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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왕 아르투르-207화 (207/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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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맹세가 담긴 조약문은 회합에 참가한 모든 왕족들과 제후들에게 주어졌다. 또한 바이스부르크의 앞마당에는 거대한 바위를 놓고, 그 위에 맹세를 새겨놓아 증거물이 사라지지 않도록 했다. 이를 관리해야 할 위르마넨 가문은 데네토르 대왕에 대한 충성 맹세로부터 벗어나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정식 절차가 끝나자 아델라이데 백작이 주최하는 성대한 피로연이 열렸다. 서부 대륙의 모든 대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인 건 페르넬 대왕의 승하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맹세만 하고 돌아가기엔 너무 아까운 자리였던 만큼 참석자들은 눈에 불을 키고 연회에 참석했다. 특히 대륙을 주도할 왕가와 인물들이 탄생한 자리였다. 이곳에서 새로운 권력과 친분을 쌓아야만 향후의 일이 쉽게 풀릴 거라는 건 무지렁이 농부도 아는 일이었다.

“위르마넨 가문의 아델라이데가 여러분에게 인사드립니다. 모두 편안히 즐기다 가실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준비했으니 원하시는 만큼 머물러 주십시오.”

아델라이데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 제후들 앞에서 자신을 소개했다. 이제 열여섯 생일이 지난 그녀는 더 이상 섭정이 필요하지 않았고 부단한 노력으로 걸맞는 자질을 갖춘 후였다. 특히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한 미모와 자신의 영지를 평화 회담의 서약 장소로 이끌어낸 영민함이 눈에 돋보였다. 강력한 제후들이 며느리 혹은 신붓감으로 그녀에게 눈독을 들이기 시작한 건 물론이었다.

아르투르, 루이스, 페르디난트, 그리고 교황 우르술라에게는 그들이 주최하는 홀이 하나씩 주어졌다. 아델라이데는 자신이 사용하던 가장 크고 장엄한 홀을 아르투르에게 제공했지만 기사왕은 해당 장소를 교황에게 양보했다.

“마땅히 최고의 장소는 성하께서 누리셔야지요. 교회의 수장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는 황제뿐입니다. 지금은 황제가 없지요.”

이런 행동은 아르투르가 내세우는 새로운 대륙에 대한 청사진을 내보이는 행동이었다. 교황은 분명한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받아 성스러운 권위를 누렸지만, 한편으로 성스럽다는 권위는 권력을 탐할 수 없는 족쇄가 될 것 이었다. 우르술라 2세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않겠지만 자신은 그보다 훨씬 젊었다. 다음 대 교황이 즉위하면 현실 정치에서 유리시켜버리면 그만이었다.

‘아르투르가 보기보다 영리한 친구로군. 무리수를 두면 서로 피곤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되었다면 저쪽에 맞춰줘도 좋겠군.’

우르술라도 교회를 종속시키려는 루이스의 야망을 분쇄하고 최고의 권위로 인정받는 데 만족했다. 기사왕과의 새로운 관계는 후임자들의 몫이 될 터였다. 자신은 준비만 해두면 그만이었다.

교황을 존중하는 태도는 여전히 불안감을 지니고 있던 대륙의 제후들의 긴장감을 푸는 효과도 가져왔다. 제후들은 아르투르가 오’데르만 왕조처럼 그들을 완전히 종속시킬 의도가 없으며 전통의 질서를 존중할 걸 확인 받았다고 여겼다. 그들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다른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기사왕 부부의 홀에는 사람이 끊이질 않아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자기 영지에선 왕이나 다름없는 백작 이상의 고위 귀족들이 줄을 서서 대화할 기회를 노리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졌다.

“폐하. 아르놀프 백작가와 강의 상류에 있는 수원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는데 저희 가문을 지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검토하고 답신해주겠네. 관련된 자료는 왕궁으로 보내게.”

“폐하! 저희 영지는 해안에 접해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에서 무리하게 병력을 동원했던 터라 때때로 나타나는 해적들을 막아내는 게 힘이 부칩니다. 새로운 병력을 양성할 때까지만 도와주실 수 없겠습니까?”

“자네는 큰형님의 신하잖나. 그쪽에 가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나?”

갸웃하는 아르투르에게 해안 영주는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루이스 대왕께선 이제 자기 영지를 지키기도 벅차시니 군대를 보내주실 여유는 없을 겁니다. 제발 한번만 아량을 베풀어주시면 저희 알레라마치 가문은 은혜는 잊지 않을 겁니다. 꼭 좀 부탁드립니다.”

“그런 상황이라면 마땅히 도와야겠군. 만프레드를 보내겠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 외에도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륙에서 힘 있는 왕에게 도움을 청하려는 제후는 아주 많았다. 많은 수는 여전히 루이스에게 충성 맹세를 했던 신하였으나 더 이상 주군에게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씩, 하나씩 충성 맹세의 대상을 옮길 준비를 했다. 대륙의 정서나 관습상 이건 배신이 아니었다. 봉신을 지킬 수 없는 군주가 충성을 요구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한편 페르디난트 대공에겐 오’데르만 왕조의 지지자들이 모여들어 새로운 시대를 논의했다. 그에게는 젊은 시절부터 함께 해온 동지들이 있었다. 레오폴트는 지도까지 펼쳐가며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언제까지 우리들끼리 싸울 생각입니까? 동으로는 드넓은 초원 지대가 있고 남쪽으로는 열사의 사막이 있습니다. 세상이 넓은데 우리끼리만 싸울 이유가 없지요. 갑시다. 제가 선두에서 당신들을 이끌겠습니다.”

그들은 레오폴트가 제시한 비전에 열렬한 지지를 보냈다. 대공의 젊은 후계자의 군사적 능력이 이번 전쟁으로 검증되었으니 정복의 시대는 이어질 터였다.

그러나 루이스의 테이블에는 그의 어머니인 왕대비를 비롯해, 가장 친밀한 가까운 관계에 있던 제후들만 남았다. 루이스가 새로운 실력자로 밀어주었던 라이넬 공작조차 아르투르의 홀에 있었다. 공작의 영지가 이제 아르투르의 영토에 접하게 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대왕은 마음 깊숙이 좌절감을 느끼며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떠나자꾸나. 역겨운 배신자들과 오래 있을 이유가 없다.”

왕대비는 아들의 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루이스는 낙담한 눈으로 텅 빈 홀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잔치는 아르투르를 위한 자리였고 자신에게는 의도적으로 굴욕을 주기위해 만들어진 게 틀림없었다. 대왕은 측근의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잔인한 놈 같으니라고. 이럴 거면 부르지나 말 것이지.

“너무 걱정 마십시오. 폐하. 총명한 왕세자님도 계신데 걱정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대왕을 부축하는 측근은 뚱보 백작이었다. 귀족이라면 누구나 훌륭한 기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시대. 그는 주변의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내였다.

“고맙네. 장. 짐이 총애하던 자들 중 어찌 자네밖에 남질 않았군.”

뚱보 귀족, 장은 진심 어린 눈빛으로 그의 주군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배신하더라도 저만큼은 죽는 날까지 폐하와 함께 할 것입니다.”

루이스 일행이 홀을 나서자 자리를 오가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대왕 폐하께서 납시오!”

장의 우렁찬 외침 소리에 모든 이들이 고개를 숙였지만 지켜보는 낯빛에는 비웃음과 은근한 깔봄만이 가득했다. 제후들에게 황제 행세를 하고 다니다가 이름만 남은 대왕과 말도 타지 못해 가마를 타고 다니는 백작은 두고두고 놀림거리가 될 희극이었다. 루이스 일행은 음울한 기분을 삼킨 채 자신들을 기다리는 행렬로 걸어갔다.

“벌써 가십니까? 큰형님.”

루이스는 고개만 슬쩍 뒤로 돌아보았다. 찬란한 왕관을 머리에 쓴 아르투르는 제후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자신도 한 때 저랬던 때가 있었지. 인간의 본성은 비열하다. 언제나 강자 앞에서 고개를 조아리지만 그가 몰락하면 모여들어 비웃기 바쁘다.

“왜? 대왕 칭호까지 가져가지 그랬느냐? 내가 네 앞에서 굽신거리길 바라던 걸텐데.”

루이스는 신랄한 목소리로 따져 묻듯 말했다.

“제가 언제 형님들의 몫을 노린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이복형제로서의 정을 바랬던 것뿐이지요. 형님은 누구에게나 인정받은 적장자셨습니다. 저를 경계하실 까닭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르투르의 표정은 여전히 냉담했으나 목소리에선 씁쓸함이 묻어나왔다.

“너도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내 심정을 이해하게 될………….”

루이스는 불현듯 말을 멈췄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느껴졌다. 스스로를 속이고자 했지만 그런 거짓말에 속기엔 루이스는 너무 똑똑한 군주였다. 지금 아르투르는 제후들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귀족들은 아르투르가 보지 않을 때도 그에게 존경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아르투르가 자신처럼 비웃음을 당하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가 몰락하더라도 봉신들은 그를 저버리는 대신 충심을 다해 재기의 기회를 줄 게 분명했다. 애초에 제후들은 자신에게 충성한 적이 없었다.

복종이란 강자에게 하는 것이지만 충성은 마음을 준 상대에게 하는 것이었다.

루이스는 헛웃음을 지었다. 누구보다 완벽한 후계자로 자라왔다고 믿던 자신이 사생아보다 늦게 깨달음을 얻다니. 이렇게 쪽팔릴 때가 있나. 그는 아르투르에게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떠났다. 아르투르도 더 이상 그를 붙잡지 않았다. 그가 받은 냉대는 무익한 전쟁을 일으킨 것에 대한 최대의 복수였다.

“잠깐. 형님을 부축하고 계신 분, 문장을 보니 생귀니엘 백작 아니시오?”

뚱보 백작, 장은 불신의 눈으로 아르투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장의 말은 굉장한 무례였지만 아르투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자격이 있는 사내였다.

“생귀니엘 백작 장 드 바야르 공이 맞군. 공의 아버님께서 남기신 것들이 있소.”

루이스의 배려로 두 사람은 조용한 곳에서 별도의 만남을 가졌다. 아르투르는 가슴팍에 쥐고 있던 유골함을 정성스레 내밀었었다. 함의 위에는 인장 반지와 보검이 놓여 있었다. 아르투르는 굉장히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의 아버님께서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하셨소. 남들은 손주나 보면서 늙어갈 나이에 젊은 기사들보다 훨씬 용맹하게 싸우셨지. 만약 그분이 조금만 더 젊었더라면 승리는 대왕의 것이 되었을 수도 있었을 거요.”

아르투르는 조심스레 장의 눈치를 살폈다. 어찌 되었든 아버지의 원수가 눈앞에 있는데 좋아하길 기대할 순 없었다. 하지만 장은 냉소적인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럼 뭐하나. 결국 싸우다 진 패배자일 뿐이오. 이렇게 뒈져버릴 거 뭐하러 그리 살았나 모르겠군. 하.”

장은 팔짱을 끼며 독기 어린 시선을 유골함에 보냈다. 아르투르는 얼굴이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고인의 명예를 그렇게 모독하지 마시오. 그분은 내가 일생동안 본 어느 기사보다 기사다운 분이셨고………….”

장이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는 통에 아르투르는 말을 멈추었다. 보기 흉할 정도로 살이 찐 귀족이 뒤뚱거리는 모습은 경멸스런 감정을 유발했지만 아르투르는 꾹꾹 참아내렸다. 상대는 자신의 스승의 아들로 바야르 가문의 뒤를 이어갈 사내였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장의 말은 도무지 예상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래서 기사 놈들만 보면 구역질이 나와서 역겨워죽겠다니까. 당신 손으로 자기 스승을 죽여 놓고 명예 타령을 하는 건가? 사람 죽이는 것 외엔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싸이코 새끼들이 뭘 알아! 너흰 네놈들이 대단한 줄 알지?! 기사다운 죽음이란 이런거다!”

뚱보 귀족은 아르투르가 내민 유골이 담긴 도자기를 거세게 후려쳤다. 바야르의 유해가 담긴 도자기가 바닥을 구르며 조각나 흩어졌다. 스승의 유해는 잿가루가 되어 휘날렸다. 아르투르는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순식간에 장의 멱살이 붙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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