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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1화 (211/248)

211

불길이 장작더미를 불태우며 토르스탄을 집어삼킬 쯤, 뒤편에서 나뭇가지가 부스럭거렸다. 무장을 마친 기사왕이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북구인 전사들이 일제히 시선을 보냈다.

“어려운 일을 해주었군. 고생했네.”

생각에 빠져있던 군나르는 평상시의 무감정한 태도로 돌아갔다.

“오히려 우리끼리 해결할 수 있게 해준 배려가 고마울 뿐이오.”

아르투르는 토르스탄의 유해가 불길에 휩싸이는 모습을 보았다. 아르투르는 북구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다. 평범한 상인이나 여행자라면 돌려보내도 상관없겠지만 이들은 자신의 곁에 있으며 서부 대륙의 정치, 문화에서 군대에 이르기까지 민감한 정보를 너무 많이 얻었다. 돌아간다면 엄청난 위협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자리에 없는 셋은?”

“할프단과 하랄은 힐데군드를 따라 떠났소. 그녀는 여전히 북방인들의 관습을 따르오. 확실하게 하고 싶다면 추적해서 제거할 것을 권하겠소.”

군나르는 힐데군드가 떠난 숲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르투르가 앞장서면 뒤따르겠다는 뜻이었다.

“왜 힐데군드가 토르스탄과 같이 싸우지 않았지?”

“그녀는 제사장 자리를 버렸고 토르스탄은 그걸 불경하다고 여겼소. 그래서 힐데군드가 먼저 떠난 거요. 동료들끼리 죽이는 걸 피하고 싶었기에. 어쩌면 우리가 개종한 것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소. 아무튼 여전히 그녀는 북구인이오. 어찌 하시겠소?”

아르투르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되었다. 내버려둬라. 어차피 무엇도 그녀를 길들일 순 없다.”

군나르는 의구심에 찬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확신하지 마시오. 힐데군드는 여전히 문명인들을 약하다고 경멸하고 있소. 제사장을 그만둔 거지 스스로의 신앙을 저버린 건 아니오. 그러니 동방으로의 여행이 끝난 뒤에는 고향으로 돌아가 우리의 가장 위험한 적수가 될 수도 있소.”

“혹은 아군이 될 수도 있지. 아니면 그녀만의 인생을 살 수도 있고. 요는 모른다는 거야.”

“왕의 판단이오? 필부의 판단이오?”

군나르는 미간을 좁히며 뚜렷하고 엄격한 눈빛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봤다. 그는 공정한 판단이 맞느냐고 묻고 있었다.

“힐데군드는 지난 몇 년간 크게 변했다. 너희들이 그런 것처럼 말이지. 나중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지는 누구도 모르는 바지. 스스로도 잘 모를 거야. 그러니 왕의 판단이다. 힐데군드가 확실한 위협이라고 여겼으면 내 손으로 처리했을 거다.”

다른 사람이 했다면 용서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스스로 그렇게 되뇌였다.

“당신은 생각보다 심장이 차가운 사내 같소.”

“왕관을 쓴다는 건 그런 의미지.”

아르투르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힐데군드가 남긴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사실 뒤를 따라가고 싶은 열망이 없지 않았다. 실은 들끓고 있었다. 상상 속에서 자신은 방랑기사의 차림으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세상은 넓고 알려지지 않은 곳은 정말 많았다.

마스터를 쓰러뜨리고 큰형님을 굴복시킨 순간에 자신은 이미 정점에 오른 것이었다. 최고의 무력과 권력을 쥐었음에도 그 기쁨은 채 며칠을 가지 않았다. 누구도 가보지 않은 신비의 땅이야말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채워줄 수 있으리라. 불꽃을 내뿜고 피의 마법을 쓴다는 동방의 마술사들과 모래바람 속에 잠든 고대의 영웅왕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정말 흥미로운 삶의 연장일거야.’

세상 어딘가에는 여전히 자신의 향상심을 불러일으킬 강자와 목숨의 위협을 느끼게 해줄 오래된 괴수들도 있을 터이다. 마침 그런 흥미 넘치는 모험을 함께 떠날 수 있는 연인이 있었다. 왕관을 쓸 때까지의 여정은 정말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평화가 도래했다는 걸 실감하자 벌써부터 모든 게 지루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힐데군드가 부러웠고 그녀와 함께 하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떠날 수 있다.

………….

떠날 수 없다. 자신은 이미 대관식에서 신의 정의를 지키고 백성들을 보호하겠다고 맹세를 했다. 이제 통치자로서의 운명은 권리 이상의 사명이었다. 싫건, 좋건 자신은 평생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아르투르는 새삼스레 왕관이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황금관을 벗어 손으로 쥐었다.

일곱 종류의 보석이 박힌 빛나는 황금관이 보였다.

자신이 그토록 바래왔던 왕의 권위였건만 어찌하여 어깨는 무겁고 머릿속은 답답한가?

“힐데군드와 함께 하고 싶은 거라면 남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해보시오. 우리들은 왕이 부인을 여럿 두는 걸 당연하게 여기니 말이오.”

“각자 원하는 걸 가졌는데 그럴 필요 없다. 우리는 우리의 땅으로 돌아가지.

기사왕은 망설임 없이 힐데군드가 떠나간 반대편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나르를 비롯한 북구인 기사들은 아직도 타오르고 있는 옛 형제를 바라보았다. 그들도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했다는 걸 직감했다. 강자의 자유를 보장하던 옛 신들과 달리, 새로운 신은 빡빡하고 엄격한 삶을 요구했다. 지금까지의 삶은 죄로 가득 차 용서를 구해야 할 터이다.

‘나도 우리가 옳은 생각을 한 건지 모르겠네. 옛 형제여.’

군나르는 까마귀 문양이 새겨진 팔찌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토르스탄이 영원한 형제가 되기로 다짐했던 옛 신들 앞에서의 맹세였다. 그러나 팔찌에 장식된 글자는 자신이 죽인 적의 피로 새겨진 것이다. 그는 무심히 팔찌를 풀러 장작 불 속으로 내던졌다. 화마는 군나르의 과거를 집어삼켰다. 다른 기사들도 과거의 유산들을 모두 던져넣었다. 그들은 이제 난폭한 약탈자에서 기사가 되어있었다. 과연 자신들은 과거를 저버린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적어도 새로운 신은 인간의 비명을 요구하는 않았다. 군나르에겐 그것만으로도 자유를 반납할 가치는 충분했다. 기사왕과 첫 근위 기사들은 조용히 숲터를 떠났다. 불길이 타오르는 소리만이 남았다.

***

긴 피로연이 끝나고 제후들은 귀향을 시작했다. 남아있던 이들도 대부분 오늘 아침에 떠나기로 했기 때문에 아델라이데 백작은 환송식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제후들의 행렬이 출발할 때마다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악수를 하고 덕담을 나누며 우호 관계를 다졌다.

마지막 제후가 바이스부르크를 떠났을 때, 아델라이데 백작은 파김치가 되어 집무실에 쓰러져있었다. 몸을 꽉 조이는 드레스를 입고 몇 시간씩 서서 있으려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 피곤해죽겠다.’

녹초가 되어버린 아델라이데는 책상에 쭉 뻗어있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산더미였다. 기사왕이 떠나는 길을 배웅해야 할 준비가 제일 시급했고 그 뒤에는 일주일 간 제후들을 접대하며 소모한 경비를 채워 넣을 궁리를 해야 했다. 하나씩 하자. 하나씩. 일처리를 위해 펜을 든 소녀 백작은 갑자기 머리가 띵해졌다. 너무 피로했다.

‘단 걸 좀 먹으면 나을까?’

백작은 어질어질한 이마를 매만지며 성 지하에 있는 식품 창고로 내려갔다. 그런데 창고지기도 보이지 않고 문은 벌컥 열려있었다.

‘다들 어디로 갔지? 쉬러 갈 거면 문은 잠궜어야지.’

확 짜증이 몰려왔지만 아델라이데는 침착히 그들의 입장을 헤아려봤다. 성 안의 하인들은 사흘 간 거의 쉬지도 맛하고 일했다. 그나마 몸을 챙겨가며 일할 수 있던 자신과 달리 하인들은 그럴 여유도 없었다. 자기가 이해해줘야 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창고에서 단 것을 좀 가져오라고 시키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모두들 굉장히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다크서클이 짙게 눈가까지 내려온 채로 말이다.

‘내가 직접 챙겨야겠네.’

아델라이데는 직접 드레드의 소매를 걷어붙이고 창고로 내려갔다. 백작이나 되는 고위 귀족치고는 드문 행동이었다. 시집 갈 날만 기다리던 소녀 백작은 여러 경험 끝에 꽤 다른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처절할 정도로 배움에 임했으며 덕분에 유능한 영주로 성장했다. 또한 소녀 백작은 아랫사람들의 사랑이 가장 튼튼한 요새라는 아르투르의 말을 본받기 위해 노력했다.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되는 이들에겐 한없는 아량과 자비를 베풀며 성의를 보였다.

오늘날 아델라이데는 영지에서 폭 넓은 지지와 사랑을 받고 있었다. 도적들에게 무력하게 영지를 내주어 원망만 들었던 어린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그녀에 대한 공포 역시하나의 이유였다. 소녀 백작은 충성이 의심되는 이들에겐 극도로 예민하고 잔인했다.

어쨌든 아델라이데는 드레스 밑단을 들어 올리고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에는 음료수를 담은 원통과 말린 고기, 곡물 등을 가득 넣어둔 나무 상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모두 텅 비어있었다. 백작은 둥그런 눈동자로 이리저리 살피다가 설탕 가루가 담긴 자루를 발견했다.

‘그런데 담을 통이 없네?’

……

아델라이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녀는 자루 안으로 손을 한움큼 넣어 설탕 가루를 쥔 후 입안에 쏟아 부었다. 평민조차 체면이 따진다면 안할 짓이었지만! 너무 배가 단 것이 고팠다. 입 안에서 설탕이 잘게 녹아내리며 피로감을 해소해주었다.

‘아. 이거야. 비싸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니까.’

누가 오기 전에 다시 자루 안으로 손을 집어넣을 때였다.

“안녕. 좋은 아침.”

옆에서 들려온 여성의 목소리.

“헉?!”

아델라이데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런 행동을 하필이면 가장 싫어하는 사람 앞에서 들킬 줄이야!

“너, 너, 너, 너, 너는 왜 여, 여기 있느냐.”

힐데군드는 등에 무언가 가득 들어간 자루를 짊어진 채 유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음식 좀 챙기러왔지?”

아델라이데는 힐데군드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이질적이고, 두려운 존재였다. 우선 여성인데도 자신의 늙은 기사장보다 키도 크고 근육도 두터웠다. 설원처럼 새하얀 머릿결과 창백할 정도의 흰 피부는 이질적인 혈통임을 늘 상기시켰다. 거기다가 그녀와 함께 참전했던 기사들이 전하는 바는 아주 무시무시했다.

‘그 북구인 여자 말씀이십니까? 미친 광전사입니다. 홀로 적진으로 들어가서 한 바탕 휘젓고 다니면 적과 자신의 피가 뒤얽힌 피범벅이 되는데 그때마다 환히 웃고 있더군요.’

‘영주님. 제발 그 여자랑 얽히지 마십쇼. 그 여자는 귀신입니다. 귀신. 이름난 기사들의 목도 줄줄이 날려버린다고요. 북구인들은 우리와는 종이 달라요. 종이! 제발 가까이 가지 마십쇼.’

아델라이데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렇지만 할말은 할 거야! 나는 위대한 흑곰의 후예, 위르마넨 가문의 아델라이데라고!

“제 말은…… 폐하의 호위병이 왜 이른 아침부터 식품 창고에 있냐는 겁니다. 폐하께는 전속 시종이 있어서 굳이 직접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텐데요.”

아델라이데는 침착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고 힐데군드를 당당히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게 난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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