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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09화 (209/248)

209

다음 차례로는 카밀이 불려나왔다. 아르투르는 호의 어린 미소로 그를 대했다.

“카밀. 어서 오게. 그대는 항상 짐에게 진실한 조언을 해주었지. 앞으로도 계속 그런 역할로 남아주길 바란다. 지금까지 고생한 걸 모두 한 번에 보상하겠네. 그대에게는 자작 작위를 내리고 왕의 판결을 집행할 사법관으로 임명하겠다. 무릎을 꿇게나.”

카밀을 자작으로 봉한다는 말에 사람들이 웅성였다. 신분에 따른 차별이 당연히 여겨지는 세상이었다. 그런 곳에서 옛 주인을 살해한 농노를 영주로 임명하겠다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품었다. 특히 이런 사람에게 법을 집행하는 사법관으로 임명하겠다는 말은 굉장히 위험한 발상으로까지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놀라긴 아직 일렀다.

“국왕 폐하의 변함 없는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왕의 사법관이 되어 큰 영광입니다. 공정한 법의 집행을 요구하신 점에 반드시 부응하겠습니다. 하지만 귀족 작위는 물러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한 뼘의 땅도, 한 사람의 농노도 거느릴 생각이 없습니다.”

아르투르는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여론의 반발까지 감수하고 평민 출신 측근들에게 영지를 주려는덴 정치적인 고려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점을 모조리 무시하고 자기가 싫다며 영주가 되길 거부하니 크게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남작 작위 하나 따려고 온갖 고생을 하는 귀족 젊은이들이 많은데 평민이 자작 작위를 거절하는 건 유래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제 목숨은 여태까지 그랬듯 국왕 폐하의 것입니다. 여벌의 목숨으로 살고 있을 뿐이니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귀족 작위만큼은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본의 아니게 권위가 떨어진 상황. 아르투르는 조금 신경질적인 태도로 말했다.

“사법관으로 일하려면 귀족들도 마주해야 할텐데. 평민의 신분으로 그럴 수 있겠나? 어려움이 많을 게다.”

“임무에는 오히려 도움이 될 것입니다. 평민 사법관은 귀족 사법관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르투르의 곁에 있는 왕비는 카밀을 매섭게 째려보았다. 그러나 카밀은 왕국 2인자의 압력에도 떳떳히 고개를 세우며 당당하게 버텼다. 아르투르는 결국 한숨을 쉬며 샤를로트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논공행상에 참여한 자들은 귀족이거나 귀족이 될 자들. 모두 카밀을 못마땅하게 보며 무를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지만 아르투르는 생각이 달랐다.

‘일단 임명하고, 문제가 되면 그 때 다시 생각해보면 될 일이다. 카밀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원한다면 그렇게 하게. 작위를 강제로 줄 수는 없는 법이지. 대신 연금을 내려주겠네. 자네는 왕의 대신으로서 품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어. 왕궁에선 격식을 제대로 갖추도록.”

“사려 깊은 조치에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카밀은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꿋꿋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뒤로도 전쟁에서 크고 작은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포상이 뒤따랐다. 우선 극심한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버틴 피오렌치아와 두라노에는 상당한 기간의 면세 혜택이 주어졌다. 승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랑트리뷔아체 공화국과는 서로 약속한 바를 이행했다.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의 시민들이 폐하와 폐하의 후계자들에게 충성을 바칩니다.”

원수를 대신해서 온 도리에론 가문의 젊은 후계자는 무릎을 꿇고 충성 맹세를 거행했다. 뒤이은 여러 절차들이 끝난 후 그는 아르투르와 별도의 회담을 가졌다.

“이제부터 자네들의 수장은 왕국 내에서 대공(Prince)으로서 대우 받게 될거야. 선출이야 자네들이 알아서 하는거고. 직접적인 반역 행위만 아니면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좋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여주신 점에 감사 드립니다. 폐하.”

랑트리뷔아체 공화국이 잃은 건 명목상으로 종속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르투르도 어쨌든 레무리아 전체를 자신의 강역이라고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서로 아쉬운 점이 있지만 납득할 수 있는 거래라고 평가할 만 했다.

“그런데 말이야. 원군을 보내주기로 해놓고 보낼 생각이 없었거나 반대편에 가담하려고 했다면 그건 반역인가?”

하지만 아르투르는 급속히 태도를 바꾸어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조화롭던 방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지…….”

아르투르는 살벌한 눈빛을 쏘아냈고 상대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벽에 부딪쳤다.

“자넨 아버지만큼 노련하지 않으니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들이 큰형님과의 전투에서 아슬아슬하게 도착했던 일을 내가 잊을 줄 알았나? 도로 사정도 좋았고 병력들은 아주 활력도 넘치던데 말이야. 조금만 강행군 했으면 제때 도착할 수 있던 부대였다네.”

“……그건…….”

아르투르는 눈가를 모으며 상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네 거짓말은 티가 난다니까. 이기는 쪽에 붙으려는 심산이었겠지. 뻔해. 너희 입장에서 어느 쪽이라고 마음에 들었겠어? 심정적으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충분히 반역 의도로 몰아갈 수도 있지.”

왕의 살벌한 말에 등 뒤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요새 기사왕은 절대 약속을 깨지 않는다거나 악의적인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소문이 돌더군. 모두 지켜왔다곤 할 순 없지만 짐이 지향해온 바는 맞다네. 하지만 자꾸 그 정직하려는 노력을 이용하려는 놈들이 생기는 놈들이 자주 보인다고. 이중 약속을 하거나 조약의 구절 하나로 장난치는 건 짐도 할 줄 아는 일이네. 단지 그러면 서로 피곤해지니까 안 그럴 뿐이야. 의원. 돌아가서 부친께 전해라. 짐은 랑트리뷔아체가 신의 있는 상대인지계속 평가해보고 있다고.”

“해주신 말씀을 남김없이 전하겠습니다.”

“좋아. 가보게.”

랑트리뷔아체에 대한 포상과 경고를 마지막으로 논공행상은 종료되었다. 이제 대륙의 모든 이들은 새로운 시대가 찾아온 걸 실감했다. 페르넬 대왕이 죽은 이후 모두가 불안에 떨던 시대는 끝났다. 질서가 돌아왔음을 깨달은 사람들은 밤새 축제를 즐기고 흥청망청 마셔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항상 연회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던 북구인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바이스부르크의 성 밖, 조용한 숲 속에 모여 있었다.

“하나. 둘. 셋. 넷……여덟… 좋아. 전부 모였네.”

힐데군드가 북구인들을 모두 불러 모은 것이었다. 지금 그녀는 제사장의 상징인 붉은 머리띠를 쓰고 있었다. 북구 문화에서 제사장은 오직 신들에게 바치는 제사를 거행하거나 자신의 신분을 드러냈다. 참석자들은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평소의 유쾌하고 충동적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탁이 내려왔다.”

제사장의 말에 모두의 눈썹이 곤두섰다. 북구인들은 스스로를 용들의 자손이라고 믿었다. 그들의 땅엔 아직 신비가 가득했기에 신들은 그들의 삶의 일부였다.

“어젯밤, 꿈속에서 나는 끝나지 않는 눈보라 속을 걷고 있었다. 마침내 지쳐 쓰러질 때 쯤, 베오릭이 나타나 내게 용의 언어로 전하더군. 불신자들에게 참된 신들의 가르침을 전하려는 너희들의 시도는 실패했으니 모두 돌아오라고 했다.”

힐데군드의 말에 이 자리에 있던 모두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걸 느꼈다. 베오릭은 자신들이 남부로 떠나올 때 갑자기 나타나 합류했는데, 그들 중에 모든 면에서 독보적으로 뛰어나 순식간에 그들의 지도자가 된 인물이었다. 이곳에 모인 모두가 북구 기준으로도 손꼽히는 전사들이었으나 베오릭은 그들을 어린애 다루듯 제압할 수 있던 사내였다. 그가 악마를 해치운 뒤 홀연히 사라졌을 때, 모두가 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음을 어림풋이 짐작했다. 감히 입에 담지 않았을 뿐이다.

“…………역시 베오릭은 신의 화신이었나.”

토르스탄은 신음을 내뱉으며 중얼거렸고 힐데군드는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그 정도로 강력한 화신을 내보낼 수 있는 건 살아있는 신 뿐이지.”

다시 적막이 감돌았다. 살아있는 신은 단 하나, 종말의 선고자 뿐이었다. 최후의 용이 깨어나면 세상은 영원한 겨울 속으로 파묻힐 것이며 죽은 자들이 돌아오게 되리라. 그러니 그 두려운 신의 이름을 함부로 담아서는 안됐다. 인간들이 그의 이름을 속삭일 때마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이 가까워질 것이다.

“그가 우리 전부를 부른 게 확실한가? 애초에 선교는 네 목표였잖아. 나머지 일행은 목적이 모두 달랐던 것이고.”

토르스탄은 종말의 선고자가 자신을 불렀다는 이야기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나 뿐만이 아니다. 너희 여덟의 이름을 모두 정확히 전했어.”

모든 이들은 다시 침묵을 지키자 섬뜩한 고요함이 그들을 찾아왔다.

“선교의 실패를 문책하려는 거지! 네 게으름이 우리 모두를 위험에 처하게 한거다! 이를 어떻게 책임 질거냐?”

두려움을 모르던 토르스탄은 다급함을 드러내며 힐데군드를 성난 목소리로 비난했다. 그녀도 지지 않고 으르렁거렸다.

“겁난 개처럼 짖어대지 마라. 토르스탄. 혀를 뽑아버리고 싶어지니까.”

두 사람은 즉각 도끼에 손을 올렸다. 바로 날아들지 않은 건 사제가 신언을 전하는 동안은 싸우지 않는다는 그들의 관습 때문이었다. 신들이 정한 금기를 어기는 자는 종말의 때에 부활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토르스탄의 분노는 잦아들지 않았다.

“제사장! 네가 우리를 불러 모으며 했던 말을 떠올려라! 불신자들에게 참된 신들의 가르침을 뜻을 전해 스스로 문명을 포기하게 만들면 종말의 시간이 멀어질 거라고 주장했던 건 너다! 우리의 목표는 불신자들의 왕들을 구슬려 진정한 신앙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과를 봐라. 네 말대로 아르투르를 도왔더니 그놈은 오히려 문명 세계를 굳건하게 결속시켰어. 말해봐라. 이제 놈과 놈의 부하들에게 어떻게 거짓 신을 저버리게 할 테냐? 말해봐라!”

힐데군드는 갸웃한 표정을 지으며 다른 일행들의 반응을 살폈다. 극적인 분노를 표출하는데 토르스탄과 달리 나머지는 쉽게 의중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대로 일행들은 문명인들의 사회에 지나치게 오래 머물렀고 무언가가 변해있었다. 단지 용감무쌍한 토르스탄만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할 따름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모두 공포에 떠는 건 똑같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어떤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 진지한 표정을 보며 힐데군드가 떠올린 생각은……

“너희들, 내가 너희랑 안 자준다고 삐졌구만?”

장난기가 발동한 힐데군드는 깔깔거렸고 몇몇 일행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에이. 짜식들. 그럴 거면 부탁이라도 해보든가. 아니면 덮쳐보든가. 그럴 용기는 없냐?”

몇몇 사람은 정곡을 찔려 기분이 나뿐 듯 했다. 하지만 토르스탄은 벌컥 화를 냈다.

“그 문제는 네가 행한 거짓말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다! 나는 네가 아르투르의 품에 계속 안겨 있는 동안 우리의 신들에 대해 속삭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래 기다려달라고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그놈과 노닥거리기만 할 뿐, 대체 우리가 얻은 게 뭐냐? 오히려 갈수록 네가 그놈에게 동화되고 있잖나!”

“흐응. 역시 너도 아니꼽긴 했나 보네. 말 좀 이쁘게 하지 그랬어? 그럼 한번쯤은 같이 자줄 수도 있었을 텐데.”

토르스탄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도끼를 들어 올렸지만 힐데군드는 그럴수록 흥미가 돋아 깔깔 웃어댔다. 두 사람의 갈등을 멈춘 건 잠자코 지켜보던 명궁 군나르였다. 그는 과묵하지만 무게감 있고 진중한 사내로 통했다.

“둘 다 그만 둬라. 일단 제대로 의견부터 나누는 게 좋겠다.”

군나르가 보내는 따가운 시선에 힐데군드는 웃음을 멈추고 그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아, 알았다니까. 그만 째려봐. 따분한 녀석 같으니라고. 농담도 못하게 만드네. 뭐, 좋아 진실을 말해줄까? 애초부터 선교 계획 따윈 없었어. 평화에 찌들어서 사는 놈들이 미쳤다고 문명의 파괴를 요구하는 우리의 신들을 믿겠어?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믿은 병신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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