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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허으으억! 커허허헉!”
장이 돼지 멱따는 소리가 내뱉는 가운데, 여러 사람들의 다급히 아르투르를 만류해왔다.
“폐하! 폐하! 고정하십시오! 이러시면 안됩니다!”
“폐하! 저흰 방금 평화 조약을 맺었습니다! 고정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아르투르에겐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끓어오른 분노는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웠다. 그래. 이 놈을 반으로 갈라 죽여야겠다. 아르투르는 오른손으로 장의 목덜미를 붙잡고 땅에 내던졌다. 그는 바닥을 구르며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까져나갔다.
“아아아악!”
“다들 뭐하나! 폐하를 말려!”
전사 계급인 귀족들 가운데서도 장사로 유명한 사람들이 달라붙어 아르투르를 잡아끌었지만 기사왕은 기필코야 검집에서 여명을 뽑아들었다.
“이 패륜아 돼지 새끼를 죽여서 마스터의 납골당에 바쳐야겠다!”
“마스터! 그 돼지가 바야르 가문의 마지막 아들이라고요!”
케이의 외침은 아르투르의 정신에 와 닿지 못했다. 아르투르의 손에 검이 들린 걸 본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멀찍이 물러났다. 감히 무기를 든 아르투르의 앞길을 막을 배짱을 지닌 자는 없었다. 지금 왕의 눈에 찍히면 바로 천국행이었다. 다들 발만 구르거나 비명만 지르며 아르투르가 검을 내리치는 걸 속수무책으로 쳐다보았다. 샤를로트도 부채로 얼굴을 가리며 입을 크게 벌렸고 교황은 노인이라 순발력이 떨어졌다. 검로를 가로 막은 건 비교적 작은 체구의 여인이었다.
“폐하! 제발 검을 거둬주세요!”
아르투르에겐 이성적으로 판단할 겨를은 없었다. 하지만 골수 깊숙이 새겨진 기사도의 규율이 손을 멈추었다. 비무장한 여인에 대한 공격은 안 될 말이었다.
“비켜라!”
아르투르의 호통에 아델라이데는 눈을 질끈 감았지만 기어코 비켜서지 않고 양손을 펼쳐 장을 보호했다. 왕의 손에 번득이는 장검이 들려있는 걸 생각하면 아주 용감한 행위였다. 가장 경험 많은 기사들도 두려워하는 것이었으니까.
“저 자 때문이 아니에요! 폐하께서 오명을 쓰시는 일이 없으셔야 한다고요! 주최자로서 부탁드립니다! 제발 멈춰주세요!”
기사왕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손과 발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백작이 시선을 마주 보면서 무언의 애원을 하자, 아르투르는 흥분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아르투르는 여명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고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장을 분노의 눈길로 응시했다.
“지옥에 떨어져 영겁의 세월을 악마에게 고문 받을 바퀴벌레같은 패륜아 새끼야! 너 같은 새끼는 빵 한 조각 먹을 자격이 없으며 산산이 찢어서 쥐새끼들의 먹이로 줘도 모자라지만 평화가 찾아온 날이니 목숨은 살려주겠다! 이 쥐새끼 토사물 같은 쓰레기 놈아! 네가 가진 모든 귀한 것이 네 아버지가 만들어낸 것이다! 백작의 작위와 바야르 가문의 명성이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알려졌을 것 같으냐?! 너는 거기 기생하는 돼지 새끼에 불과하다! 똥이나 처먹는 쓰레기놈아!”
하지만 장은 오히려 아르투르의 얼굴에 삿대질을 하며 악에 받혀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사생아 새끼야! 네가 뭘 알아! 항상 저 늙은이는 자기 친자식보다 너 같은 새끼를 아꼈지! 몇 달에 한번 집에 올 때면 꺼내는 말마다 너와 비교하는 소리뿐이었어! 조금이라도 모자란 게 있으면 매질을 당했지! 그 미친 늙은이는 내가 당연히 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요했다고! 자라면서 아무런 취미도 즐기지 못하게 했단 말이다! 심지어 이웃 가문의 여식과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고 두들겨 맞았어! 검술도 못하는 게 무슨 연애질이냐고! 씨발. 그 노친네는 누구나 노력만 하면 지 같은 인간 도살자가 되는 줄 알았지. 그 노친네가 너야 이뻐 했겠지. 그럴 수 있는 놈이니까. 내게 했던 소리는 늘 똑같았어! 노력이 부족하고 정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밤잠 아껴가며 승마 연습을 했더니 어떻게 된 줄 아나?! 떨어져서 다리병신이 된거야! 씨발! 난 니들처럼 못한다고!”
장의 처절한, 한이 가득한 절규에 아르투르도 잠시 멈칫했다.
“나한테만 그런 줄 아나?! 고운 시절에 노인네한테 시집 와서 고생한 어머니는 항상 찬밥이었지. 병상에서 남편을 찾을 때도 의무가 우선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어. 어머니는 그것도 모르고 노인네만 찾다가 쓸쓸히 죽었다고! 그 미친 놈은 네 아버지겠지! 내 아버지가 아니야! 죽일 테면 죽여 봐라! 사람 죽이는 거 외에는 할 줄 모르는 사생아 새끼야! 기사고 뭐고 니들끼리나 해먹으라고!”
누군가는 그의 외침에 동정심을 느꼈지만 아르투르는 분노가 임계점을 넘어가는 심정이었다. 이미 차분히 가라앉은 두뇌가 아니었다면 장은 아르투르의 손에 사지가 찢겼을 것이다.
“좋아. 공개적인 장소에서 나와 마스터를 그렇게 모독 하셨겠다.”
아르투르가 싸늘한 미소를 짓자 주변의 모든 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홀로 전장터의 신으로 군림하던 모습이 고작 몇 주 전이었다. 제후들은 그 때의 모습을 기억하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방법은 하나. 목숨을 건 결투 뿐이다. 나, 레무리아의 국왕, 아르투르 폰 엘라카릐스는 장 드 바야르에게…….”
“바로 떠날테니 그냥 보내다오.”
곁에서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이스는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간절한 표정을 지은 채 아르투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마지막 남은 내 사람이다. 한 명 정도는 구할 수 있게 해다오. 부탁이다.”
아르투르는 기묘한 쾌감과 씁쓸함이 동시에 들었다. 평생 큰형님은 누군가에게 부탁 따위 해본 적도 없었고 자신에게 아쉬운 표정을 지은 적도 없었다.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을 때 왕비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지금 마무리하셔야만 합니다. 평화 회담의 장소에서 이유가 무엇이건 피가 흐른다면 전 대륙이 저의를 의심할 겁니다.”
왕비의 아르투르에 대한 시선은 강한 추궁에 가까웠다. 왕답게 행동하라는 비판이었으며 질타였다. 아르투르는 모든 분노를 거둬들여 속으로 삭였다. 그래. 그렇지. 그녀의 말이 맞다. 왕답지 않은 일이다. 그는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왕이었다. 개인적인 감정이나 명예만을 쫒기에는 책임 질 것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표정이 일그러지는 건 훈련이 덜 된 탓일까.
“고맙소. 정말 고맙소. 왕비. 어찌나 현명하신지 단 한 번도 틀린 말을 안 하시는 군.”
아르투르는 냉소를 지어 불쾌한 기분을 드러냈다.
“대왕께서 원하신다면 그리 해야지요.”
기사왕은 루이스와 시선을 잠깐 마주친 뒤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빠져나갔다. 아르투르가 떠난 걸 확인하고 나서야 루이스는 다가가 장을 직접 일으켜 세웠다.
“폐하. 모두가 지켜보는데 패륜아를 챙기시면 어떡합니까…….”
“아닐세. 짐은 자네를 이해하네. 괜찮아.”
몰락한 대왕과 발을 저는 무가의 패륜아는, 경멸과 멸시를 한 몸에 받으며 빠져나갔다. 특히 바야르를 존경하던 이들은 매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와서 칼부림이 벌어질 뻔 하기도 했다. 루이스의 어머니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뒤따라나갔고 그들이 떠나고 나서야 모든 제후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 모든 광경을 지붕에 앉아 관람하던 힐데군드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왜 안 싸우는데! 아르투르 쫄보 새끼! 모욕이 오갔으면 누구 하난 죽었어야지!”
케이는 조심스레 바야르의 유해를 수습해 새로운 유골함에 담았다. 연회장은 그들이 원래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원래대로 돌아갔다.
이 사건 뒤로 장 드 바야르는 루이스를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를 잃었다. 고매한 옛 주인을 존경하던 하인들마저 그를 냉대했으며 바야르 가문의 봉신들은 면전에서 그를 절름발이 주군이라며 비웃었다. 결국 장 드 바야르는 아버지의 발톱 때만도 못한 하찮은 패륜아로 남았으며 그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져버렸다.
반면 기사 중의 기사, 마스터 나이트 테라일 드 바야르는 갈수록 유명한 존재가 되었다. 모든 청년 기사들은 그의 일대기를 읽으며 손에 땀을 쥐었고 불타오르는 가슴을 진정시켜야했다. 마스터 나이트가 삶에서 보여 온 모든 행적과 태도, 심지어 죽음마저도 기사의 표본이라고 칭송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바야르를 진정으로 패배시킨 건 세월이라고 여겼으며 기사왕도 그 점에 공개적으로 동의해주었다. 이렇게 새로운 신화가 탄생했다.
***
한편, 아르투르는 소란이 진정된 후 자신의 봉신들만 따로 불러 모았다. 건국 및 승전에 기여한 자들을 위한 논공행상이었다. 동원한 병력의 양가 질, 전장에서의 활약이 중점적으로 고려되었으나 정치적 안배도 포함되었다.
“변경백 만프레드. 이번 전쟁에선 그대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작위를 공작으로 승격시키며 작위에 부합하는 권리와 추가 영토를 부여한다. 타에라트 백작. 그대 역시 왕에 대한 충성심과 용맹한 투혼을 여러 차례 증명했다. 추가 획득한 영토에서 보상을 내리겠다. 샤를로트 왕비. 당신은 군자금의 모금부터 정보 수집에 걸쳐 다양한 공을 세웠소. 무엇보다 보급 물자를 성공적으로 공급한 것은 굉장히 큰 공이오. 무엇이든 원하는 권리를 하나 가져가시오.”
왕비는 해외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가져갔다. 과한 점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일부러 놔두었다. 어차피 그녀가 쌓을 재산과 세력은 미래에 태어날 왕세자에게 상속될 것이다. 결국 자신의 후계자는 굉장히 안정적인 토대 위에서 왕국을 이어나갈 수 있을 터였다.
“케이! 네 신부를 데려와라! 너희 가문의 시작이니 당연히 네 약혼자도 같이 있어야지? 이제 백작 부인이 되는 거라고.”
케이는 백작 부인이란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배, 배 백작이요? 제가 그런 작위를 받을 자격이 있나요?”
백작은 대제후에 포함될 정도로 강력한 이는 드물지만 수십만 이상의 인구를 통치하는 고위 귀족인건 분명했다. 1대 만에 상승하기 쉬운 작위는 결코 아니었다.
“그럼 남작 정도로 강등해줄까?”
아르투르는 간만에 피식 웃었다.
“당연히 아니죠! 바로 데려올게요!”
케이가 신부를 데려오자 사람들은 눈이 아주 커졌다. 사람을 잡아먹는 안 씻고 다니는 야만족 여자를 상상했는데 훌륭한 옷을 입고 온 귀엽고 부끄러움 많은 소녀였던 탓이다. 케이가 바라 마지않던 귀족 아가씨들과 비교해도 원판은 모자랄 게 없었다. 나머지야 꾸미면 될 일 아닌가! 아르투르도 피식 웃으며 케이가 가져온 서약문을 보았다. 이내 왕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케이! 가문 이름이 왜 이 따위야? 장난 칠 때가 따로 있지. 뭐하는 짓이냐?”
케이는 뭐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한다.
“아………… 그런 이름을 처음 보시는구나. 마스터. 보통 가문명은 집안의 시조를 따오잖아요? 엘라카르시스 가문은 마스터를 비호해주시는 여신님의 성함이고 오’데르만 가문은 고대 영웅 데르만의 후손이란 뜻이잖아요? 저도 거기에 따라서 정한거랍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좀 더 멋진 걸로 바꿔봐. 네 후손들이 대대손손 사용해야 할 이름이다. 그걸 웃음거리로 만들겠다고?”
태연한 표정으로 답하는 케이.
“우스워지지 않게 만들면 되죠. 게다가 제 후손들은 잘 먹고 잘 살 게 뻔하지만 초심은 잃지 말아야 될 거 아니에요? 계속 진행해주세요.”
“……정말로?’
“네!”
케이의 단호한 대답에 아르투르는 한숨을 쉬더니 서약문을 읽어 내려갔다.
“세퍼드(Shepherds) 가문의 케이를 타르나의 백작에 봉한다. 그대는 짐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다스릴 권한이 있으며 충성 맹세를 잊지 말지어다. 충의에는 사랑을, 용기에는 영광을, 배신에는 죽음으로 보상할 것이다.”
“제 양치기 지팡이와 검을 폐하와 폐하의 후계자들에게 바칩니다.”
케이는 오른쪽 무릎을 꿇으며 한 손으로는 지팡이를, 왼손으로는 검을 들어올렸다.
양치기 지팡이란 소리에 모든 귀족들이 배를 잡고 소리 내어 웃었다. 이토록 형편없는 가문 이름과 충성 맹세는 유래가 없었다! 그들은 벼락출세한 근본 없는 가문다운 일이라며 케이를 비웃었다. 그러나 케이는 아주 진지했고 자신을 비웃은 귀족들을 모두 기억해두었다.
‘쉐-에-끼들. 나도 이제 케이 백작님이란 말이지. 네놈들이 암만 비웃어봐야 결국 마지막에 웃는 건 나라고.’
양치기 백작에게는 원대한 계획이 있었다. 그것이 실현되면 오늘 자신을 비웃은 자들은 기필코 후회하리라! 위대한 쉐퍼드 가문의 역사가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