 즐겁게 살기도 바쁜데 우울한 이야기한다고 뭐가 변하냐?”

이야기를 마친 힐데군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미 할프단과 하랄은 가죽 부대에 음식을 가득 담아 출발한 준비를 마친 뒤였다.

“이 이야기로 빵값은 해줬으니 난리치지 마. 나는 갈 테니 원하는 건 뭐든지 해보셔. 답답하게 살지 말고!”

소녀 백작은 멀어져가는 백발의 여전사를 보며 기묘한 감정이 들었다. 저 자는 누군가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기댈 수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자신과는 우연히 만난 사람에 불과했다.

그래! 다른 건 몰라도 왕의 마음만큼은 자신이 얻고야 말리라. 그녀는 전의를 불태우며 자신감을 가졌다. 언젠가 왕께서도 분명히 자신을 돌아봐줄 시간이 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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