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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10화 (210/248)

210

“그렇다면 우리에게 했던 말은 전부 거짓이었던 거냐?”

도끼를 쥔 토르스탄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갔고 얼굴에는 핏대가 올라섰다. 그러나 힐데군드는 여전히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토르스탄. 지난 몇 년간 우리가 얼마나 즐겁게 살아왔는지 생각해봐. 전투도 수백 번은 치렀고 평생 볼 일 없던 사람들도 가득 봤잖아. 이제 모두 스스로에게 솔직해져보라고. 어느 때부턴가 우린 초기의 목적 따윈 잊어버렸어. 이곳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에게 정중했고 그렇지 않은 놈들은 모두 죽여줬지. 고분고분한 문명인 계집들 데리고 노느라 헤벌쭉하던 놈들이 이제 와서 왜 신들에게 모든 걸 바칠 듯이 말해? 우린 지난 몇 년간 우리답게 살았어. 그게 중요한 것 아닌가?”

힐데군드에게 시선을 보내던 동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모두 헤진 가죽 옷을 입고 나와 부드러운 비단옷과 희귀한 보석으로 온 몸을 두르고 있었다. 고향의 대족장들이 목숨을 걸고 약탈해온 재물들은 자신들이 돈을 받고 싸워주며 쌓아올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토르스탄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지 곰 같은 손으로 머리를 긁적인다.

“크흠. 그렇긴 하지. 하지만 넌 제사장이니 진실을 말했어야 하잖아. 어찌 되었든 이제 우리 모두가 신들의 분노에 직면하게 된 것 아닌가? 이건 어떻게 해결할 거지?”

힐데군드는 검집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야. 아직도 모르겠어? 세상에 진실은 하나 뿐이야. 우리 인생은 우리 것이고 삶은 짧으니 항상 즐겨야지. 방금 전한 것이 내가 전하는 마지막 신탁이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 신들의 전령 노릇도 그만하겠어.”

그녀는 머리에 쓰고 두르고 있던 붉은 띠를 거칠게 푸른 후 양손으로 잡아 갈기갈기 찢었다. 신성한 제사장의 상징이 천쪼가리가 변해버린 모습을 보며 많은 일행들이 입을 벌리며 경악했다. 하지만 힐데군드는 시원한 듯 웃어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세상의 동쪽으로 갈수록 많은 문명들이 있다고 한다. 그 너머에는 세상의 끝자락이 있다고 해. 나는 그걸 보고 싶다. 함께 하고 싶은 놈은 따라와라.”

그녀는 일행을 남겨둔 채 뒤로 돌아섰다. 동료들은 찢어진 머리띠와 힐데군드의 등 뒤를 번갈아보며 번민했다. 두 사람의 동료가 옛 제사장의 뒤를 따랐다. 각자 모험심과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열정 때문이었다. 세 명이 떠나자 여섯 명이 남았다. 토르스탄은 떠나가는 힐데군드를 보며 수염을 쓰다듬는다.

“신들의 은총을 받은 자가 의무를 저버리다니 불경한 짓이다.”

“지금이라도 가서 죽일까?”

“됐어. 어차피 그 정도론 풀리지도 않겠지만 제사장에 대한 심판은 신들께서 직접 하실 일이다. 하여간 신탁이 아니었어도 어차피 돌아가야 했어. 동포들에게 문명인들이 결집하고 있다고 전해야 한다. 그들의 통합이 완료되기 전에 지금 쳐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종말의 선고자께서 손수 문명을 멸하기 위해 깨어나실 거다.”

북구인들은 예언을 상기하며 몸을 떨었다. 최후의 용이 깨어나 영원한 겨울이 닥치는 일은 그들에게도 두려운 일이었다. 토르스탄과 그의 친구들은 남쪽으로 여행을 떠나며 힐데군드와는 다른 목표를 세웠었다. 지난 전쟁의 패전은 적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 그렇다면 이번에는 그들의 내부로 들어가 관찰하고 전해야했다.

“놈들끼리 싸우면서 가장 강력한 적이 될 수 있던 놈들이 모조리 죽었어. 데른 강의 붉은 학살자도, 정복자 왕과 그의 기사들도 없다. 아르투르 한 명이라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을 거야. 특히 지금은 놈들이 평화가 온 줄 알고 취해있어. 기습하기에 제격인 시간이다. 놈들이 가진 모든 걸 빼앗고 복수할 시간이 다가온거다!”

토르스탄은 주먹을 꽝 치며 주변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예기치 못한 대답.

“토르스탄. 너는 정말로 복수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명사수 군나르가 물끄러미 토르스탄을 올려다본다. 거의 말수가 없는 그가 이야기를 할 때는 매우 진지한 안건을 꺼낼 때 뿐이었다.

“하. 겁먹었나? 그건 싸워봐야 아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건 가능하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야. 이건 반드시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우리는 신들의 자손이다! 그림니르로서 신들의 부름에 응해 동포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말해보아라! 어서!”

토르스탄은 당연히 군나르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리라 예상했다. 문명인들은 북구인들이 두려움을 모른다고 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더 큰 두려움을 알기에 일반적인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우습게 여길 뿐이었다.

“왕에 대한 의무.”

토르스탄은 말을 잘못 들었나 싶어 눈을 껌뻑였다. 지금 북구인들 사이에 왕을 칭하며 싸우는 자들은 많았지만 누구도 군나르가 복종할 만한 그릇은 아니었다. 그는 농담을 던질 사내도 아니었다.

“무슨 왕?”

“기사왕 아르투르 말이다.”

“???”

“나는 어젯밤 기사왕에게 무릎을 꿇고 충성을 맹세했다. 나는 그의 첫 번째 왕실 기사가 되었고 그분의 신앙을 따라 발타리아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마침 교황이 곁에 있어 세례를 주었지. 나는 이제 옛 신들을 따르지 않는다. 토르스탄.”

군나르는 무미건조한 사실을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하면서, 목에 걸고 있던 금으로 된 십자가 목걸이를 들어보였다. 토르스탄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 군나르는 신들의 독실한 추종자였고 자신과는 평생을 함께 하기로 피로 맹세한 자였다. 믿었던 만큼 배신감은 컸다.

“허허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허. 허허허허허허허. 제사장은 직분을 버리고 도망가더니 이제는 네가 거짓된 신을 섬기고 문명인들의 왕에게 무릎을 꿇어? 종말이 다가오는 게야! 미쳤군! 미쳤어! 대체 뭐가 널 홀리게 한거냐! 너는 조상들을 저버리는 패륜을 저질렀고 네가 섬겨온 신들을 모독한 것이다!”

격한 토르스탄과 달리 군나르는 어떤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토르스탄. 너도 진실을 직시할 때가 되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던 조상들은 살인자와 강간마에 불과한 자들이었고 우리가 섬겨온 신들은 산제물에 굶주린 망령들이다. 기사왕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했나. 그와 우리는 싸움 속에서 삶의 의의를 찾아가는 우리와 동류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약자들을 보호하고 호의에 답하더군. 우리와는 다르게.”

“이 미친 자야! 네놈은 그림니르야! 우린 저 열등한 놈들과 다르다고! 우린 용들의 후예야! 강자가 약자를 잡아먹는 것이 신들이 정한 자연의 섭리다! 그걸 거스르려는 행동은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뿐이다.”

여태껏 고요하던 군나르는 북받친 목소리로 소리를 높였다.

“피에 굶주린 신들이 우리의 귀에 그렇게 속삭인 거다! 동포, 동포라고 했느냐? 우리가 정말로 동포라면 왜 서로에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었나? 우리는 형제들의 살을 먹고 누이들의 비명을 즐겼던 거야! 그런데 우린 그게 죄인지도 몰랐다! 우리의 삶은 야생의 짐승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다고! 우린 사람이야!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사람! 우리의 모든 건 잘못 되었던 거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해! 아르투르 왕이 그 길을 보여 줄 거다!”

실없이 웃고만 있던 얼굴이 분노로 달아오르며 토르스탄은 도끼 자루를 쥔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이 따위 신성모독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죽음을 애원하게 될 거다. 군나르! 산 채로 네 간을 썰어먹고 창자를 잘라버릴 테다. 죽은 뒤엔 해골을 잘라 술잔으로 삼고 시체는 똥통에 던져버리겠다.”

곧장 군나르를 향해 도끼가 날아들었다. 그는 날렵하게 공중제비를 돌며 피했지만 토르스탄은 거구답지 않은 민첩함으로 달려들어 그에게 부딪쳤다. 군나르도 어디 가서 힘에 밀리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토르스탄은 맨 손으로 곰을 찢어 죽이는 전사였다.

“으으윽!”

“하!”

군나르가 순식간에 바닥을 나뒹굴었고 토르스탄은 육중한 발을 그의 목에 향해 내리찍었다. 군나르는 몸부림을 치며 벗어나려 했지만 산이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에 움직이지 못했다. 그 사이 다른 그림니르들이 무기를 뽑고 다가왔다.

“좋아. 끝장을 내버려!”

푸욱 - !

칼날이 토르스탄의 등 뒤를 파고들었다. 워낙 튼튼하고 밀도 있는 근육질의 몸이라 치명상은 피했지만 고통으로 잠시 몸이 휘청였다. 다른 전사들도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각각 토르스탄의 급소를 찔렀다. 그의 목과 허리, 가슴, 아랫배를 전부 차가운 강철이 파고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 이 구더기 같은 배신자 놈들아!”

토르스탄은 고함을 내지르면서 광기에 몸에 내맡겼다. 그는 괴력을 발휘해 자신을 찌른 전사의 안면에 주먹을 꽂아 함몰시켜버리고 다른 자는 걷어차서 날려버렸다. 그는 연이어 굉장한 힘과 속도로 양손 도끼를 쉬지 않고 휘둘렀으나 상대는 굉장히 노련한 전사들이었다. 그들은 적당히 막고 피하며 토르스탄이 힘이 빠지기만을 기다렸고 이따금 수적인 우세를 이용해 자잘한 상처를 늘려나갔다.

토르스탄은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을 체력을 발휘하며 버텼지만 점점 힘이 빠지며 행동이 느려졌다. 그의 동작이 굼떠지기 무섭게 군나르의 화살이 토르스탄의 눈동자를 꿰뚫고 들어갔다.

“크아아아!”

직립한 곰 같이 버티고 있던 전사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는 아직도 버티고 있었지만 주변으로 다른 전사들이 다가왔다. 거세게 도끼를 휘둘렀지만 허공을 휘저을 뿐인 헛된 저항이었다.

“미안하다. 토르스탄. 나는 이곳에 가족이 생겼다. 네가 고향 사람들을 불러와 그들을 해치는 걸 볼 수는 없어.”

한 전사가 다가와 그의 등 뒤에 칼날을 박는다. 곰은 상처 속에서 포효하지만 이미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여기선 씨앗만 뿌려도 먹을 게 생기던데. 매일 같이 눈보라 속으로 사냥을 떠나던 삶은 질렸어. 마침 아르투르가 우리의 수고에 대한 대가로 큰 땅을 내려준다고 했어. 정착할 기회야.”

두 번째 사내가 그의 목덜미에 칼을 꽂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모든 걸 빼앗아도 된다고 가르치던 자들을 신들이라고 말할 수 있었나? 발타리아께선 정의와 사랑을 가르치셨지. 그분이야말로 유일한 신이시네. 이제 작별이군.”

동료들은 토르스탄을 제압하기 위해 쉼 없이 공격을 가했다. 그의 몸 곳곳은 난자당하다가 결국 군나르의 화살이 토르스탄의 머리에 직격했다. 토르스탄은 두개골이 쪼개지는 상황에서도 투쟁했지만 결국 옆으로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현존하는 북구 최강의 전사는 자기가 가장 믿었던 이들의 손에 죽었다. 그의 옛 동료들은 성호를 그어 옛 형제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고 장례만큼은 고향의 방식으로 치러주었다. 숲 한가운데에 장작이 가득 쌓이고 불길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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